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한 세계에서
센서. 메디움에 도착해서 땅을 디딘 순간부터 그날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 후로도 며칠간 나는 전율에 휩싸였어. 도착한 건물에서 메디움 입성 검사를 마치고, 처음 밖으로 나갔을 때,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자유로이 흐르는 바람이었어.
어떻게 말해야 할까. 모든 것이 적당했어. 바람의 세기도, 온도도, 실려 오는 냄새도, 부는 방향도, 얼굴에 부딪히는 느낌까지. 어떻게 그렇게 적당하게 좋을 수가 있지? 평생 무슨 일이라곤 겪어 보지 못한, 순순한 그런 바람이었어.
센서, 여기는 좁은 골목길도 하나같이 반듯한데, 아무리 구석에 있는 곳도, 꿉꿉하고 시큼한 냄새가 안 나더라. 또 아주 멀리에 있는 것들도 선명하고 뚜렷하게 보였어. 배워서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그런 깨끗함과 청결함을 보니까 신기했어. 어느 정도냐면 여기는 비 오는 새벽에 낀 안개도 탁하지 않아. 갓 지은 밥에서 포슬거리며 꼬실꼬실 피어나는 김이 사방에 퍼져 있는 그런 느낌이야. 신선한 김 말야.
그래서 창문을 열고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으면, 안개들이 촉촉이 내려앉는데 끈적거림이 없어서 기분마저 상쾌해지는 거야. 센서, 나는 이런 공기에 기분이 달라질지 몰랐어. 몸이 훨씬 가볍고 걸음걸이도 산뜻해지는 거 있지. 그건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파트리아에서는 모두가 느릿느릿 어깨를 늘어뜨리고 걸었잖아. 포승줄에 꽉 묶여 질질 끌려가는 것처럼 말야. 여기선 다들 파트리아에서 온 사람들조차 경쾌하게 걸어.
이곳의 경이로움에 대해 말하자면 정말로 밤을 새워도 모자라. 그중에 단연 압권은 빼곡하게 들어찬 건물들이야. 건물들이 얼마나 높은지 하늘에 말뚝을 박아 놓은 것 같다니까. 모두 경탄하고 치켜세우는데 나는 좀 못내 아쉬워. 건물들이 하늘을 도막 내는 느낌이거든. 저렇게 파아란데, 탁 트인 하늘을 볼 수 없어서 안타까웠어.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해. 맑은 하늘 한 번 봤으면 좋겠다고 해 놓고, 맑은 하늘 몇 번 경험했다고 이제는 더 많은 걸 바라잖아.
센서, 여기 와서 처음 3주간은 집에 오면 지쳐 곯아떨어졌어. 생활할 때 하는 것 하나하나 다 처음 하는 거니까 너무 긴장되더라. 긴장되니까 머리까지 굳어버린 건지 말도 안 되는 실수도 많이 했어. 메디움 적응 프로그램이랑 기초 고등 학습 프로그램을 이수해야 한대서 매일 학교엘 가.
대중교통을 처음 이용하는 날에 나랑 백구 둘 다 진땀을 뺐어. 첫날부터 지각할 위기에 처했었어. 배운 대로 행동하는데, 예상한 시간보다 항상 더 걸리는 거야. 학교까지 가는 대중교통은 두 가진데, 하나는 파트리아 셔틀처럼 지상 위를 달리는 버스, 하나는 공중을 가로지르는 열차였어. 당연히 열차가 빨리 가겠지? 그래서 우리는 열차를 타러 갔는데, 홍채 인식을 해야 통과를 할 수 있다는 거야. 여기는 파트리아 사람이 판 스킨을 대량 복제 생산해서 노동계급 인공인간이 많이들 산대. 그러니까 같은 피부 조직이 있을 수 있다는 거지. 그래서 안면 인식은 안 한대.
홍채를 인식해야 한다니까 나는 인식 화면에 내 눈을 가까이 대었어. 그런데 계속 인식 불가라고 하는 거야. 인식 불가라 하니까 너무 불안하더라. 인식이 안 되면 화폐가 안 빠져나가니까 탈 수가 없거든.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났어. 우리는 안절부절못하다가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다시 뒤로 가서 줄 서려고 쭈뼛거리며 움직였어. 그러니까 바로 뒤에 있던 사람이 “저기요, 거기 바닥에 선 보이시죠? 거기 안쪽으로 서서 있으면 돼요.”라고 말해 주더라. 짜증 나 보였지만 동시에 우리가 불쌍해 보였나 봐.
