영화가 주는 행복을 두 팔 벌려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오래된 취미와 취향은 보통 그 시작점이 모호하다.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기억나지 않거나, 기억이 난들 '취미'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시기를 특정하기 어렵다. 그런 내게 계기도 시기도 모두 명확한 취미가 있다. 바로 영화 감상이다.
최근 브런치에 영화 감상을 올리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글이 쌓이기 전 마음을 다질 겸 영화와 처음 사랑에 빠지게 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스무 살, 대학교 첫 교양으로 '생활 속의 글쓰기'라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시에는 내 전공에 푹 빠져 있었어서 교양도 전공과 관련된 걸 듣고 싶다는 이유로 '글쓰기' 수업을 선택한 거였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강의는 영화 감상이 주를 이루는 수업이었다. 글쓰기 수업에 웬 영화인지 그 의미를 그땐 알지 못했다.
교수님은 매주 ‘감상문, 편지, 이력서 자기소개서 등을 쓰는 법을 짧게 가르쳐 주셨고 그 후 주제에 맞는 영화를 보여주신 후 과제로 글을 써오게 하셨다. 수업에서 보는 영화는 모두 교수님의 인생에 도움을 준 영화라고 소개하셨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세 얼간이>를 보고 감상문 쓰기
<애자>를 보고 서간문 쓰기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보고 버킷리스트 쓰기
<어바웃 타임>을 보고 60대까지의 계획문(과거형으로) 쓰기
수업 시작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영화’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다. 이 강의 제목의 ‘생활’은 바로 이 영화들에 있었다. 우리의 생활에는 우정이 있고 사랑이 있고 가족이 있고 또 내가 있다. 바로 그런 것들을 영화를 통해 깨닫고 결국 나와 나의 삶에 대한 글을 써보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영화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내가 어떤 장르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영화를 보고 뜨거운 무언갈 깨달은 경험도 없었고 소위 말하는 '인생영화' 같은 것도 없었다. 그때 교수님의 인생에 도움이 된 영화들을 매주 보면서 세상엔 정말 좋은 영화가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영화를 보고 감응하는 경험도, 영화 속 노래를 찾아 듣는 경험도, 영화를 끝까지 다 보자마자 스크롤을 제일 앞으로 당겨 다시 보는 경험도 처음 했다.
정확히 그 수업을 계기로 영화 감상이라는 취미가 생겼다. 종강한 이후에도 남은 스무 살을 거의 영화를 보면서 보냈다. 처음으로 받은 장학금으로 (지금 생각해도 비싼) 빔 프로젝터를 샀다. 방 안에 스크린까지 달아두고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달려가 매일 새로운 영화를 봤다. 나는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어떤 부분에서 감동하는지 등 영화 취향이라는 게 생기고, 특히 격동의 시기였던 20살의 나를 구해준 영화들도 만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수업에서는 영화를 보고 끝나는 게 아니라 좋든 싫든 과제로 글을 썼어야 했기에 더 깊게 사유하고 입체적으로 생각하느라 영화를 더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었고, 그런 과정들이 영화 감상을 좋아하게 만든 게 아닌가 싶다. (명확히 해두지만 나는 영화에 전문적 지식이 있지도 조예가 깊지도 않고 엄청나게 많은 영화를 본 것도, 다양한 장르를 보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영화를 통해 무언갈 느낄 수 있고, 그 사실이 좋다는 거다. 부디 이 글이 영화부심으로 읽히지 않길 바란다...)
무려 6년 전 수업을 생생히 기억하는 건 기록을 해뒀기 때문인데, 이 수업이 얼마나 좋았으면 교내 강의수기 에세이 공모전에 수기를 써서 냈었다. 그걸 잊고 있다가 얼마 전 수업에서 처음 봤던 <빌리 엘리어트>를 오랜만에 다시 보고 떠올라 찾아 읽었다. 거기에는 '(이 수업을 계기로) 나는 영화가 주는 행복을 두 팔 벌려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라고 적혀 있다.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났고
나는 여전히 영화가 주는 행복을
두 팔 벌려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