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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삭 Apr 15. 2023

출간 연재- 북한 이주민과 함께 삽니다 3

#18 소수자가 불편하지 않은 사회

나의 최애인 대만 가수 채의림은 2015년 ‘PLAY’ 콘서트 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무엇이 정상인지를 교육받습니다. 하지만 포용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교육은 잘 받지 않죠. 다른 이를 받아들이려면 먼저 자기 자신부터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모든 가능성도 받아들일 수 있지요.” 


“저는 여러분들이 엽영지의 이야기를 듣고, 더 많은 포용심을 갖기를 바랍니다. 먼저 자기 자신을 긍정하세요. 어쩌면 정말로 남들과 다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요. 특히 연예인은 사람들의 긍정이 더 많이 필요하지요. 가끔은 저도 방향을 잃을 때가 있는걸요. 어쩌면  당신의 주변 사람도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답니다. 그럴 때는 마음을 열어주세요. 그리고 손을 내밀어주세요.” 


정확히는 콘서트 중간에 ‘장미 소년’ 엽영지에 관한 짧은 다큐멘터리 영상을 함께 시청하고나서 했던 말이다.


엽영지는 실존 인물로 2000년 대만의 한 학교 화장실에서 피를 흘린 채로 발견되었다가 다음 날 사망한 청소년이다. 처음에는 의문사로 알려졌으나 오랜 재판 끝에 사고였다는 게 밝혀졌다. 수업 시간에 화장실을 갔다가 물 탱크에서 샌 물에 넘어지면서 크게 다친 것이다. 


그런데 엽영지는 왜 하필 수업 시간에 화장실을 갔을까?  그건 그(그녀)가 ‘여성’스러운 ‘남성’이라는 이유로 학교 폭력과 성폭력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남성인지 확인해 보겠다면서 바지를 벗기는 학우들의 폭력이 있었기 때문에,  엽영지는 아무도 없는 수업 시간에만 화장실을 갈 수 있었다. 


엽영지의 죽음은 대만 사회에 경종을 울리면서 학교폭력 과 성차별 문제를 수면 위로 부상시켰다. (2년 뒤, 대만에는 성별평등교육법이 통과되었다.) 


채의림은 2019년 금곡상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했을 때 이런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저도 어떤 상황에서는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엽영지를 통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공감(同理心,empathy)하면서 제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고자 합니다. 이  노래를 그(그녀)에게 바칩니다. 또한 온전한 자신이 될 기회가 없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선택권이 없었던 이들에게 이 노래를 바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을  택해야 한다는 것을, 자기 자신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을  꼭 잊지 마세요.” 


나는 이 장면을 보고 내가 채의림의 ‘철분(鐵粉)’이 될 것 임을 확신했다. (철분은 중화권에서 골수팬을 의미하는 신조어이다.) 채의림의 말은 덕후 김이삭의 가슴만 두드린 게 아니었다. 인간 김이삭의 가슴도 함께 두드렸다.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된다는 말에는 아마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소수자로서가 아닌 정상인으로서의 ‘나의 일’이 되는 순간, 놀랍게도 많은 이들이 차별을 합리화한다. 어디 그뿐인가. ‘남의 일’이라면서 아예 중립(?) 기어를 박고 방관한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든 소수자가 될 수 있다. 소수성의 반대말은 다수성이 아니라 정상성이니까. ‘정상’의 범주는 상대적이기에 같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언제, 어디에, 어떤 상황에 놓이냐에 따라 얼마든지 소수자가 될 수 있다. 


다만 그 소수성이 같은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는 다른 소수자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확연하게 알지 못 하는 것이다.  


그 이질감에서 동질감을 느낄 때, 그 ‘다름’이 사실은 ‘같음’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우리는 타인에게 더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더 쉽게 자신의 ‘다름’을 긍정할 수 있지 않 을까? 


20년 가까이 중화권 가요계의 천후로 군림하면서 부와 명예, 인기를 거머쥐었던 알파걸 채의림도 소수자에게 공감할 수 있다는데, 그보다 평범한(?) 우리가 공감하지 못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내게는 이런 일도 있었다.  


민과 결혼한 뒤에 나는 종종 이런 질문을 받곤 했다.  


“부모님이 반대하시지 않았어?” 


상대가 친한 사람이면 나는 이렇게 답하곤 했다.


“부모님이 반대하실 수는 없었지. 난 아버지가 없거든.”  


그럼 열이면 열, 상대는 당황했다. 누구를 당황하게 만들려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민이 북한 이주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내가 전혀 하지 못했던 것처럼 내게 질문했던 사람들도 내가 한부모 가정에서 자랐을 수도 있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없다는 나의 대답에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부모 가정입니다.”  

“제 양육자는 부모가 아닌 다른 사람입니다.”  

“혼자 아이를 키웁니다.”  

“저는 함경북도가 고향입니다.” 

“남자친구는 없고 여자친구가 있습니다.” 

“저는 남성이 아닌 여성입니다.” 


이런 말을 솔직하게 내뱉는 게 더는 어렵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기 자신을 긍정하며 솔직하게 내뱉었을 답들이 더는 듣는 이를 당황하게 만들지도, 불편하게 만들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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