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온 Feb 21. 2024

제주행 편도 티켓

티켓이 먼저 2만 원이었다고!

퇴사 후 한 달 정도 지난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문득 비행기 표를 끊었다. 그것도 편도로.

마치 모든 것이 원래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제주행 편도 티켓을 끊었다. 


"티켓이 먼저 2만 원이었다고!"


기가 찬다는 엄마 앞에서 무자비한 충동에 대한 모든 책임은 티켓값에게 전가하며, 마치 나는 억울하다는 듯이 짐을 쌌다.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올게. 언제가 될지는 나도 몰라. 


시간과 돈이 있어서 놀러 가는 거라고 안심시켰지만, 실은 나는 나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괴로운 마음을 비우고 새로운 것들로 채우고 싶었다. 회피형이 백수가 되면 도망 범위가 이렇게나 넓어진다. 기껏해야 앉은자리에서 내 감정 못 본 척 밖에 못하던 직장인은, 백수가 되어 몸과 마음을 제주까지 회피시키고 만다.


내가 제주에 가는 걸 아는 거라곤 같이 사는 가족밖에 없다. 공감할 사람이 있을 듯한데,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만으로 해소되는 감정이 있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제주에 간다는 걸 나에게도 비밀로 하고 싶었다.




어쨌든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one-way ticket'을 쥐게 되었다. 타고난 무계획 성격 탓에 매번 여행을 때마다 아무런 준비 없이 훌쩍 떠나곤 했지만 이토록 계획도 없고 답도 없는 편도행은 처음이다. 내가 아는 거라곤 비행기 출발 시간뿐. 오늘 어디서 묵을지, 어느 쪽으로 여행할 건지, 언제 돌아올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공항으로 향했다. 짐은 굉장히 가벼웠다. 나는 얼마나 있을지 모르니 넉넉히 챙겨가는 쪽보다는 얼마나 있을지 모르니 최대한 조금 가져가는 쪽이다. 바리바리스타의 대척점에는 언제나 내가 빈손으로 우뚝 서있다.


아슬아슬하게 김포공항에 도착해서 수속장으로 들어와 숨을 고르고 나서야 오늘 잘 숙소를 찾았다. 밤늦게 도착하니까 아무래도 공항 근처가 낫겠지. 제주공항 근처의 (아직 남아 있는) 가장 저렴한 게스트 하우스를 예약했다. 나는야 뚜벅이. 어디든 갈 수 죠.


이런 막돼먹은 여행이지만 스스로 두 가지 룰을 정했다.

하나. 매일 아침 러닝할 것.

둘. <상실의 시대>를 읽을 것.


하나. 매일 아침 러닝할 것 

두 달 전 건강 악화로 퇴사를 하고 난 후, 회복을 위해 러닝을 시작한 지 한 달째 되었을 시기에 제주에 가게 됐다. 이제 막 습관과 재미를 들였을 즈음이라 여행 때문에 러닝이 중단되지 않길 바랐다. 게다가 이제 막 시작한 수영을 포기하고 가는 것이기에 러닝만큼은 꼭 유지하고 싶었다. 여행지에서의 러닝을 시도하는 건 처음이라 설레고 떨렸다. 과연 나는 제주에서 몇 번의 뜀박질을 하게 될까? 부디 매일, 오래 달리고 싶다. 일상의 루틴을 여행지에서도 지속하면 일상과 여행의 경계가 조금은 흐릿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야무지게 러닝복도 챙겼다. 


둘. <상실의 시대>를 읽을 것.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여행지에 하루키의 책을 챙겨가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를 싫어하기 위해서. 


사실 나는 하루키의 문학은 음침하고 지나치게 사색적이라는 남들의 말만 듣고 그의 문학에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읽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나도 분명히 싫어할 거야. 별로일 거야. 하면서. 그러나 나에겐 그를 싫어할 자격이 없다. 그의 책을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으므로. 


그래서 읽기 시작했다. 정말 그런지 궁금해서. 알고나 싫어하고 싶어서. 웃긴 점은, 내심 나는 이 작가를 좋아했으면 좋겠는 마음이 드는 거다. 종교를 반박하려고 성경을 공부하다가 개종한 어느 사람처럼. 이상한 이유로 읽기 시작한 책이 내 취향을 저격하길 바라는 마음. 부끄럽고 간사한 내 마음. 그런 모순을 마음에 품고 몇 번이고 읽기를 실패한 <상실의 시대>를 챙겼다. 나는 하루키를 싫어하게 될까 좋아하게 될까? 




이륙하기도 전에 잠에 들어 하늘을 볼 새도 없이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예약해 둔 게스트하우스에 체크인했더니 온통 외국인뿐이다. 룸메도 외국인 화장실에서 마주치는 사람도 외국인 룸메가 사귄 옆방 친구도 외국인. 아까 공항이 제주공항이 아니라 발리 공항이었나... 내 룸메는 이탈리아에서, 옆방 친구는 인도에서 왔다. 영어로 인사를 나누며 도미토리를 전전하던 유럽여행이 떠올라 기분이 묘했다. 


전 세계 여행자의 대표 스몰톡 주제, "언제까지 있어?"라는 질문에는 자랑스럽게 답했다. 

"나도 몰라! 편도로 끊고 왔어!"

최고의 답변이라는 말에 우리는 한바탕 웃고, 그렇게 늦은 밤까지 꽤 다양한 주제의 대화를 나눴다. 체크인 한 이후로 한국어를 한 번도 못 들었다니. 심지어는 나조차 한국어를 쓰지 않고 있다니! 첫날부터 상상도 못 한 걸 선사해 주는 제주가 웃기고 고마웠다. 앞으로 몇 번의 '상상도 못 한 것'이 펼쳐질까?


소등 시간이 되자 내일 아침에 입고 나갈 러닝복을 미리 꺼내 두고 2층 침대로 올라갔다. 일어나자마자 러닝하고 와야지. 내일의 계획은 그뿐이었다. 어느 방향으로, 무엇을 보며 달릴지는 내일의 일이었다.



수요일 연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