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놀이클럽의 <이상한어린이연극-오감도>
공놀이클럽의 <이상한어린이연극-오감도>는 이상의 난해한 시 ‘오감도’를 어린이의 시선에서 풀어낸 작품이다. 시 속에서 반복되는 “제n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처럼, 극은 13가지 ‘무서운 것’을 이야기한다.
태어나는 것, 달리기, 부모님, 집, 학교, 서울, 스마트폰, 아이돌, 나이 드는 것, 꿈, 노키즈존, 전쟁, 마지막으로 나까지. 한 주제당 한 명의 배우가 화자가 되어 무대를 이끌어간다.
처음에는 무대 위 어린이 배우가 대사를 또박또박 해내는 모습이 그저 기특하게 느껴진다. “이걸 어떻게 다 외웠을까” 하고 흐뭇하게 바라보는 것도 잠시, 관객은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지금 이 배우들은 연기가 아니라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무릇 배우란 작가가 쓴 대본을 연기하는 사람 아니었던가. 그런데 무대 위 어린이들은 아무리 봐도 남이 만든 장면을 수행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어린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실제로 <이상한어린이연극-오감도>는 한국 최초의 어린이 공동창작 연극이다. 제작 전 배우들과 워크샵을 진행하며 무서워하는 것에 대해 글을 쓰며 나눴고, 그것을 바탕으로 장면을 구성해 극을 만들었다. ‘진짜처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인 것이다.
어린이의 시선이기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 단순하거나 귀여울 것이라는 생각은 오만이다. 어떤 어린이는 본인에게 무관심한 부모님이 사는 집이 무섭고, 또 다른 어린이는 “넌 나보다 무조건 잘 살 거야”라고 말하는 부모님이 무섭다. ‘왜 우리집은 트리마제가 아닌 거야’라고 남과 비교하게 만들면서도 헤어 나올 수 없는 스마트폰이 무섭고, 어른이 시작했지만 결국 어린이 손에 총을 쥐게 만드는 전쟁이 무섭다. 끝없이 외모에 불만을 갖게 만드는 아이돌이 무섭고 어린이의 존재를 밀어내는 노키즈존이 무섭다.
분명 있는 그대로의 사회를 드러내는데, 어떤 순간은 눈을 뜨고 있기조차 괴롭다. 김소영 작가가 ‘어린이라는 세계’에서 말했듯, ‘어린이의 직관은 무엇을 꿰뚫어 보는 신통한 능력이 아니라, 있는 것을 그대로 보는 힘’인 것이다.
이쯤에서 어른 관객은 다시 한번 자연스럽게 깨닫는다. 이 연극 … 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구나! 어린이가 만든 어린이 극이라고 그 대상이 어린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배우들이 말하는 두려움은 인류 보편적인 내용이다. 어느새 극장에는 어른과 어린이가 아닌, ‘어린이’와 ‘어린이였던 사람’만 남는다. 이 연결은 마지막 공포, ‘제13의 아해가 나 무섭다고 그리오’에서 직관적으로 드러난다.
이상의 시 <오감도>는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로 시작해서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소’로 끝난다. 어쩌라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이 문장은 어린이의 시선에서 명료해진다. 13장에서 어른이 된 ‘나’도 여전히 무서운 게 천지라는 걸 알게된 어린이는 혼란 끝에서 두려움을 받아들인다. 달리는 게 무서우면, 달리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 순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달리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달려도 괜찮아.”
이 역설은 강력하다. <이상한어린이연극-오감도>는 단순히 멈출 자유를 말하지 않는다. 멈출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달릴 수도 있다. 문 너머 골목이 막혀 있을지 뚫려있을지 무섭다면 문을 열지 않아도 되는데,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문을 열어도 괜찮은 것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모든 배우들이 나와 저마다의 ‘두려움 해방’을 선언하며 문을 열고 질주한다. 둘 중 하나를 무조건 택하라고 종용하는 방식으로 굴러가는 세상을 구원할 마법 공식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작품은 ‘할 자유’와 ‘하지 않을 자유’를 동시에 건넨다. 희한하게도 두 자유를 손에 쥐니 달려 나갈 용기가 샘 솟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극의 주제와 맞닿아 있는 운영 방식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이상한어린이연극-오감도>는 ‘열린 객석’으로 운영된다. 공연 중 입퇴장이 자유롭고, 관객이 소리를 내거나 좌석 내에서 몸을 움직여도 제지를 최소화한다. 또한 극장 환경에 관객이 편안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객석 조명도 어둡지 않게 유지한다.
연극 시작 전에는 금지 사항을 안내 받는 것에 익숙했는데 오감도 시작 전의 안내방송은 모두 ‘괜찮아요’로 끝났다. 중간에 들어와도, 소리를 내도, 움직여도, 괜찮아요!
좌석에서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예의로 통하는, 이른바 ‘시체관극’과는 정반대의 운영이다. 그렇다면 관객이 어느 정도의 희생을 해야 한다는 것인가? 적어도 내가 체험한 열린 객석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모두가 더 크게 웃고 더 크게 울고 자유롭게 박수쳤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어린이 관객은 누구보다 의젓하게 관람했다.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은 것이 열린 객석이다.)
그것은 내가 바라던 극장이었고 나아가 내가 꿈꾸는 세상이었다. 기차에서 아이가 울어도 눈치 주지 않는 세상. 어린이를 거부하는 공간이 없는 세상. 막다른 골목도 뚫린 골목도 적당한 세상. 도로로 질주하지 않아도 괜찮기 때문에 도로로 질주해도 괜찮은 세상.
어른과 어린이, 두려움과 자유가 함께 공놀이를 하는 그런 세상 말이다.
사진 출처 - 공놀이클럽, 이지응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97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