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작품 정보 중 몇 개를 추가해야 하는 업무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전시 관련 영문 번역은 주로 예술 계통에서 활동하는 전문 번역가에게 맡기는데, 이번에는 인물 소개이기도 하고 일정이 빠듯하기도 해서 유학파 직원에게 일차적으로 업무를 맡겼다. 상사에게 진행 상황을 보고했더니 "챗 GPT 돌리면 되지, 요즘 걔네가 더 똑똑해, 아니면 제미나이 돌리던가. 물론 사람이 확인은 해야겠지만"이라고 한다. 마음속에서 뭔가 꿈틀했다. 그렇지만 이내 그리하겠다고 대답했다.
챗 GPT에 국문으로 내용을 입력하고 전시, 도록, 홈페이지 등 게재 용도에 맞춰 영문으로 번역해 달라고 하면 순식간에 작업이 끝나는 세상이다. 시간과 에너지를 아낄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길을 두고 나는 왜, 기계가 아닌 사람에게 번역을 맡기고 싶었을까. 정보제공 정도의 번역은 AI도 충분한데, 왜 챗 GPT는 생각하지도 못했나? 늘 해왔던 방식이 익숙해서 대안을 찾을 때도 그와 유사한 방법으로만 접근했나? 기계가 하는 번역을 미술관에서 쓰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나? 딱히 결론이 나지 않은 생각은 바쁜 업무에 치여 마음 한 구석으로 밀려났고,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해가 지고 또 해가 떴다.
출근길에 운전석에 앉은 남편에게 '내가 너무 타성에 젖어 있는 것 같다'고 말하니 아주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본다. "저는 사람에게 번역을 맡기겠다고 대답한 당신의 모습이 의외네요. 비효율적이니까요. 늘 지름길을 찾고, 빠른 방법을 찾는 사람이니까, 효율적인 것을 추구하는 당신의 직장 상사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일을 하는 당신은 달랐나 봐요. 교육을 하는 당신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 오리지날리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었나 보네요." 이거였구나. 내 마음속에서 꿈틀 했던 이유가.
요즘 IT 업계에서는 '웬만한 신입 한 명을 채용하는 것보다 인공지능(AI)이 낫다'는 평가가 자주 들려온다. '다양한 AI 서비스 구독으로 한 달에 50만 원 가까이 지출하는데 그 결과물이 광고주 미팅하는데 손색이 없어서 하나도 아깝지 않다'는 광고회사 카피라이터의 인터뷰를 본 적도 있다. 내가 생각해도 AI는 만능이다. 몇 초만에 적절한 정보의 검색, 방대한 자료의 핵심 정리, 음악, 그림, 글쓰기 등 창의적인 작업까지 못하는 게 없다. 그에 비해 인간은 얼마나 불완전한가.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는 실수투성이에 누군가의 한마디에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감정적인 데다 경험치가 없으면 일을 시켜도 감감무소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금은 비효율적이더라도 나는, 기계보다 사람을 더 가까이하고 싶다.
요즘 독서모임을 하면서 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시선을 인식하게 될 때가 많다. 같은 책을 읽었는데도 기억에 남는 문장이 다르고, 소설 속 인물과 사건에 대한 해석도,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는 정도도 다르다. 내가 일하는 미술관에서도 마찬가지다. 같은 전시를 봐도 인상 깊은 작품은 제각각이고, 하나의 그림을 보고 해석해도 똑같은 감상평은 없으며, 동일한 설치 작품을 보고 누군가는 크기가 크다고 또 누군가는 작다고 이야기한다. 모두 다르지만 어느 것 하나 틀리지는 않은 답들. 같은 값(프롬프트)을 넣은 AI는 이처럼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온몸으로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며 경험치를 쌓고, 변화와 성장을 통해 한 발자국씩 나아가고, 결국 자신만의 목소리를 갖게 되는 '사람'은 그 자체로 특별하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람'이 만들어낸 작품들을 애정한다. '같은 것도 다르게 볼 수 있는 것'을 목표로 두고 예술교육을 하는 사람으로서, AI 없이는 못 산다고 말하는 시대가 오더라도, 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함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만은 변치 않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