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한 세계에서
“인헤니!”
“인헤니! 인헤니에로! 내 말 듣고 있어?”
“그럼. 당연히 듣고 있지.”
그렇지만 인헤니의 눈과 손은 비료를 뿌리고 흙을 고루 섞어주느라 바빴다. 익숙하고 빠른 손놀림으로, 하지만 매우 조심스럽게 뿌리고 섞는 일을 반복했다. 오늘 하루 종일 이러고 있을 모양새였다.
상쾌한 바람에 밀들이 나부끼며 저마다 속삭였다. 바람이 시작되는 곳에서 머무르는 곳까지, 줄기를 흔들며, 잎사귀를 맞대며, 은은한 속삭임을 퍼트리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조그만 비밀을 전해주며 까르르 웃는 것 같았다. 이제 막 성장을 마친, 익어가기 직전의 앳된 초록빛들은 그렇게 서로의 청춘을 축하하고 화답하고 있었다.
인헤니와 그를 따르는 이들은 마지막 성장을 돕는 데 열심이었다. 밀알의 배를 불릴 마지막 만찬. 올해도, 작년에도, 십 년 전에도, 백 년 전에도 밭에서 일하는 그를 새턴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묵묵히 때가 되면 밭을 갈고, 파종하고, 씨앗을 뿌리고, 물을 대어 키우고, 병들지 않게 돌봤다. 무엇보다 아낌없는 사랑을 한결같이 주었다. 파키오에 도착한 날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어디 밀뿐이랴. 곳곳에 밭을 마련해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작물은 죄다 키웠다. 돌아다니면서 돌보고 재배법을 가르쳤다. 아주 고된 취미생활이었다.
“인헤니! 지금! 이 망할 놈의 밭을 보고 있을 때가 아니라구! 도대체 이걸 왜 하는 거야? 그것도 손으로. 기계로 하면 되잖아!”
인헤니는 그제야 허리를 펴고 서서 새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바람에 흩날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리자 신경질적으로 잡아떼고 있었다. 머리도 묶지 않고 화장도 대충 하고 온 걸 보니 급하긴 한 모양이었다. 얼굴은 달라졌지만 어쩐지 그 옛날 연애할 때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때의 자신이 아닌 것처럼, 그때의 새턴은 없지만, 여전히 둘은 헤어지지 않았다.
“새턴, 내가 기계잖아. 얼마나 빨리 되는지 몰라. 허리는 또 어떻고. 온종일 구부리고 해도 아프지 않아.”
“또 그 말이야? 지겹지도 않아? 시대가 변했어. 우린 발전을 한 거라구! 원시 인류와 사피엔스가 다른 것처럼! 우린 신인류야. 그러니 당신 손에 흙 따위는 묻히지 않아도 된다고! ”
“그래, 신인류지. 그래서 흙을 느낄 수 없어. 땅의 냄새를 맡을 수도 없지. 당신이 아무리 주장해도 우리가 느끼는 감각은 예전과 달라. 파키오에 처음 올 때는 그 감각을 기억이라도 했는데, 이제는 잊었어.”
“알았어! 알았다고. 싫다는 당신 끌고 왔으니 알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같이 페르를 찾아줘. 우리 애가 위험해.”
그때처럼, 새턴은, 간절히 말했다. 인헤니는 그때처럼, 울먹이며 호소하는 새턴을 바라보았다.
“새턴. 나는 지금 못 가. 마지막 거름이야. 아주 중요한 일이야.”
“우리 아들보다도?”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지. 나는 그걸 할 뿐이야.”
“말도 안 돼! 이걸 누가 먹는다고!”
“인간이 먹지. 그리고 언젠가는 파트리아에서 그들이 키울 거야. 그러니 계속할 수밖에.”
“그걸 믿는 건 아니지?”
“그렇게 되게 해야지.”
새턴은 할 말을 잃었다. 둘 사이를 바람이 가르고 지나는 소리만 들릴 따름이었다.
분노로 일그러진 새턴의 표정이 펴지지 않았다. 안아주고 싶었지만, 달래 주고 싶었지만,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되었다. 인헤니가 먼저 침묵을 깼다.
“새턴. 페르디다의 삶이잖아. 선택할 권리가 있어. 당신이 여기를 선택한 것처럼.”
“당신도 결국엔 선택했잖아.”
“당신과 영원히 함께하기로 맹세했으니까.”
인헤니가 부드럽게 웃었다.
미소 짓는 인헤니를 뒤로하고 새턴이 돌아선다.
바람이 분다. 붉은 머리칼이 헝클어진다.
어느새 그녀는 들판 사이로 난 길에 가 있다.
바람이 분다. 펄럭이는 치마가 작아진다,
어느새 그녀는 구름처럼 떠내려간다.
세차게 분다. 붉은 머리칼이 점이 되고 만다.
어느새 하늘과 구름과 길과 바람만 남았다.
‘우리에게 눈물이 없어서 다행이야, 새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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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헤니, 이것 봐. 우리 여기 가자. 오늘, 의사 만나고 왔어. 당신이 살 방법을 알아 왔어. 정말이야. 이 빌어먹을 암 덩어리 떼어 낼 수 있댔어.”
눈물에 젖고 젖은 새턴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