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버릴 것

by 연필수집가

나는 철저한 계획형 인간이다. 보통 여행을 가면 시간, 비용, 에너지를 아낄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루트를 짜서 정해진 그대로 움직인다. 하지만 지난 여름에 갔던 제주에서는 항공과 렌터카만 예약하고 동선은 그때그때 정하는 방법으로 여행해 보기로 했다. 출발 하루 전, 다음날부터 제주에서 장마가 시작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주의 파란 하늘과 에메랄드빛 바다를 기대하며 조금은 들떠 있던 마음에 파사삭- 금이 갔다. 여행 일정은 수정하지 않기로 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 떠나자.


제주 공항 활주로에 착륙하자 관제탑과 교신 지연으로 평소보다 10분 연착했다며 양해를 구하는 안내 방송이 거듭 흘러나왔다. 궂은 날씨에 무사히 도착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했다. 게이트를 나서니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빠르게 걸어 렌터카 셔틀 승강장에 도착, 거의 만석이었던 버스에 가까스로 몸을 실었다. 이 차를 놓치면 20~30분을 더 기다려야 하는데, 운이 좋았다.


렌터카 사무실에 도착했는데 남편이 운전면허증을 안 가져왔다고 한다. 전날 분명히 ‘꼭 챙겨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는데. 역적 죄인을 앞에 두고 순간 열이 뻗쳤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이제는 이런 사소한 일로 감정이 상해서 여행을 망쳐버리는 어리석은 행동을 할 나이도 지났다. 다행히 직원의 안내로 <정부 24> 웹사이트에서 운전면허 경력증명서를 발급해서 해결했다. 3박 4일 동안 나만 계속 운전할 뻔했는데…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앞으로의 여행이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늘 계획된 여행을 하던 나에게 다음 일정이 없다는 것은 불안할 수밖에 없는 요소였다. 한정되어 있는 일정 안에서 불필요하게 시간을 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 한 번밖에 먹을 수 없는 끼니에 실패하고 싶지 않다는 욕심, 다음에 또 언제 올지 모르는 불확실함 속에서 다 해보아야 한다는 강박… 하지만 이번 무계획 여행에서 느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계획 없음’이 나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었다는 것이다.


여행 첫날 들린 삼양 해변은 모래색이 좀 달랐다. 어두운 잿빛의 흑색을 띠고 있었는데 현무암의 오랜 풍화작용으로 인해 생긴 해변이라고 했다. 검은 모래밭이라니. 비에 젖어 더 거무스름한 모래를 바라보고 있으니 직접 밟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비에 옷이 젖으면? 렌터카 바닥 시트에 모래가 묻으면 청소는? 비 맞고 감기에 걸리면...?’ 뒤따라오는 많은 생각들을 뒤로한 채 근처 편의점에서 우비를 구입했다.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해변을 걸었다. 작은 모래 알갱이들이 계속해서 발에 들러붙었다가도 이내 파도에 그리고 빗줄기에 씻겨나갔다. 비가 세차게 내리는데도 우산 없이, 또 맨 발로 해변을 걷고 있다는 사실에 뭔지 모를 해방감이 느껴졌다.


어떤 하루는 느지막이 일어나 서쪽 해안도로를 타고 <금능해수욕장>에 갔다. 후면 주차를 하고 트렁크를 열었다. 비양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최고의 뷰 맛집이었다. 트렁크에 걸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먹었다. 그리고선 뒷좌석에 누워 선루프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낮잠을 잤다. 비 내리는 바다 뷰, 고소한 기름 냄새, 새콤달콤했던 케첩의 맛, 꿀잠 타임, 함께 나눴던 소소한 이야기가 아직도 눈, 코, 귀에 선명하다.


어느 날 밤에는 숙소 근처에 있는 하얏트 호텔 <라운지 38> 바에 들렀다. 멋진 공간에서 분위기 있게 칵테일을 마시고 귀가하려는데 갑자기 비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우리의 숙소는 차로는 1분, 걸어서는 7분. 하지만 10분이 넘도록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 마냥 기다릴 수는 없어서 남편과 걸어가기로 했다. 가로수 아래를 지날 때는 잠깐 비를 피할 수 있었고,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온전히 비를 맞았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비에 옷이 젖었지만 조금도 찝찝하거나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자정이 지난 늦은 시간, 행인이 없는 제주 시내 한복판을 남편과 단둘이 걷고 있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어서일까. 세상에 우리 둘만 존재하는 것 같은 낭만적인 밤이었다.


또 어느 날은 함덕 해변 근처에서 이른 점심으로 해장국을 먹었다.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국물을 한 숟갈 입에 넣자마자 단번에 느낌이 왔다. ‘아…. 이건 소주 각이다. 더도 말고 이 따끈한 국물에 딱 세 잔만 먹으면 소원이 없겠다’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우리 소주 한 잔 마실까요?”
“.... 차는 어떻게 하고요?”
“몰라요? 다음 일정도 없는데…. 뭐 어떻게든 되겠죠?”


그날 우리는 한라산 소주 한 병을 나눠마셨고 덕분에 함덕 지박령이 되었다. 떠날 수 없기에 제주 올레길 코스도 걷고, 차박 최적의 장소인 서우봉해변을 발견했으며, 망우봉 오름 정상에 오르며 야생 노루도 볼 수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들린 함덕 해변에서는 <세계 라틴댄스 페스티벌> 리허설을 보며 댄서들과 함께 흥겨운 음악에 맞춰 몸도 흔들었다. 신발을 벗고 조금은 차가운 바다에 발을 담갔고, 썰물에 드러난 다양한 모양의 해조류도 수집했다. 그 어느 것 하나 미리 정해둔 것 없었지만 발길 닿는 대로, 보이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 새로운 길이 펼쳐져 있었다.


그동안 나는 여행을 배우는 것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배움의 과정조차도 효율적으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이번 제주 여행에서는 계획이 없었기에 할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을 했다. 정해진 것이 없었기에 내 마음 가는 곳에 더 머물렀고, 길다가 우연히 발견한 현지인 맛집에도 들어갔고, 아침에 침대에 누워 늦장 부리는 남편까지도 포용하면서 편안하게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해야만 하는 일이 없었기에 평소라면 내가 하지 않았을 일들, 어쩌면 조금은 무모한 일들을 용기 내어 하면서 그야말로 온전히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익숙한 방식들을 내려놓아야만 새로운 것들이 내게 올 수 있음을 확인한다. 역시 해보지 않고는 모를 일이다. ‘날마다 버릴 것’이라는 <법정 스님>의 말처럼 내 안에 고정된 생각을 매일 열심히 버려야겠다. 비어 있는 내 안에 찾아와 채워질 ‘다른 것’들을 미리 두 팔 벌려 열렬히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