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훗날에는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사라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세상은 효율을 향해 속도를 낸다. 덕분에 기다리지 않고 맛집에 입장할 수 있고 비행기에서도 SNS를 할 수 있으며 화장실에서도 영화를 본다.
효율을 좇는 세상을 따라 대기 없는 삶을 착실히 살던 나는 지난 1년간 기다림의 미학을 배우고 있다. 스승은 서울 충무로 역사에 위치한 오! 재미동. 그곳에서 나는 기다리는 일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를 알게 됐다.
오!재미동(이하 오재미동)은 서울영상위원회가 운영하는 충무영상센터다. 다양한 영상문화 관련 서적과 DVD가 있어 누구나 언제든 무료로 영화 관람이 가능한 곳이다. 영화인을 위해 장비나 공간을 대여해 주기도 한다.
오재미동에서 영화를 보는 방법은 다소 번거롭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장을 가득 채운 DVD 중 원하는 커버를 골라 카운터에 가면 직원이 알맹이인 디스크를 내준다. 그걸 들고 지정된 자리에 가 직접 TV를 틀고 디스크를 삽입하고 버튼을 눌러 영화를 재생하는 방식이다.
게다가 DVD를 틀었다고 해서 바로 영화가 재생되지 않는다. 첫 화면에 사랑스러운 스틸컷 콜라주와 함께 ‘Play(재생)’ , ‘Scene Selection (장면 선택)’, ‘Photo Gallery(사진)’, ‘Credit(크레딧)’ 등의 목록이 있다. 리모컨으로 ‘Play’까지 친히 눌러줘야 비로소 영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엄지손가락 하나, 버튼 한 번이면 영화가 시작하는 넷플릭스에 익숙한 내겐 이 과정마저 생소했다. 이동진 평론가의 한 영화평처럼 지나온 적 없는 시절에 대한 근원적인 노스텔지어가 있는 나를 흥분시키고도 남는 과정이었다.
영화를 트는 과정까지 전부 감상에 포함되는구나. 거쳐온 단계만큼 부피는 더 커지는 법이구나.
기다리는 즐거움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생했다.
방문 첫날에 고른 영화는 ‘미스 리틀 선샤인’이었다. 시간 때우기 용으로 가볍게 틀었으나 영화에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야속하게도 10분 정도 남았을 즈음 약속 시간이 다 되어 일어나야 했다. 아. 지금이 클라이맥스 같은데! 이 장면이 하이라이트라는 걸 아는데 두고 떠나야 하는 기분이란!
그 10분이 궁금해 죽겠어서 그날 밤 OTT로 보려다 관뒀다. 대신 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다음 날 퇴근하자마자 달려가서 다시 DVD를 빌려 남은 10분을 봤다. 이 경험이 내겐 정말 소중했다. 10분을 기다리는 그 하루가 괴롭기보다는 기대로 가득했기 때문. 그리고 마침내 여러 단계를 거쳐 남은 10분을 봤을 때 훨씬 더 와닿았다.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걸 볼 수 있는 콘텐츠 대홍수의 시대에 기대와 기다림은 정말이지 황금 같다.
그래서 오재미동에서 시작한 콘텐츠는 오재미동에서만 감상한다는 혼자만의 규칙을 세웠다. 기다리는 시간까지 감상에 포함하기!
규칙은 서적에도 똑같이 적용됐다. 특히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 짬을 내서 읽다 보니 여러 권으로 이뤄진 만화책은 며칠에 걸쳐 완독할 수 있었는데 이 또한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읽다만 책을 거기에 두고, 나는 또 내 일상을 살다가, 다시 그곳에 찾아가 마저 읽는 경험. 마치 삶에 비밀이 생기는 기분이다. 그 비밀을 내 속이 아닌 토끼의 간처럼 저기 어딘가에 두고 다니는 기분. ‘블루 자이언트’ 만화책을 읽던 며칠간은 내 간이 꼭 오재미동에 있는 것 같았다.
약 20년간 운영해 온 오재미동이 올해 12월에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사기관인 서울영화센터가 생기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아쉬운 마음은 감출 수 없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토토’라도 된 양 나의 옛 영화관이 사라지는 게 슬프다. 무엇보다 오재미동과 함께 중요한 무언가가 세상에서 사라질까 봐 두렵다.
그러니 많은 것을 한가득 쥐고서도 무언갈 놓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면 오재미동에 찾아가 보시길. 모두가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는 지하철역의 한가운데에 멈춰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경험을 해보시길 바란다. 비효율은 곧 죄악이 되는 세상에서 번거로움을 자처하는 곳. 두 팔 벌려 기다림을 환영하는 곳이니 말이다.
발밑으로 덜컹 거리며 지나가는 지하철 소리가 덤으로 반겨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