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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영 Oct 22. 2024

[ch2] 이루다 11  맺지 못한 신화 이야기

파멸한 세계에서

“이런. 소개가 늦었네. 루다와 결혼할 페르디다야.”

페르가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백구 쪽으로 돌아섰다. 새턴의 바람을 이뤄주지 않을 계획이었지만, 아주 충동적으로, 순간적으로 그렇게 소개했다. 좀 전의 입맞춤도 그러했다. 백구가 보고 있다는 걸 느낀 순간, 저도 모르게 꽃을 물어버리고 싶었다.

‘이거, 좀 위험한 선택인지도 모르겠군.’

세뇌되고 조작된 감정을 뺀 상태, 투명한 기초 자아 상태라면 이성으로만 판단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자아에서 원초적인 감정이 생겨났다. 뺏기고 싶지 않았다. 페르는 낭패감을 숨기려 다부진 남자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며 그를 소개했다.

“그리고 이쪽은 나를 도와주는 디오. 인공인간이긴 한데 머리는 비었고, 힘만 세니 조심하는 게 좋아.”

“보다시피 난 파키오인이고. 미리 말해 두지만, 메모리칩을 빼버려서 순수한 상태야. 마지막에 학습만 남겨뒀지. 객관적인 정보 말야. 나는 순수하게, 이성적으로, 판단하려 해.”

무얼 이성적으로 판단하겠다는 것인지는 몰라도, 좋은 말이 아님은 분명했다.

“저기, 순수하다는 게 거 아름답고 뭐 예쁘고 그런 게 아니더구만. 거 뭐야. 며칠 겪어 보니까. 어, 그래. 무바지하고. 아주 그냥 딱 단칼이여!”

디오가 손으로 허공을 가르는 액션을 취하며 덧붙였다. 백구가 있는 힘껏, 몸부림쳤다. 하지만 속절없이 속눈썹만 푸르르할 뿐이었다.

“이봐, 백구. 지금 일을 이렇게 만든 건 너야. 루다가 잡혀가지 않았으면, 아직 나는 올 계획이 아니었어.”          



“진짜 너, 친구 좀 잘 사귀어. 무슨 애가 그렇게 머리가 가벼운지. 우리가 너 이름은 아는데 얼굴을 모르는 거야. 그래서 이번에 메디움에 도착한 애들 아르바이트하는 데서 좀 정보를 캤거든. 나는 니 친구 옆에서 일했는데, 너랑 같이 있는 게 자주 보이더라고. 그래서 물어봤지. 그 예쁜 친구 좋아해? 하니까 걔가 ‘루다?’ 하면서 한사코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더라. 얼굴은 새빨개져서 헤벌쭉 웃는 게 나쁜 의미로 해맑더라. 여기서 나가면 걔부터 잘라! 아, 그건 그렇고 너도 그래. 넌 네 목숨이 위험한 걸 알고 메디움에 오긴 한 거야? 정우! 진우! 그만 싸우고 여기 좀 풀어!”

서로 거의 멱살잡이까지 하던 두 남자가 레이의 호통에 냅다 달려와서 침대에 묶인 루다의 손과 발을 풀었다.

“쟤가 성질이 드러워서 그렇지, 애는 착해.”

오른쪽 뺨에 긴 칼자국이 난 정우가 다정하게 말했다. 정우의 말을 레이가 받았다.

“쟤들이 험악하게는 생겼는데, 바른 애들이야.”

서로를 향해 악담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하는 애들을 보니 루다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들 말대로 질이 나쁘거나 악의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 우리가 아무리 사람이 좋아 보여도, 해야 할 일은 하는 사람들이거든. 그러니 웃지 말고! 자, 목마르지? 물 마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애였다. 말은 거친데, 행동은 동생을 돌보는 언니 같았다. 그렇지만 알지도 못하는 애가 주는 걸, 더욱이 자신을 납치한 애가 주는 걸 덥석 먹기는, 내키지 않았다.

그런 루다를 향해 레이가 괄괄하게 웃었다.

“야! 너 겁먹었어? 걱정 마. 독 안 탔다니까. 그냥 맹물이야, 맹물! 우리가 널 좀 잠깐 험하게 데려오긴 했는데, 확인할 게 있어서 데려온 거지. 죽이려고 데려온 건 아니야. 당장은 말야.”




