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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영 Oct 24. 2024

[ch2] 13  누구도 믿어선 안 돼

파멸한 세계에서

“뻥치고 자빠졌네! 너 게임 좋아해? 난 어마무시하게 좋아하거든. <P-WAR>라는 게임이 있는데 그게 종류가 두 개야. 하나는 홀로그램 하급 게임, 그냥 우리 통화할 때 나오는 거처럼 좀 보면서 깨작깨작 우주선 한 번씩 쓩 나왔다 사라지는 거. 하나는 주변이 쫙 홀로그램이 풀로 채워지는 사용자 맞춤형 실감 게임! 오감이 지리게, 공격 한 번 받으면 몸이 쫙 조여지면서 숨도 막혀오는 그 말초적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거. 

당연히 우리 집 포함 모두 하급 게임만 있었지. 그런데 우리 옆집에 딱 <P-WAR 실감 게임> 무려 한정판을 가진 애가 있었어. 파트리아에서는 그런 걸 가질 수가 없잖아? 공식적으로 우린 화폐가 없으니까. 한수라는 애였어. 걔 아빠가 ‘안식의 집’ 관리원이었어. 파트리아 사람으로는 최고 직위까지 갔다고 걔 엄마가 어찌나 우릴 볼 때마다 위아래로 깔보던지! 그 집은 특별히 스킨도 메디움 공장과 계약해서 공급한 걸 아주 대량생산을 한댔어. 어느 정도로 돈이 많았냐면, 그 게임의 상품을 현찰로 살 수 있을 정도였지! 뭐든 장비 아니겠어.

다들 한수한테 굽실댔어. 하고 싶다고 솔직하게 애원하고 그 애 눈 밖에 나는 짓은 하지 않았어. 나만 유일하게 동네에서 한수랑 놀지 않았어. 그 집에 가지도 않고, 고고하게 아빠가 내주는 수학 문제를 풀었어. 속으로는 간절히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한수에게 나도 게임 한번 하게 해달라고 하고 싶었지. 근데 처음에 포지션을 딱 그렇게 잡으니까 점점 할 수 없더라? 애들이 게임하러 가자고 할 때마다 내가 뭐랬는지 알아? 난 게임보다 수학이 좋아, 하고 집으로 들어갔어. 정말로 수학을 좋아하는 것처럼. 

대외적으로 난 수학을 아주 좋아해. 이 능력으로 파키오 고객의 눈에 들어서 피부에 좋은 건 물론, 파트리아 사람에게 제공되지 않는 몇몇 교육의 기회도 얻었으니까. 하지만 그 게임 매우 하고 싶은데. 해 보고 싶은 욕구는 더 강력해졌는데, 지금도 누가 나에게 묻는다면, 난 이렇게 대답할 거야. 게임을 극도로 싫어한다고.”


입이 풀린 백구가 속사포로 쏟아내고는 개운하게 웃었다. 말 못 해서 죽은 귀신에게 해방된 기분이었다. 

“내가 거짓말을 한다?”

“너의 이성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판단력이 우수한지 나는 모르겠는데, 하나는 알겠어. 결혼할 사람이 정해지면 미리 영상으로 보잖아. 넌 네가 단단히 빠져버렸다는 걸 부정하고 싶은 거야. 그래서 메모리칩을 빼는 액션까지 취하면서.”

페르는 짐짓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조금 떨어져서 꽃에 물을 주고 있던 디오는 큭큭거렸다. 

“그게 아니라면 실행에 옮겼어야지. 우리가 여기 온 지도 벌써 한 달이나 지났는데. 기회는 있었잖아? 친절하게 나한테 알려 주려고 오고도 말야.”

이 상황이 아주 마음에 든 듯 디오가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화분 근처에 떨어진 물을 행주로 닦았다. 

“너, 뭔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판단은 그렇게 쉽게 하는 게 아니야. 생명에 관한 일은 더더욱. 나는 지금의 파키오가 아주 위험하다고 판단해. 궁극적으로 인류를 위한 판단….”

“그래! 인류를 위한 판단 계속하시고. 자기 자신도 계속 속이시고. 내가 해봐서 알아. 그게 계속 남는다니까? 야 거기 너 이름이 뭐라고?”

백구가 디오를 향해 소리쳤다.

“가자! 루다 찾으러!”

디오가 눈치를 보며 행주를 내려놓더니 잽싸게 백구 쪽으로 붙었다.

