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한 세계에서
“아니, 그러니까. 말을 하라니까? 내가 이래 봬도 찾는 데 도사야. 여기 와서 구경도 못 해 보고 주말마다 도서관만 다니고 있잖아. 네가 찾는 사람이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아닌 거 같은데. 그런 사람은 검색으로 찾을 수 없다니까? 알음알음으로 찾는 거지. 내가 친구는 없지만 발은 넓어. 이 사교성으로 금방 찾아줄게! 그러니까 오늘은 제발 구경 좀 가자. 응?”
집을 나서는 루다의 팔을 잡아끌며 백구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작정하고 사람 꼬실 때 짓는 미소를 백분 활용했다.
“여기서 두 블록 가면 광장이랑 분수대가 있대. 진귀한 물건 파는 곳도 많고! 영상으로 주문하는 거랑은 또 다른 재미가 쏠쏠하다는데, 다른 애들은 다 가봤다는데, 우리도 가 보자. 응? 내가 진짜 찾아줄게!”
백구의 말은 믿음이 갔다. 백구라면, 어쩌면 반나절 만에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모든 사람이 알게 된다는 것. 삽시간에 소문이 퍼질지도 몰랐다.
“내가 찾는 건 사람이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 사람을 찾으려면 책부터 찾아야 하거든. 미안해.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어. 오늘은 나 혼자 갈게.”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아냐, 나 혼자 갈 수 있어. 이제 길도 잘 찾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따 저녁에 보자!”
루다는 붙잡을 새도 없이 재빠르게 도서관 쪽으로 뛰어갔다. 그때, 붙잡아야 했다.
헤어지지 말아야 했다.
‘없어!’
‘아무 데도 없어!’
돌아오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아무리 벨을 눌러도 열리지 않았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저녁을 차리다 전해줄 게 있어서 전화했다. 받지 않았다. 몇 번을 걸어도 홀로그램이 켜지지 않았다. 쾅쾅 문을 두드렸다. 뱃속부터 힘을 끌어모아 소리쳤다. 하지만 끝내 문은 열리지 않았다.
“루다!!!!!!!!!!!”
계단을 달리며 소리쳤다.
“루다!!!!!!!!!!!”
지름길을 내달리며 불렀다. 목에 핏발이 서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루다!!!!!!!!!!!!!!!!!!!!!”
불 꺼진 도서관 앞에서 사방을 향해 돌아가며 절박하게 외쳤다. 괜히 지금길로 왔다고, 번화가 쪽을 향해 다시 뛰었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뒤통수에 벼락같은 통증이 내려앉았다.
“아, 정말 시끄럽네! 새끼!”
라일락 향이 백구를 깨웠다. 실눈을 떠봤지만 이내 다시 감겼다. 악몽이었나 보다. 창틀에는 메디움에 온 다음 날 루다가 사 온 앙증맞은 꽃잎이 따사로운 햇살을 흠뻑 머금고 있었다. 중고 시장에서 함께 고른 편백 나무 소파 베드에 누워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긴장이 풀렸다. 어젯밤에 살풋 여기서 잠들었나 보다고 백구는 생각했다. 수프 냄새에 배가 꼬르륵거렸다. 아침이었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나른해서 다시 잠에 빠질 것 같았다.
“이제 일어났나 봐.”
“그렇군.”
낯선 목소리에 정신이 화들짝 깼다. 분명 루다의 집인데 사내 둘의 목소리만 들렸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가위에 눌렸을 때처럼 손가락도 까딱할 수 없었다. 전신이 마비된 것 같았다. 백구는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식탁에 있는 남자는 책을 보며 수프를 먹고 있었다. 좀 더 체격이 있는 남자는 양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깍지를 끼고 앉은 모습으로 미동도 하지 않고 백구를 감시하고 있었다. 백구는 루다를 불렀지만, 성대까지 결박당한 것처럼 느껴졌다.
“30분쯤 지나면 말할 수 있을 거야. 조금 더 지나면 몸도 움직일 수 있을 거고. 좀 시끄럽게 떠들어야지.”
깍지 낀 남자가 말했다.
