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한 세계에서
“그러니까. 새턴이 날 ‘태초의 어머니’로 만드는 이야기구나. 그래서 내가 없어야 하는 거네, 그렇지?”
“아, 아니 아니, 꼭 그렇다는 게 아니고! 아니, 그러니까, 네가 자손을 낳지 못하는 게 증명만 되면!”
“내가 아기를 낳으면?”
“그…그건….”
“죽일 수밖에 없어. 그치? 그 말을 뭘 그렇게 뜸 들여. 아까는 잘해 놓구서.”
“그거야 네가 아무리 선한 사람이어도, 너의 의지가 선해도 세상의 의지는 선하지 않다고 그래서……”
“맞아, 새턴이 없더라도 내가 살아 있다면 누군가는 또 날 원하겠지. 그러면 나 같은 애가 많아지고 결국에는 파트리아 사람들은 파키오 사람들에게 더는 쓸모가 없을 테니까.”
레이는 놀랐다. 거기까진 말하지 않았는데도, 루다는 본질을 정확히 이해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임무를 시작할 타이밍이었다.
“루다, 나랑 함께 할래?”
“복수하자고?”
루다는 잠깐 레이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네가 말하는 선한 의지야? 나를 앞세우는 게 아니라고 맹세할 수 있어? 내가 너희 편에 선다는 게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 너도 알잖아. 파키오에서 키운 딸이 파키오에 맞선다.”
“너는 몰라! 네가 보지 못한 세상에서 하루에 얼마나 많은 파트리아 사람이 죽어 나가는지 알면!”
루다가 레이의 말을 잘랐다.
“레이! 나는 도구가 아니야. 새턴의 도구가 아닌 것처럼 말야. 나를 죽여도, 살려도 어떻든 내 이름이 쓰이겠지. 그래서 너희의 선한 의지 아래 모이는 사람들이 희생된다면. 그런데 그게 사람들의 의지가 아니라면, 파키오와 무엇이 달라? 무언가를 하려면, 직접 하라고 너희 어른들에게 말해.”
레이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른들은 늘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겐 두 경우 다 좋은 일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모일 거고, 그러면 드디어 군대를 조직할 수 있고, 우리가 성공할 수 있다고. 파트리아의 어둠을 걷어낼 수 있다고.
“너희 어른들은 무얼 하지?”
루다가 마지막 방아쇠까지 당겼다.
그게 언제였더라. 그런 논리가 생기기 시작한 건. 기억이 났다. 오래전 어르신이 살아 있을 때는 강경파의 힘이 약했다. 간혹 아기를 데려오자고 한 이들이 있었지만, 어르신은 반대했다. 어떤 사람들은 아기를 내버려 둔다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어르신은 끝끝내 아기를 데려오지 않았다. 어르신이 돌아가신 후부터 그런 말이 나왔다. 아이가 성인이 되면 죽이거나 우리 쪽으로 데려와야 한다고. 그즈음부터 어른들은 누군가를 시켜 어떤 일을 하게 하거나 보고를 받았다. 점점 그런 것이 익숙해지고 당연해졌다. 그래서 이번 임무를 받은 것이 자랑스러웠다. 레이는 혼란스러운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만 가. 정우랑 진우가 데려다줄 거야.”
“레이, 화났어?”
루다가 사근사근 물었다.
“아, 그냥 가. 머리 아파. 다신 보지 말자. 네가 뭐라 해도 난, 옳은 일을 할 거니까.”
어른들은 그게 옳은 일이라고 했다. 레이가 자란 곳에선 모두들 어른들의 말을 믿었다. 레이도, 그렇게 믿었다.
“그래, 맞아. 옳은 일을 해야지. 너는 너의 사명대로 해. 나는 나의 사명을 찾을게. 음…그러자면 책을 찾아야 하는데! 자, 이제 책 줘.”
“응?”
루다의 요구에 레이가 무슨 말이냐는 투로 되려 물었다.
“나 여기 데리고 오면서 내가 찾는 거 준다고 했잖아!”
“아…아…. 그거?”
“없어? 너 거짓말한 거야?”
“아아 그거 있긴 있어. 진짜 있어!”
레이는 허둥대며 찾기 시작했지만, 여기 없는 게 확실했다. 물건이라곤 몇 가지 의료 도구와 간단한 살림 도구가 다였으니까.
“어디 있는데?”