“그런데 디오, 그. 지금이 그 기초 자아 상태라고 했잖아. 그럼 거기에 새로운 기억과 감정이 쌓이나? 막 어린애가 성장하면서 겪는 그런 것처럼?”

“글쎄, 뭐 없진 않겠지?”

“너 인공지능 맞아?”

“아, 난 머리 나쁘게 주문되어서…….”

디오는 머리를 긁적이며 주문자 페르를 쳐다봤다. 

“그럼 너 싸움 잘해?”

“당연하지! 벌써 새턴 쪽에서 다섯 번! 위원회 쪽에서 다섯 번!이나 잡으러 왔는데 내가 다 물리쳤지!”

“오케이! 그럼 얼른 가자. 이제부터 우리 친구다! 이봐 페르! 너도 가야지. 거 가짜 감정 싫으면 진짜 감성 쌓아야지!” 

백구의 말에 디오가 웃었다. 그런 백구와 디오 사이를 가르고 페르가 먼저 나가 버렸다.



‘콰앙------뿌지직------------.’

낡고 썩은 나무 문이 부서졌다. 사실 문은 연약했다. 너무 오래되어서 제대로 잠기지도 않고 아귀도 맞지 않아 틈이 벌어진 데다 군데군데 찢어진 데도 있었다. 그리 세게 차지 않아도 잘 열릴 문이었다.

가장 먼저 놀란 건 준우와 진우였다. 닥치는 대로 날려버릴 것 같은 인공인간 하나에, 말 한마디로 사람 죽일 것 같은 파키오인 하나에, 한번 물면 놓치지 않을 기세의 파트리아인 하나. 준우와 진우는 서로 눈도 안 맞추고 밖으로 도망가기 바빴다. 그 모습에 레이는 헛웃음이 나왔다.

‘젠장, 바르다고 한 거 취소다.’

레이는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갈지 머리를 빠르게 굴렸지만, 수가 없어 보였다. 나가려면 4명을 뚫어야 했다.

“안녕.”

루다가 먼저, 아침인사 하듯, 가볍게 인사했다.

“아오! 나는 안녕 못할 것 같다아. 여기 냄새, 어우, 먼지! 콜록콜록! 어우! 여기 있으면 폐병 걸리겠다. 쟤 데리고 빨리 나와, 난, 콜록콜록…기관지가 약해서 나가야겠어.”

디오가 연신 기침을 해대며 나갔다. 그 순간의 어이없는 감정은 모두가 같았다. 폐도 없는데 폐병이라니.

백구는 루다에게 쪼르르 달려가 다친 데 없는지 살피며 ‘도서관에 같이 안 가서 이런 일이 생겼다.’부터 시작해 어젯밤부터 좀 전까지 있었던 일을 일사천리로 고자질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듣던 레이는 그만 기가 질렸다. 아르바이트할 때도 말이 많은 녀석이라 생각했는데, 루다 옆에서는 촉새도 저런 촉새가 없었다. 레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페르는 공간을 살폈다. 간이침대 하나, 탁상 하나, 1인용 의자 하나, 문 옆에 있던 긴 의자 하나가 가구의 전부였다. 지하에 있는 탓에 창문은 아예 없었고, 화장실 천장에 환기구만 하나 있을 뿐이었다. 사방 벽에 둘러진 곰팡이들은 서로 누가 더 멀리까지 가나 내기하듯 퍼져 있었다. 바닥은 바깥과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흙먼지가 깔려 있었고, 구석에는 먹고 버린 봉지들이 한가득이었다. 침대에는 양팔과 다리를 묶은 흔적이, 탁상에는 피를 뽑는 간이 의료 도구들과 소독품들이 있었다. 

‘냉장고가 어디 있을 텐데.’

보이지 않았다. 그때서야 페르 눈에 레이가 들어왔다.

루다가 백구의 이야기를 듣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페르가 성큼성큼 걸어 루다를 지나쳤다. 그러고는 루다 뒤에 있던 레이의 배를 발로 사정없이 찼다.

“퍽, 쿵-”

레이가 벽 쪽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동시에 루다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지만, 백구가 루다를 잡았다. 

“백구,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이제, 페르는 레이를 벽 쪽으로 바짝 밀어붙이고는 한 팔로 목을 움켜쥐고 다른 팔로 옷을 찢고 있었다. 레이의 동공이 확장되고 실눈이 터졌다. 있는 힘껏 발버둥을 치고 몸을 비틀어 보았다. 페르의 힘을 당해낼 수가 없다는 걸 알아도 지키려고 애썼다. 절대, 뻇겨서는 안 되었다.

