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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온 Jan 25. 2024

휴대폰 없이 떠나는 여행

마침내 만나는 자유

"휴대폰 두고 여행하자." 


누가 뱉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그 한마디로 우리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스마트폰 없이 하는 여행. 디지털은 죄다 두고 아날로그만을 챙겨 떠나는 여행. 목적지는 대중교통으로 세 시간 걸리는 인천 선재도였다.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선재도로 가 시간을 보낸 후 오이도로 넘어가서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것이 계획이었다. 


두고 가는 것은 휴대폰 하나인데, 대신해 챙겨야 할 것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이동시간에 읽을 책과 노트, 음악을 들을 미니 카세트, 카메라 앱을 대신할 필름 카메라. 여기에 돗자리까지 챙기니 가방이 두둑해졌다. 


집에서 선재도까지는 2시간 동안 지하철을 타고 오이도에 가서 또 1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초행길에 버스를 잘못 타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노트를 찢어 가는 방법을 꼼꼼하게 적었다. 선재도를 가는 방법, 선재도에서 오이도를 가는 방법과 버스 시간을 적고 간략한 약도까지 그렸다. 


MP3가 있지만 왜인지 더 과한 아날로그를 택하고 싶었다. 얼마 전 동묘에서 구매한 미니 카세트가 제격이었다. 선재도에서 듣고 싶은 노래들을 엄선해 전날 밤 공테이프에 녹음했다. 백예린과 투개월의 노래를 포함한 8곡 정도를 담았다. 갈 준비는 전부 마쳤다. 


여행 당일 아침, 출발을 앞두고 나는 마치 하나의 의식처럼 방문 앞에 서서 침대를 향해 (부서지면 곤란하니까.) 휴대폰을 던졌다. 잘 있어라! 스마트폰 중독자가 스마트폰 없이 여행하는 걸 보여줄게!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두둑한 가방을 메고 문을 나섰다. 두 딸이 한 번에 폰을 두고 나가 걱정할 엄마에게 어떻게든 전화하겠다고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행히 집에서 환승 없이 한 번에 오이도에 도착할 수 있었기에 편히 앉아 책을 펼쳤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살면서 그토록 책을 집중해서 읽은 게 처음이었다. 타고 내리는 사람들 틈에서 책과 나만 남겨지는 최초의 경험이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독서 장소는 지하철이 되었고 여전히 그곳에서 책장을 가장 많이 넘기고 있다. 


직접 그린 약도


오이도역에서 선재도 '뻘다방'을 가는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번 오는 790번. 인터넷으로 실시간 버스 시간을 확인할 수 없으니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 시간을 확인했다. 남은 시간은 30여 분. 아까운 마음 없이 건너편 카페로 가 딸기 바나나 두 개를 나란히 시켰다. 주문이 밀린 음료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한 일은 다름 아닌 'ABC 게임'. 책상 위에 두 손을 올려두고 상대와 같은 포즈를 하지 않으면 손등을 찰싹 맞아야 하는 이 오래된 게임을 떠올렸다는 것만으로도 깔깔거리며 웃다가 언니는 문득 노트를 꺼냈다. "휴대폰 없이 여행하면 좋은 점을 적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슥슥 적어내려갔다. 


1. 추억의 손 게임을 할 수 있다.


790번을 타고 1시간 동안 달려 도착한 선재도의 '뻘다방' 카페. 방문객이 많아 주문이 잠시 중단되었기에 그 앞 인천 바다를 구경했다. 휴대폰을 들고 왔다면 벌써 몇 십 번은 찍었을 풍경이 펼쳐졌다. 우리는 충분히 바닷바람을 느끼고, 모래를 밟고, 파도를 들은 후 필름 카메라로 서로를 몇 장 찍어 주었다. 어떻게 나왔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기에 오히려 셔터를 누르는 데에 아쉬움이 없었다. 


주문을 하고는 인파를 피해 카페 반대편이자 해변의 끝자락에 위치한 울창한 나무들 밑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한적한 나무 밑에 챙겨온 돗자리를 펴고 책과 노트를 꺼냈다.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틀고 그림을 그렸다. 맥시멀리스트 자매는 크레파스와 색연필까지 챙겨왔기에 오늘 눈으로만 담은 색들을 표현할 수 있었다. 망고 스무디와 치즈케이크를 먹으며 자연을 누렸고, 핸드폰과 함께 두고 온 줄 알았던 소유욕이 발동해 카세트테이프에 파도 소리를 담아왔다. 그리하여 로우 파이의 파도 소리와 장난스럽게 녹음한 우리의 목소리가 유일하게 남은 그날의 소리다.



