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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온 Feb 18. 2024

엄마의 오빠 변진섭

5년 전 아날로그의 매력에 푹 빠져 있던 나는 불현듯 턴테이블을 구매했다. 집에 바이닐도 하나 없는데 당장 갖고 싶다는 마음에 덜컥 사버린 것이다. 


틀을 바이닐 하나 없는 집에서 턴테이블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배송되기 전에 LP를 사고 싶었다. 새로운 음반보다는 세월의 흔적이 담긴 옛 LP로 첫 턴테이블 음감회를 열고 싶었지만, 마땅한 음반을 고르지 못했던 나는 고민 끝에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옛날에 좋아하던 가수 있어?”

“응 있지. 진섭 오빠.” 


진섭 오빠. 변진섭. 우리 엄마는 변진섭을 좋아했다. 동갑이라면서 꼭 오빠를 붙여 말하는 엄마가 웃겼지만, 마음 깊이 공감했다. 원래 좋아하면 다 오빠니까. 다만 엄마에게도 ‘오빠’가 있는 줄은 몰랐다. 그 존재를 알게 되어 기뻤다. 


그 길로 중고 사이트를 뒤져 변진섭 1집 <홀로 된다는 것>을 찾았다. 리메이크되어 조금 익숙한 몇 개의 노래 빼고는 전부 처음 보는 노래였다. 직거래를 한 날, 난생처음 쥐어 보는 커다란 엘피를 들고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에 본 엄마의 표정을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변진섭 노래를 듣는 엄마는 벅참과 행복, 지난날에 대한 회상, 알 수 없는 슬픔이 한 데 섞여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단언컨대 난생처음 보는 엄마의 표정이었다. 그 순간 내 방에 앉아 있는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어느 20대 소녀였다. 


3번 트랙 ‘너무 늦었잖아요’의 전주가 나오자마자 엄마가 소리를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동그란 LP가 다 돌아갈 때까지 엄마는 정말 행복해 보이는 표정으로 음악을 감상했다. 턴테이블 앞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노래를 음미하던 엄마가 아직 생생하다. 아마 그때부터, 우리 엄마를 그렇게 만드는 변진섭을 나도 조금씩 좋아하게 된 것 같다. 


그 후로 나와 엄마는 변진섭 LP를 자주 들었다. 이후 다양한 바이닐을 구매했지만, 엄마와 나의 최애는 변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아침을 변진섭 1집으로 열었는지 셀 수도 없다. 다른 앨범의 곡들도 찾아 들으며, 그렇게 나도 변진섭의 팬이 되었다.



그리고 지난 2022년 7월 3일, 마침내 엄마와 나는 변진섭 콘서트, '변진섭 2022 전국투어 콘서트 in 서울 : 변천사'에 다녀왔다. 


엄마에게 변진섭 콘서트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지 4년 만이었다. 꾸준했던 전국 투어가 코로나로 인해 열리지 못했다가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바로 예매하고는 엄마와 손 붙잡고 방방 뛰었다. 예매를 한 날부터 콘서트 당일까지 엄마는 변진섭의 모든 앨범을 찾아들었다.


공연은 대학로의 어느 소극장에서 진행되었다. 입구에서 나눠주는 플래카드와 형광 팔찌를 받아 들고 자리를 잡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콘서트 타이틀이기도 한 변진섭의 '변천사'를 담은 몇 분간의 샌드아트가 진행된 후 곧이어 공연이 시작되었다.


첫 곡 '새들처럼'과 두 번째 곡 '그대에게'를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내 방의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던 목소리가 눈앞에서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게 기분이 이상했다. 옆을 보니 엄마는 손을 모으고 경청하고 있었다. 노래가 끝날 때마다 누구보다 높이 박수를 쳤고 환호했다. 


그는 베테랑 가수답게 유연하게 공연을 이끌어갔다. 즉석에서 신청 곡을 받아 노래를 들려주기도 했고, 밴드 세션과 함께 즉석 합주를 보여주기도 했다. 관객과의 거리가 가까운 만큼 소통도 하면서 편안한 분위기에서 공연이 진행되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공연 후반부에 모두가 함께 일어나 신나게 몸을 흔들고 떼창 했던 순간이었다. 공연 끝났다는 듯 들어갔던 변진섭이 쏟아지는 앵콜 세례에 못 이기겠다는 듯 다시 돌아와서는 말 그대로 '무대를 뒤집어 놓았다.' 모든 관객을 일으켜 세우고는 모두 함께 뛰며 노래를 불렀다. 


이윽고 모두가 사랑하는 그의 노래 '그대 내게 다시'를 마지막으로 콘서트는 마무리되었다.



난생처음 콘서트를 보고 나온 엄마는 변진섭이 더 좋아졌다고 말했다. 음원으로만 들을 때는 편안하게 불러서 몰랐는데 정말 열정적으로 진심을 다해 목소리를 내는 그의 모습을 보고 진심을 느꼈다는 것이다. 


나는 변진섭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엄마와의 ‘연결’을 느꼈다. 집에서 LP를 틀어 두고 함께 따라 부를 때도 느꼈지만, 콘서트장에서 진짜 변진섭의 노래를 들으며 함께 환호하고 감동하는 동안 우리는 완전히 연결되었다. 그의 목소리는 세대를 연결하는 힘이 있었다. 


엄마는 몰랐겠지만 나는 공연 동안 엄마를 더 많이 쳐다봤다. 엄마가 어떤 표정인지 궁금했다. 다 함께 일어나 춤추며 떼창 했던 공연의 후반부에서 엄마는 황홀해했다. 단 한순간도 손을 내리지 않고 변진섭의 무대에 푹 빠져있었다. 5년 전 어느 저녁에 처음 봤던 엄마의 표정을 다시 마주했다.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어 엄마 몰래 그녀의 표정을 녹화했다. 


엄마의 20대부터 나의 20대까지 건재해준 변진섭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엄마의 오빠였던 당신 덕분에 나는 엄마의 새로운 얼굴을 봤다고. 그 얼굴은 아주 예뻤다고.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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