“루다를 잃어버린 게 소문나면 골치 아파져. 파키오에 사는 마녀가 출동할 거거든. 그래서 좀 재웠어.”
여유롭게 식사하던 남자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이어 말했다.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냉랭한 기운이 풍기는 남자였다.
“토요일에 함께 일하는 레이. 커트 머리에 쾌활한 애. 말이 많은 거야 천성이라 치는데, 상대가 누군지는 알고 말해야지. 아니면… 네가 배후인가?”
고개를 든 남자의 날렵한 눈매에는 인정이라곤 조금도 없어 보였다.
“깼네? 자자, 이제 정신이 좀 들지? 아, 지금 좀 묶어놔서 불편할 거야.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얌전하게 말 잘 듣는다면 이따 풀어줄게!”
커트 머리가 잘 어울리는 명랑한 여자였다. 구불구불한 다갈색 펌머리에 까만 눈동자 때문인지, 분주하게 움직여서인지, 꼭 갈색 푸들이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나는 레이야. 이건 보다시피 주사기고. 좀 고전적인 거긴 하지만 깨끗한 거니, 안심해. 별거 아니야. 그냥 네 피만 살짝 뽑을 거야. 약간 따끔합니다. 손님!”
정말 그랬다. 긴 바늘을 보았을 때는 긴장되었는데 막상 찔리니 아프지는 않았다. 다만 주사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빨간 액체를 보는 것은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루다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생각보다 강단 있네? 별로 놀라지도 않고. 너 좀 재수 없다. 이러면 재미없는데! 자! 다 되었어. 간단하지? 이게 삼백 년 된 거 치곤 쓸 만해!”
레이의 말에 루다가 영문 모를 곳에 잡혀 온 것보다 더 놀란 것 같았다.
“아.... 아니 아니! 옛날 사람들이 쓰던 거를 만들어냈다는 거지. 설마 이게 삼백 년 된 고물이겠어. 걱정하지 마! 막 오염되고 막 더럽고 그런 거 아니라니깐. 세균 같은 거 없어!”
길어지는 레이의 설명에 루다의 미간은 더 찌푸려졌다. 루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니 지하에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파트리아에 다시 간 걸까, 생각했지만 다시 살펴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숨쉬기 곤란할 정도로 퀴퀴한 냄새에 군데군데 검은곰팡이가 벽을 타고 올라간 게 보였기 때문이다. 파트리아 집은 땅속에 있지만 우범지대 빼고는 청결하게 관리되었기에 항상 산뜻했다.
나무로 된 문이 두 개 보였다. 하나는 화장실로 가는 문 같았고 하나는 밖으로 올라갈 수 있는 문 같았다. 문 옆에 있는 긴 의자에는 남자 둘이 앉아서 똑같이 생긴 얼굴을 마주 보고 투닥거리고 있었다. 루다가 쳐다보자 이름을 대며 고개를 까닥였다.
“난 정우.”
“난 진우.”
“둘이 쌍둥이야. 맨날 싸우니까 쟤네는 뭐 신경 안 써도 돼. 저기 얼굴에 상처 크게 난 애가 정우야. 그보다 여기 왜 왔는지 궁금하지?”
“죽이고 싶어서랄까?”
책을 덮고 일어서는 남자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날렵한 눈매만큼이나 길쭉하고 늘씬한 남자였다. 푸른빛이 감도는 은색 머리칼이 깎아지른 설산에서 빛을 받아 반짝이는 눈처럼 차갑게 빛났다.
남자는 천천히 창틀 쪽으로 걸어가더니 라일락 꽃잎을 한 손으로 쓱 쓰다듬었다. 꽃을 탐미하듯 바라보다가 가만히 화분을 들어 향을 맡았다. 지난 며칠간 꽃 주인이 지나갈 때마다 남긴 체향이었다. 흔들리는 꽃잎들을 손으로 감싸 안고 입을 맞췄다. 그러자 그의 손길이 닿은 곳마다 얼음꽃으로 변했다. 백구는 실제인지 환각인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 번진 미소가 오싹한 것은 사실이었다.
“어쩌면 죽여야 해서일지도.”
남자가 읊조렸다.
백구의 낯빛이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