“물론, 당장은 어쩌지를 못할 거야. 저녁이 되기 전에 돌려보겠지. 내일 학교에 가지 않으면 파키오에서 난리가 날 테니까. 문제는 그다음부터지. 죽여야 한다고 판명이 나면 계획을 시작할 테니까.”

무력하게 꼼짝없이 누워만 있으니 애가 탔다. 백구의 몸부림은 거대한 빙하에 납작하게 눌린 물결의 출렁임 정도로 미약하며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터져 나갈 물꼬를 터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해서 가위를 풀 때처럼 손가락 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온몸이 칼바람에 에이는 고통이 엄습했다. 차가운 땀이 땀샘을 뚫고 살갗을 흥건히 적셨다.

“컥-헉.”

미세하게 중지가 떨리면서 순식간에 마비가 사라졌다. 동시에 가래 낀 한숨이 토해졌다. 헉헉, 숨을 몰아쉬는 백구를 페르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다가갔다.

“영 쓸모가 없진 않군. 집념이 강하네. 십 분이나 단축시켰어. 이 약이 상당히 독한데 말이야.”

페르는 자신을 노려보는 백구가 마음에 들었다.

“말해, 루다 어딨어!”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칼을 흔들며 으르렁거리는 모습도 마음에 들었다. 겁도 없이 자신을 똑바로 직시하는 그 눈빛도, 몸을 푼 지 얼마 안 되어 세상이 빙그르르 돌 텐데도 멱살잡이하는 팔뚝도, 죽일 듯한 이 기세도, 마음에 들었다.

그때였다. 페르와 백구 사이의 팽팽한 기운을 뚫고 우람한 팔이 하나 쑥 들어왔다.

“쯧! 지금쯤 목이 막 타들어 갈 거 같은데. 좀 마셔! 근데 너 진짜 이름이 백구야? 딱히 물어뜯을 거 같지는 않은데? 안 그래, 페르?”

디오가 동조를 구하며 백구 입에 컵을 대었지만, 컵은 애석하게도 날아가고 말았다.

“아이씨! 이 아까운걸. 이게 그냥 물이 아닌데! 아, 아깝게 시리. 어쩔 거야! 하나밖에 없던 건데. 네 놈 몸 빨리 깨라고 준 건데!!!”

“병 주고 약 주냐?”

호들갑을 떠는 디오를 백구가 밀치고는 문을 향해 한 걸음 떼었지만, 곧 저도 모르게 바람 빠진 풍선처럼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러게. 그거 먹으라니까. 말을 안 들어 먹어. 안 그래, 페르? 야! 아까 페르가 한 말 못 들었어? 루다 잃어버린 걸 그렇게 동네방네 다 들으라고 떠들면, 파키오에서 온 동네를 이 잡듯이 헤집어 루다를 데려갈 거라고.”

“그만해. 디오.”

“뭘 그만해. 쟤가 돌아가는 판도 모르면서 나대잖아. 루다가 파키오에 가서 이 녀석이랑 결혼하면 파키오 사람이 된다는 거야. 그게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디오!!”

몸집에 비해 경망스러운 디오의 팔을 페르가 붙들었다. 더 이상의 말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확실한 표현이었기에, 디오는 구둣발로 괜히 바닥만 치며, 씩씩대며, 식탁으로 갔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냐면! 음. 너 신화 이야기 좋아해? 내가 살던 곳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야. 그런데 아직 맺지 못한 이야기야.”

루다의 대답은 상관없다는 듯 레이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시작했고, 쌍둥이는 하품을 길게 늘어뜨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옛날옛날에, 아주, 멀지는 않고 조금 옛날에, 아름답고 품성도 훌륭한 아가씨가 살았대. 은은한 보랏빛이 감도는 머릿결이 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대. 청초한 꽃송이 같았다고 하는데, 나 같은 선머슴은 그 모습이 상상도 안 돼. 이름은 위타.

그런데 위타는 보기보다 나이가 아주아주 많았어. 파키오 사람이 인공수정으로 잉태한 첫 세대 중 하나였는데, 정말 신화 이야기에 걸맞게, 위타의 시간은 정말이지 느리게, 달팽이보다 느리게 갔대. 어른이 되어서도 말이야. 거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늙지를 않았대.