“그만해애!!!!!!!!!!!!!!!!!!”

루다가 울부짖었다. 

“백구, 쟤 나쁜 애 아냐. 이거 좀 놔 봐. 말로 할 수 있잖아! 응?”

루다의 말은 무조건 들어주던 백구가 고개를 저었다. 루다는 백구에게 잡혀 발을 동동거렸으나 아무리 움직여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만해! 레이는 내 친구라고!”

페르가 멈췄다.

“친구? 하-”

페르의 손에는 레이의 속바지에서 찾아낸 작은 냉장 용기가 들려 있었다.

“친구라고?”


페르가 레이를 질질 끌고 와 루다 앞에 세웠다. 만신창이가 된 레이를 안으려고 했지만 백구가 저지했다.

“잘 봐. 레이. 이건 루다 피지. 누가 시켰지?”

“내가 피 빼는 걸 허락했어. 우린 서로 필요한 정보를 나눈 거야.”

루다가 대신 대답했다.

“넌 이걸로 얘네가 뭘 하려는지 아나?”

페르가 싸늘하게 추궁했다.

“자손을 낳을 수 있는지 확인하는 용도랬어.”

“헛소리! 자 레이. 너희도 어딘가에 연구실이 있겠지. 안 그래? 정말 그 정도의 확인으로 끝날까? 피만 뽑은 게 아니던데. 피부에서 체세포도 채취했어. 그들이 이걸로 무얼 할 것 같나? 레이.”

“무슨…무…무슨…소…리야….”

레이가 덜덜 떨면서 간신히 물었다.

페르는 레이를 똑바로 쳐다보며 그녀에게 채혈 용기를 보여 주더니 힘껏 바닥에 내리쳤다. 유리 용기가 산산이 부서지더니 새빨간 선혈들이 바닥으로 금세 퍼져 나갔다.

“너는 파키오인과 인간이 다르다고 생각하나? 원래부터 둘은 같은 존재야. 외모만 다를 뿐. 뿌리가 같지. 욕심이라는 뿌리. 저 피로 완성할 수 없겠지만, 시작해 볼 수는 있지. 루다와 같은 존재, 배양 말이야.”

이번에는 루다의 몸도 떨렸다. 흐르던 눈물이 어느새 멈췄다. 백구는 루다가 벗어날 염려가 사라지자 힘을 살짝 풀고 루다를 받쳐만 주었다. 

“루다, 아냐. 아냐. 정말, 난, 그런 게 아냐.”

바닥에 주저앉은 레이가 기어서 루다에게 오려하자, 백구가 발로 가로막았다.

“어허, 어딜.”

상황이 얼추 끝난 것 같자, 밖에 있다 들어온 디오가 페르의 신호를 받고는 미리 준비해 온 도구로 피를 싹싹 닦기 시작했다. 

“아따, 여기 먼지! 이거 산재해야 해. 산재!”

사라지는 피를 보던 루다가 조그맣게 말했다.


“혐오스럽다, 저 피.”


“에엣. 루다 이제 그만 나가자아. 어우 저녁 되니까 은근 쌀쌀한데, 겉옷 가져올걸. 감기 걸리겠다.”

백구가 말을 돌리며 양손을 루다의 어깨를 잡고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 움직였다. 부서진 문 앞에서 루다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레이. 혹시 생각이 있으면, 나중에라도 찾아와. 누구의 의지도 아닌, 너의 의지로 무언가를 할 생각이 든다면 말야.”

백구가 루다를 데리고 먼저 나갔고, 페르와 디오가 따라 나갔다. 

넋이 나간 레이를 남겨두고서.     


여름밤이었다. 빼곡하게 하늘 높이 올라선 건물들이 환하게 도시를 밝히는 메디움의 여름밤은, 서늘했다. 루다는 몸이 계속 떨렸다. 백구가 계속 손으로 팔을 쓸어주는데도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떨고 있는 루다를 보니, 페르는 짜증이 났다. 그래서 슈트 재킷을 벗어 어깨에 걸쳐주고는 루다를 불렀다.

“루다, 누구도 믿어선 안 돼. 나도, 여기 이 녀석도.”

그는 고갯짓으로 백구를 가리키고는, 디오와 함께 멀어져 갔다.   

  

여름밤이었다.

서늘했지만

온기가 돋기 시작한 

여름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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