센서, 나는 파트리아에서 거둔 좋은 성적 덕분에 기초 고등 학습은 이미 다 받았잖아. 그런 사람들은 선택 프로그램을 이수할 수 있댔어. 그래서 쭉 보니까 ‘공중 윤리’라고 있더라. 윤리라는 말에서 나는 기대를 했어. 어쩌면 할아버지가 외우게 한 말들에 대해 배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몇 번의 수업을 받아도 내가 암기했던 문장은커녕 단어 하나도 들을 수가 없었어. 받은 교재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어. ‘공중 윤리’는 정말 그냥 규칙이었어. 규칙의 나열들.
처음에는 물어볼까 생각했는데. 곧 포기했어. 그 인공인간 선생님은 어느 교실에서나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같았거든.
센서, 여기 와서 놀란 게 많지만, 가장 많이 놀란 건 뭔지 알아? 그건 바로 스캔을 뜨는 병원 시스템이야. 파트리아에서는 담당 선생님과 한 달간의 성장 기록도 공유하고, 의견을 나누고, 보완할 점도 알려 준 다음, 스캔을 뜨러 가잖아. 여기는, 오 분이면 끝나.
역시나 그 홍채 시스템에 내 홍채를 찍으면, 손목에 일회용 바코드가 잠시 새겨져. 이동 경로를 따라가서 내 순서가 되면 바코드를 찍고 스캔실로 들어가거든. 그냥 바로 누우래. 누워서 스캔 뜨고 종료되면 바코드 지우고 귀가. 정말 간단하지? 모든 사람이 그렇게 쉴 새 없이 드나들어. 공장처럼 찍더라. 누군가와 대화할 일이라곤 없어.
그런데 센서, 나는 아직도 스캔을 받는 게 괴로워. 아픈 의료 행위는 하나도 없는데, 산소도 충분히 공급되는데, 그 통 안에 들어가면 질식할 것 같더라. 사람 몸의 형태처럼 생긴 통 안에 들어가면 천장에서 천천히 뚜껑이 내려와서 닫혀. 뚜껑도 사람 몸의 형태를 땄대. 우리는 항상 통 안에 있으니까 바깥에서 볼 기회가 없으니, 정확하지는 않은데 얼굴을 덮고 있는 쪽에는 사람 얼굴이 그려져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통에 들어가면 발 모양에 발을 넣게 되어 있거든. 그걸 보면 영 부풀려진 소문은 아닌 것 같아.
통에 들어가면 눈을 가리게 되어 있어. 그러면 아주 미세한 전기 빛들이 사방에서 몸을 쏘아 세포를 채취해 가. 조금도 따끔거리지 않아. 그냥 빛에 쬐고만 있으면 되거든. 마지막에는 통 안에서 얇은 막이 나와서 몸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감싼 후 한 번 꽉 찍어. 점토에 모양 찍어 내듯이 말야. 그럼, 정말 끝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무서운 일이 아닌데, 늘 무섭더라. 계속 갇혀 있을까 봐서.
센서, 자기 자신에 대해 안다는 건 어떤 걸까? 나를 이루는 형태를 안다는 걸까. 아니면 나를 이루는 성격이나 습관, 생각을 안다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안다는 걸까.
나는 늘 불투명한 유리를 보고 있는 것 같아. 내 모습이 안 보여. 그게 뿌리를 몰라서, 어디서 왔는지 몰라서 그런 줄 알았어. 그런데 어제, 알았어. 내가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지, 나의 근원을 알았어. 그런데 신기하지? 나는 더더욱 모르겠어.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부정당한 걸 알아. 레이라는 애가 해준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거든. 센서, 네가 다시는 만나지 않으면 좋겠다고 했던 사람은 우리 할아버지야. 이 편지를 받을 때쯤엔 모든 게 끝나 있을 테니까 이제 얘기해도 되겠지.
할아버지는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라고 그러셨어. 옛날 철학자가 한 말이래. 오늘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러려면 인간이어야 하잖아. 자유롭고 평등하려면 말야. 태어난 나는 ‘모든 인간’에 속할까? 인간이 아니라면 나는 누구일까? 모든 인간의 범주는 어디까지일까?
센서, 너는 아니? 사육당한 인간, 몸을 버린 인간, 배양된 인간, 배양된 인간과 인간의 혼합체 중에서 도대체 누가 인간이지? 센서, 할아버지는 내가 의래를 찾으면 알게 될 거라고 하셨는데, 찾을 수 있을까? 정말 알게 될까? 나는 모르겠어.
센서, 집 앞에 작은 꽃가게가 있더라. 작고 앙증맞은 화분에 핀 라일락이 바람에 흩날리는데 마치 나에게 손을 흔드는 것 같은 거야. 백구는 내 눈 색이랑 닮았대. 나와 아주 잘 어울린다고 해서 하나 샀어. 창가에 두고 죽지 않게 열심히 키우고 있어. 계절이 바뀌어 꽃잎이 떨어져도 내년에 다시 필 거야. 언젠가 만나면 너에게 줄 선물이야. 다시 만날 때까지 잘 가꿀 수 있게, 행운을 빌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