루다에게서 멀어지려는 레이에게 가까이 가며 추궁했다.
“아아. 기억났다. 아, 미안해. 내가 착각했지 뭐야. 다른 연구실에 있어.”
“레이, 내가 아까부터 느낀 건데, 진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넌 연기하면 안 되겠다. 연기를 못해도 너무 못해. 그 센 컨셉도 좀 버리고.”
루다는 똑부러져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엉성한 레이에게 조언을 해주고 싶어졌다. 파트리아에서 이동할 때 여자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손을 잡거나 무리를 지어 앉아 깔깔대며 웃었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말들이 끊이지를 않았다. 루다는 단 한 번도 그 사이에 낄 수 없었다. 항상 혼자 걷고, 혼자 앉았다. 어떨 수 없이 같이 있게 될 때라도 루다는 그들에게 없는 아이나 마찬가지였다. 레이가 들으면 펄쩍 뛸 말이었지만, 이렇게 만나지 않았더라면, 밤을 새서 이야기하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주 보고 웃는 그런 친구.
“아악! 짜증 나. 정우! 진우! 어딨어! 얘 좀 빨리 데려가!”
레이가 부르는 소리에 쌍둥이가 한달음에 달려 내려왔다. 그렇지만 루다는 그애들이 무섭지 않았다. 책을 찾지 못하는 일이 더 두려웠다. 좋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루다는 물러설 수 없었다.
"나는 대체로 얌전해. 별로 눈에 띄는 거 안 좋아하거든. 그래서 좋았던 적이 없었으니까. 파장을 일으키는 것도 싫어. 그냥 고요하게 시간이 흐르면 좋겠어. 그런데 이 일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어. 그래서 네가 정 날 빈손으로 돌려보낸다면, 나는 오늘 일을 보고하러 보호실로 갈 거야. 나와 그분을 떨어뜨려 놓은 얘기로 내 마음을 흔들려 했던 계획을 후회하게 될 거야. 그렇지만, 책을 준다면 오늘 일을 발설하지 않을게."
루다가 한마디 한마디 할수록 레이와 쌍둥이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내가 살던 곳.”
결국, 레이가 실토했다.
“네가 살던 곳이 어딘데!”
“아 말하면 안 되는데……”
“그럼 안 물을 테니까 가서 책을 가져와.”
루다가 팔짱까지 끼고, 마치 책을 가져올 때까지 나가지 않겠다는 투로 말했다.
“그게, 거긴 지금 갈 수가 없어. 그게… 거긴…파트리아에 있어.”
‘파트리아? 할아버지는 분명 메디움에 가서 찾으라고 했는데. 어째서 파트리아에 있지?’
아주 곤란했다.
‘할아버지가 이 사람들과 같이 계셨을까? 그렇다고 해도 아직까지 보관하고 있을 리는 없잖아.’
생각이 많아졌다.
‘그럼, 삼촌도 거기 계시는 걸까?’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레이, 그럼 파트리아에 가자.”
"뭐라고?"
루다가 주변 행색을 둘러보며 말했다.
"보아하니, 공식적으로 온 건 아닌 거 같은데, 그럼 거꾸로 몰래 파트리아로 갈 수 있는 거 아니야? 밀항 말이야."
"미쳤어? 얘 좀 봐.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조용히 사고 치는 스타일인가? 야! 너가 지금 사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이 안돼? 왜 여기 와서 학교에 가고 아르바이트도 하게 하는지 알아? 출석체크!"
레이는 루다가 진짜로 그럴까 봐 겁이 났다. 잘못하면 사는 곳이 들킨다.
“그리고 거긴, 네가 살던 그런 곳이 아니야. 되게 험악한 곳에 있어. 모두 목숨 걸고 모인 곳이야.”
확실히 큰 소란이 될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할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뭔가를 저지르기는 섣불렀다. 루다는 곰곰 생각하다가, 삼촌이 거기에 있는지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기로 했다.
“그래 그럼. 하나만 물을게. 거기에 의래라는 사람이 있어?”
“의래?”
레이의 눈이 보름달만큼이나 둥그래졌다. 목소리도 떨렸다.
“의래라는 사람은 없어.”
“다시 잘 생각해 봐.”
“의래는 내가 살던 곳 이름이야. 어르신이 지으신 이름. 옳을 의(義), 올 래(來). 언젠가 올 정의라고 했어. 그리고, 내가 있다는 그 책 이름이 의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