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떠나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2/2)

by 연필수집가

<세상에서 가장 값진 유산>
마지막 여행지 파리에 도착한 첫날밤, 남편이 밖에서 잠깐 따로 보자고 말했다. 사랑의 도시 파리에서 둘이 데이트하는 것 같아서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마트에 들러 시원한 맥주와 좋아하는 딸기를 샀고, 바로 눈앞에 에펠탑이 보이는 공원 한 편에 자리 잡고 앉았다.


기분이 좋았던 나는 신이 나서 계속 뭔가를 조잘조잘 떠들었지만 남편은 아무 말 없이 맥주만 홀짝였다. 뭔가 이상했다.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와서 신랑의 눈치를 슬슬 살피기 시작할 무렵, 이윽고 남편이 입을 뗐다. 그리고는 아주 차가운 목소리로 “내일부터는 혼자 다닐게요”라고 말했다. 남편의 성격을 아는 나는 이건 절대 되돌릴 수 없는 결정임을 직감했다.


낮에 식당에서 밥을 잘 먹는 남편을 보면서 엄마가 웃으며 농담을 했었다. 그 당시 남편은 귀국한 후 한국에서 아직 자리를 못 잡은 상황이었다. 지방에 사는 엄마에게는 별 뜻 없는 농담 한 마디였겠지만 표현이 너무 직설적이었던 터라 서울 토박이인 남편의 자존심을 심하게 건드린 모양이었다. 내일 일정은 어떻게 할지, 마지막 날에 잡아둔 고급 레스토랑은 예약은 취소해야 하는지, 이제 여행이 며칠 안 남았는데 왜 하필 지금… 계획된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아서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남편은 낮에 느낀 설움과 생각들을 속사포처럼 쏟아내며 그야말로 포효했다. 평소에는 아주 젠틀하고 속 깊은 남편이지만 이렇게 한 번씩 폭발하면 답이 없다. 원래 학구적이고 생각도 깊은 타입인데, 밥 먹은 후로 몇 시간 동안 이것만 생각했다면 그걸 풀어내기에는 이박 삼일도 모자랄 것이다. 냉철한 이성을 바탕으로 탄탄하게 쌓은 논리적 이유들은 너무나도 맞는 말이어서 한마디 반박할 수도 없었다.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두 시간이 흘렀다. 정말 귀에서 피가 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에펠탑에 불빛이 들어왔고 주변의 커플, 연인들이 예쁘다며 함성을 질렀다. 하지만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울분을 토해냈다. 사랑을 속삭이는 낭만이 가득한 파리의 밤이 내게는 지옥의 밤처럼 느껴졌다.


다음 날 아침, 과음한 남편을 두고 엄마에게 아침을 사러 가자고 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엄마는 베이커리 맛집에 들러 신나게 이것저것 골라 담았다. 숙소로 돌아오며 엄마에게 '장난스레 던진 돌에 개구리는 죽을 수도 있다'는 비유를 써가며 남편이 느꼈을 문화적 차이와 다름에 대해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엄마는 약간 놀란 듯했고 아무런 말도 없이 계속 걷기만 했다. 하지만 숙소에 도착해서는 곧장 남편에게 다가가 늘 그랬던 것처럼 애교 섞인 목소리로 “빵이 맛있어 보여서 울사위 생각나서 사 왔으니 먹어봐~”라며 아무렇지 않은 듯 남편을 깨웠다.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 안에서 우리 셋은 빵을 씹었다. 잠깐 생각할 시간을 달라던 남편은 다행히 함께 움직인다고 했다. 고마운 마음도 들었지만 남편이 언제 다시 터질지 몰라서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노트르담 성당에 들러 차분하게 미사를 본 뒤, 근처 한 중식당에서 불편하게 식사를 마쳤다. 계산하고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두 사람이 자리에 없었다. 깜짝 놀라 나가보니 식당 앞 골목 끝에서 두 사람이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은 연신 눈가를 훔쳐내는 듯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엄마가 남편에게 사과했다고 한다. 남편은 사십 년 넘게 살면서 더 나이 많은 어른에게 사과를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의 사과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또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남편의 마음속에 단단히 엉킨 응어리는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을 담은 ‘어른의 사과’를 받은 순간 단번에 사르르 다 풀어졌다고 했다.


여행의 마지막 날 밤,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며 우리들의 여행을 되돌아보았다. 맥도날드에서 주문한 햄버거 기다리다 베네치아행 기차를 놓칠 뻔했던 일, 독일의 한 공원에서 남편이 용기를 내어 속옷만 입고 수영했던 일, 내 졸업식에서 학사모를 쓴 엄마가 나보다 더 기뻐했던 일… 우리의 이야기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힘들었던 순간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순간도, 감정이 복받쳐 오르던 때도 있었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배려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모두 다 마음이 뭉클했다. 무엇보다도 남편은 엄마와 포옹했던 그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올해로 셋이 유럽 여행을 다녀온 지 10년이 지났다. 엄마는 여행 이후로 이야기할 때 조금 조심하게 되었고, 덕분에 남편과는 몇 시간이고 편하게 수다 떨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우리 엄마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할 줄 아는 '멋진 어른'임을 알게 되었고 그 멋진 사람이 내 엄마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결국 여행을 다녀오면 남겨지는 것은 내가 몇 개국을 갔었는지, 유명한 관광지에서 사진은 찍었는지, 얼마나 맛있는 것을 먹었는지가 아닌 것 같다. 우리의 기억과 마음속에 각인되어,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깨달음의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값진 유산'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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