집안에서는 그런 위타가 겁이 났어. 위타의 몸을 인공 몸으로 바꿀 수도 없었어. 그러려면 검사를 먼저 해야 했는데, 부모는 두려웠던 거지. 위타의 집안은 파키오에서 그리 힘이 센 축에 들지도 못했고, 위타도 그것 말고 다른 힘이 있거나 그러진 않았으니까. 오히려 연약했지.

그래서 위타는 메디움에서 신분을 바꿔가며 살기 시작했어. 파키오에서도 처음에는 몰랐대. 아주아주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 새턴이라는 여자가 말야. 아무튼 메디움에서의 삶은 그럭저럭 괜찮았대.”

말괄량이 같은 모습이 사라진 레이의 목소리는 어쩐지 쓸쓸했다. 루다는 숨을 죽이고 레이가 이야기를 계속 이어 주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으로 들을 수도 있는 이야기였다.




창틀에 기대어 선 페르가 말을 이었다.

“남자는 메디움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어.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제 갓 스물이 된 청년이었지. 어디서나 예의 바르고, 어미 잃은 아기 고양이까지 살뜰히 챙길 정도로 착한 남자였어. 유난히 어두운 밤이었다지. 일을 끝내고 집으로 들여가려는데 저 멀리서 잠옷 차림에 맨발로 뛰어오는 여자를 보았대. 여자는 숨이 가빠 보였고, 더 이상 걷지 못할 것처럼 보였지. 착한 남자는 그녀를 숨겨 줬어. 그리고 고리타분하게도, 둘은 사랑에 빠졌지.

사랑에 빠진 남녀의 가장 치명적인 허점이 뭔지 아나? 그건 바로 서로만 보인다는 거야. 무슨 일이 벌어질지 한 치 앞도 모르면서 어리석은 선택을 하곤 하지. 궁금한가?”        

  



“어떤 선택이냐고? 뻔하잖아. 불타오르는 사랑에는 항상 대가가 따라. 뭐, 난 그래서 적당히 사랑하며 가늘고 길게 살려고 하는데! 남자가 없네. 아, 자꾸 옆으로 새서 미안해.”

레이가 어느덧 가까이 다가와 앉은 루다를 바라봤다. 토씨 하나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레이는 다음 이야기가 망설여졌다. 레이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야기를 아주 조금 바꾸어서. 그 정도의 위로는 괜찮을 것 같았다.

“아기가 태어났어. 여자를 닮아 은보라빛 눈과 남자를 닮아 검은 머리 색을 가진 예쁜 여자아이였어. 까만 밤에 빛나는 별 같았대. 축복을 받으며, 빛 속에서 태어난 딸.”

루다는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항상, 너무나 궁금하던 이야기였다.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었던 이야기를, 낯선 이에게 들을 줄은 몰랐다.

“여자와 남자가, 그러니까, 아기를 사랑했어?”

“그럼 루다, 사랑했지.”          




“결코 단 하루도 사랑받지 못했지. 남자는 몰랐어. 위타가 파키오 사람인 건 알았지만 그렇게 오래 산 줄은 몰랐지. 아기가 태어난 날에야 위타가 고백한 거야. 비로소. 사건은 이제 복잡해졌지. 파키오 인공 자궁에서 태어난 여자의 몸에 파트리아 남자의 씨앗이 뿌려졌다는 것은, 더군다나 엄마처럼 아기도 늙지 않는다면! 파키오 사람이 정말 그토록 원하는 진짜 영생인 거지. 길이길이 살아남을 권력. 새턴이 바라는 신화의 결말이지. 아직 맺지 못한 결말.”

“그래서 루다가 필요한 거야? 겨우 마침표 하나 찍으려고?”

“똥개가 될 건가? 맹견이 될 건가?”

페르는 답은 안 하고 도리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내가 답해야 하나?”

기운이 돌아온 백구가 일어서며 피식 웃었다.

“그러는, 너는 뭘 할 건데?”

“머리가 나쁜가. 이해력이 딸리나. 싸움을 못 하면 머리라도 좋아야 지키지.”

페르가 백구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서서 한 음 한 음 끊어 말했다.

“죽, 여, 야, 할, 지, 도, 모른다고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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