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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온 Feb 21. 2024

오래된 MP3에 담겨 있는 것

서랍에서 MP3를 발견했다.


며칠 전 서랍을 뒤지다 MP3를 발견했다. 


처음 갖게 된 건 열두 살 무렵이다. 10년도 더 된 그 당시에는 최신 전자기기였지만, 스마트폰 보급 이후 찬밥 신세가 됐었다. 그렇게 잊고 지내다 고3이 되고 자발적으로 2G폰을 쓰며 다시 친구가 된 나의 하얀색 YEPP MP3. 꼭 5년 만의 만남이었다. 


당장 켜 보았지만 배터리가 없어 켜지지 않았다. 그래서 곧장 동묘에 가 충전기를 샀다. 충전이 다 되면 세모난 노란 불이 들어오는, 그 시절 그 충전기를 말이다. 충전 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전원을 켠 MP3에는 열아홉의 나와 열두 살의 내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19살의 MP3 


1. [2017_수능기출_영어_듣기평가.mp3]
2. [2017_수능특강_영어영역_듣기_.mp3]
3. [노래]


재생목록 폴더를 확인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대한민국 수험생에게 MP3의 공식적 역할은 매일 아침 30분씩 풀던 수능 영어 영역 듣기 평가 음원이었으리라. 그러나 그 속에는 아무런 추억이 없다. 그 폴더를 눌러볼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궁금하지도, 보고 싶지도 않은 수험 생활의 기억일 뿐이다. 영어 듣기 폴더들을 무시하고 [노래] 폴더를 열었다. 듣기 평가 파일보다 덜 중요하지만 더 소중했던 폴더. 클릭하면 온갖 추억들도 함께 열릴 그 폴더를 말이다. 


[노래] 폴더 속에는 수험생 시절을 버티게 해 준 노래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당시 좋아하던 아이돌의 노래와 그 아이돌이 추천한 노래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참 지독한 사랑이었구나. 지금은 좋아하진 않지만, 그 노래들에 빚진 밤이 많았다는 걸 생각하면 여전히 고맙다. 쉬지 않고 그들의 노래를 듣고 싶었지만 계속 따라 부르게 돼서 공부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는데, 그래서 '공부할 때 들어도 되는' 노래 목록이 따로 있었다. 몇 시간을 한 곡만 들으며 문제를 풀다 보면 어느새 '가장 많이 재생한 목록' 폴더 맨 위에 올라가 있었다. 노래 취향은 잘 바뀌지 않았으므로, 상위권에 위치한 노래들은 항상 비슷했다. 


그 외에도 아예 잊고 살았던 노래와 당장 어젯밤에도 들었던 노래가 뒤엉켜 있었다. 어떤 노래는 반가웠고 어떤 노래는 '내가 이런 노래를 들었다고?' 싶을 정도로 경악스러웠다. 약 300곡을 찬찬히 넘겨 가며 들었다. 과거 어느 한 기간에 많이 듣던 노래를 시간이 흘러 다시 들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노래를 듣는 순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해진다는 것을. 타임머신을 탄 듯 그때로 돌아간다는 것을. 노래 한 곡에도 기억이 저장되는데 하물며 300곡이라니! 플레이리스트 전체에서 그 해의 냄새가 났다. 


학교로 향하던 길에서, 나의 세계였던 작은 독서실 책상에서, 공부하기 싫어 몰래 집 가던 길 위에서, 정말 어디서든 MP3를 쥐고 있었다. 힘든 시기가 맞긴 했는지 지금은 잘 듣지 않는 '위로'와 '응원'의 노래가 많은 게 어쩐지 짠했다. 언제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노래를 검색해 들을 수 있는 지금. 매일 똑같은 노래들만 들었을 고등학생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영어 듣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선생님의 허락을 구해놓고 노래만 주야장천 들었던. 시간과 품을 들여 취향의 노래를 다운로드했던. 열아홉의 나를 떠올려 본다.



12살의 MP3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12살의 초등학생은 어쩌다 최신 MP3를 갖게 되었을까? 당시 학교에서 ‘우리말 경연 대회’가 열렸는데, 엄마가 그 대회에서 1등을 하면 MP3를 사주겠다고 했다. 피나는 노력으로 1등을 해서 받았냐고? 아니. 초반에 탈락해 놓고 그래도 열심히 했으니까 사달라고 떼썼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결국 철부지 열두 살은 귀를 돌려 음악을 넘기는 미키마우스 MP3도 거치지 않고 무려 ‘화면이 있는’ MP3를 손에 넣고야 만다. 


사실 MP3와의 추억은 초등학생 때 더 많다. 그땐 세상에 MP3보다 재밌는 게 몇 없었거든. 처음에는 노래 넣는 법도 잘 몰라서 두 살 위 언니의 재생목록을 그대로 옮겨와 들었다. 문제는 당시 사춘기였던 언니가 감성 폭발 발라드만 들었던 것. 덕분에 투애니원과 샤이니를 좋아하는 명랑 소녀는 MP3만 틀면 러브홀릭과 포 맨, 바이브를 들어야 했다. 아수라 백작처럼 ‘롤리롤리 롤리팝 오 넌 나의 롤리팝’과 ‘밥도 잘 먹지 못해 네가 돌아올까 봐’의 간극을 겅중겅중 뛰어다녔다. 


MP3로 라디오도 많이 들었다. 먼저 잠든 언니 옆에서 숨을 죽인 채 주파수를 맞춰 라디오를 듣던 기억이 생생하다. 가끔 주파수가 맞지 않아 ‘지지직’ 거리면 자세를 바꿔가며 주파수가 맞는 곳을 찾았어야 했는데, 어쩔 땐 MP3를 쥔 손을 높이 들고 있어야만 잡음 없이 들리기도 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열두 살 꼬맹이는 그렇게 자발적으로 벌을 섰다. 《슈퍼주니어의 키스 더 라디오》와 《신동, 김신영의 심심타파》는 그럴 가치가 있었다. 녹음 기능을 사용해 마음에 드는 노래를 계속 돌려 듣기도 했는데, 혹시라도 타이밍을 놓치면 노래 직후 나오는 DJ의 목소리나 시끄러운 광고 소리까지 녹음되었기에, 늘 신중해야 했다. 




이 외에도 인터넷 소설도 넣어 읽고 내재된 저용량 게임도 하며 MP3를 손에서 놓지 않는 날이 많았다. 어린이와 청소년의 경계에 서 있던 나에게 MP3는 주크박스이자 라디오이자 책이었다. 놀이터였고 어쩔 땐 세상이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MP3에 대해 뭐 이리 할 말이 많은지. 아직도 남은 이야기가 많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끝도 없이 과거가 떠오르는 건, 노래도 라디오도 팬픽도 아닌 그 속에 내가 있기 때문이리라. 사진이나 일기가 아닌 '취향'으로 남아있는 과거의 나를 마주했기 때문이리라. 


SNS에는 타인의 이야기가 넘쳐나고 유튜브에는 타인의 취향이 담긴 음악 플레이리스트가 올라온다. 모두가 같은 노래에 같은 춤을 추고, 속도는 또 얼마나 빠른지 눈 깜짝할 사이 새로운 유행이 쏟아진다. 온전히 '나'로만 채우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오래된 MP3를 몇 번이고 다시 보게 되는 것 같다. 나의 취향만으로 점철되어 순도 100%의 나로 이루어져 있는 MP3를, 몇 번이고 화면을 쓸어도 새로고침 되지 않을 나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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