해가 뉘엿뉘엿 지며 돌아갈 시간임을 알려주고, 우리는 다시 바다를 따라 걸었다. 서해답게 물이 다 빠져 갯벌이 되어 있었는데, 노을 지는 갯벌은 전에 모르던 또 다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여과 없이 지는 해를 다 받으며 걷는데 순간 오는 길 지하철에서 읽은 책의 구절이 떠올랐다. 좋아서 노트에도 적어뒀던 문장이었다. 


"이 많은 햇살을 기억에 담고 내 어찌 무의미에 대고 걸을 수 있으리" 


아침에 읽은 책의 구절을 오후에 실체로서 마주하는 경험은 귀하다. 순간이 더 선명히 기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화질 좋은 동영상으로 남겨도 결국 휘발되어 버릴 감정이 문장과 햇살 속에 깊게 남았다. 더이상 무의미에 대고 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햇살 만끽 후 저녁을 먹기 위해 오이도로 넘어가는 버스에서 대차게 잠이 들었다. 대중교통에서 잠이 든 건 정말 오랜만이었는데, 보통 잠이 와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잠은 오고, 할 건 없어서 스르륵 편하게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언니에게 노트에 하나 추가하라고 일러줬다. 


2. 이동시간에 자면서 피로를 풀 수 있다. 


그렇게 도착한 오이도는 붉고 아름다운 여명이 지고 있었다. 배가 고파 무조건 밥집으로 직행하기로 했던 우리는 배고픔도 잊고 노을을 즐겼다. 점점 어두워져서 필름 카메라 플래시를 키고 노을을 담는 우리에게 지나가던 아저씨는 "이럴 땐 플래시 끄고 찍어야 예뻐~"라고 일러주셨다. 나중에 사진을 현상했을 때, 그분의 말씀이 옳았음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은 까맣게 나오지만, 배경이 되어주는 붉은 노을은 내가 눈에 담았던 그것과 정말 유사했기 때문에.



하늘이 온전히 까매지고 나서야 밥집을 찾았다. 핸드폰이 없기 때문에 맛집을 찾을 수는 없고, 이끌리는 대로 들어갔어야 했는데, 문득 전에 와서 먹었던 작은 식당이 떠올랐다. 위치를 애매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육감을 믿으며 골목골목을 들어가 보다 결국 찾았다. 유레카! 


하루 종일 음료수와 조각 케이크 하나 먹은 우리는 새우구이와 칼국수 대자를 클리어했다. 배를 통통 두드리며 손목시계를 보니 시간은 이미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잘 있다고, 예상보다 늦게 들어갈 것 같다고 엄마에게 전하기 위해 식당의 유선 전화를 빌렸다. 선 달리고 수화기 달린 전화 얼마 만이냐고 킬킬 거리며 안부를 전했다. 우리는 잘 있어! 걱정 마! 


그렇게 엄마의 걱정은 덜고 배는 채운 우리는 자유롭게 오이도를 더 즐기고 돌아왔다. 핸드폰 하나 없을 뿐인데 마음이 이토록 가벼웠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는 책을 읽다 졸다를 반복했다. 열두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고 침대에는 아침에 던진 핸드폰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막연히 좋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나 구체적이고 다양하게 좋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었다. 휴대 전화 하나와 커다란 백팩을 가득 채울 짐들을 맞바꿨기에 몸은 무거웠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하루 종일 다른 이들의 일상을 보는 일 하나 없이 오직 나의 일상에만 집중하는 것, 더 예쁘게 담으려는 욕심 없이 있는 그대로를 눈에 담는 것, 느리더라도 어딘가에 의존하지 않고 나의 감으로 걷는 것, 놓친 버스가 30초 전에 떠났다는 것을 모른 채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것. 남기지 않아도 오래 기억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 이날 배운 소중한 마음들이다. 


그 이후로 언니와 나 사이에는 자그마한 유행이 생겼다. 틈만 나면 "아날로그 여행할래?"라고 말하는 것. 실제 여행으로 이어지든 안 이어지든, 우리는 휴대폰을 두고 떠나는 것에 겁내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아니까. 던져두고 떠난 그곳에 자유가 있다는 걸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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