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 눈의 정기
"여행하다가 진짜 행복한 순간이 오면, 그 이유를 찍지 말고 네 얼굴을 남겨 봐."
어느 날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J가 말했다. 여행하다 이따금 찾아오는 주체할 수 없이 기쁜 순간에, 동영상을 켜서 그 찰나의 표정을 남기라는 당부였다. 그러면서 나의 표정을 찍는 것이 행복의 이유가 된 풍경보다도 그때의 감정이 더 잘 담긴다고 덧붙였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방식의 기록이었고,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분명 멋진 말 같았지만, 이해는 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그때는 알 수 없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나는 일본의 교토로 여행을 떠났다. 혼자 하는 첫 해외여행이었기에 설렘과 떨림을 반반씩 안고 갔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하루 시간을 내어 근교행을 택했다. 교토에서 1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들어가면 나오는 산골 마을 '오하라'. 버스정류장과 산마을만 있을 정도로 아주 자연적이고 외진 곳이다. 마을에 도착한 나는 여느 때와 같이 별다른 사전지식 없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을 따라 기념품 샵이 즐비한 메인 거리로 올라갔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한 골목길에 홀린 듯 꺾어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길이었고 누구도 가지 않는 길이었다. 뭐가 있는지, 어디로 향하는지 있는지 알 수 없이 들어간 그 골목은 마을로 이어졌다. 북적이는 관광지와는 다른 차원인 듯 주변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외딴 행성에 홀로 착륙한 모험가처럼 떨리는 마음으로 마을을 탐험했다.
물론 여행 내내 기분이 좋았지만, 사람은 없고 시간은 멈춘 듯한 가을 산골 마을의 고즈넉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길을 걸으며 내 안이 전례 없던 환희로 가득 찼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어찌할 생각도 못 하고 훨훨 걸었다. 우연히 만난 이 고요하고 황홀한 길을 미래의 나에게 보여주고자 열심히 사진과 영상을 찍고 있던 그때, J의 말이 떠올랐다. "여행하다가 진짜 행복한 순간이 오면 그때의 네 얼굴을 찍어." 이런 순간을 말하는 거였을까? 바깥을 담고 있던 카메라를 얼굴 앞으로 고쳐 들었다.
원래 짓고 있던 표정 그대로 카메라를 전환하는 순간 눈물이 왈칵 났다. 화면 속의 나는 난생처음 보는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크고 작은 카메라에 담겨왔고, 급기야 언제든 꺼내 고화질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스마트폰의 발명으로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표정을 지을 때 자연스러운지 등 나의 얼굴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잘 알고 있는데도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웃는 얼굴로 찍힌 적은 많지만, 행복에 겨운 그 순간에 직접 내 얼굴을 확인한 적은 없었기에 나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 나 자신을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내가 내 얼굴을 보고 울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대체 나의 어느 부분이 동해서 눈물이 났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J가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걸 말했던 거구나. 이래서 알려준 거구나. 감정의 스펙트럼이 한층 더 넓어진 듯 느껴졌고 인간이 지닌 감정의 무한함이 경이로웠다.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다가 순식간에 일그러져 엉엉 우는 우스꽝스러운 그 동영상을 다시 볼 용기는 없지만, 그 후로 나와 조금 더 친해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한 친구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반년 만에 만난 것이기에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에 대해 쉬지 않고 얘기했다. 우리가 만나지 못하는 동안 프랑스로 교환학생을 다녀온 나는 주로 타지에서 있었던 즐겁고 놀라운 일들에 관해 얘기했다. 그중 잊을 수 없는 한 친구와의 우정에 대해 말을 하고 있는데, 순간 내 이야기를 듣던 친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깜짝 놀라서 "너 왜 울어?"라고 물으니 친구는 눈물을 훔치며 이렇게 답했다.
"아니 말하는 네 안광에 너무 생기가 돌아서."
친구는 얘기하는 나의 눈이 너무 빛나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고 했다. 나에게서 처음 보는 표정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J의 당부와 내가 교토에서 울었던 이유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카메라를 든 내가 그 화면 안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정답은 안광이었다. 眼光. ‘눈빛’이라는 뜻인 안광의 사전적 의미는 '눈의 정기'이다. 눈에서 뿜어나오는 기운. 그 기운은 아마 마음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것일 테다. 반짝반짝한 그 감정이 마음의 창이라 불리는 눈을 통해 여과 없이 빛을 뿜어내는 것일 테다. 그러니까, 오하라 마을에서 내가 본 것은 내 표정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었다. 싱싱하고 생생한 그 감정을 목격하고 눈물을 흘린 것이다.
나도 콘서트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누군가의 눈이 반짝이고 있는 걸 느꼈던 경험이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며 총명하게 빛나는 그 눈에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빛나는 눈을 통해 빛나는 마음을 마주하는 경험은, 흔하지 않기에 더욱 잊기 힘들다.
하물며 빛나는 나의 눈을 마주하는 것은 어떻겠는가. 교토에 다녀온 지 몇 년 지났고 그 이후로 영상을 다시 본 적은 없지만 나는 여전히 화면 속의 내 안광을 기억한다. 나를 울게 했던 그 반짝임을 기억한다. 자신의 안광을 본 경험은 ‘믿을 구석’이다. 한번 본 이상, 나는 빛나지 않는다고 좌절할 수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 믿음으로 또다시 빛날 힘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도 참을 수 없이 기뻐지는 순간이 오면 잊지 말고 자신의 표정을 들여다보길. 그 안의 당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그 눈빛이 얼마나 빛나고 있는지 꼭 한번 확인해보길. 그 경험으로 또다시 반짝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