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닐(Vinyl)'은 나에겐 여전히 레코드판~
포틀랜드에 5년 전쯤 가족여행을 갔다. 아내는 새로운 느낌의 호텔로 가고 싶다며 독특한 호텔을 잡았다. 뜻밖에도 호텔방에는 빈티지 턴테이블이 놓여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장식이려니 했지만 다른 한편 구석에 레코드판도 꽂혀 있어서 장식품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카펜터스, 라이오넬 리치, 프랭크 시나트라 등 올드 뮤지션들의 음반이 놓여있었다. 호텔 방안에 레코드판들이 즐비하게 있는 것이 신선하기도 하고 쌀쌀한 날씨와 분위기도 맞을 듯하여 레코드 하나를 꺼내 들어 틀어보았다. 라이오넬 리치의 음반이었다. 나는 그의 노래 몇 곡 정도는 알고 있어서 아는 노래가 나오려니 하고 기다렸다. 그 음반은 유명한 곡이 있는 음반이 아니었다. 아는 곡 하나 없는 음반 전체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레코드판 퀄리티 자체가 오래된 것이라 음질 자체가 썩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음반 하나를 다 듣는 동안 퀄리티가 좋지도, 아는 노래가 흘러나와 흥얼거린 것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듣는 내내 마음이 편안하면서 듣는 것도 아닌 것도 아닌 상태에서 그 음악과 함께한 짧은 시간이 희한하게도 편안하고 느긋하니 아주 기분이 좋았다.
갑자기 딸아이와 함께 즉흥적으로 레코드판을 사러 가자고 의견 일치를 보았다. 게다가 호텔 바로 앞에 규모가 꽤 큰 중고 레코드판 가계가 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길을 가르며 까르르 웃으며 무엇을 고를까 하는 들뜬 마음에 잰걸음으로 갔다. 일정에도 없었던 레코트판 구입이 시작됐다.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우린 서로가 원하는 음반을 기분 좋게 구입하여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넷 킹 콜, 비틀스, 엘튼 존, 케니지 등등 많은 음반을 뒤적거리며 무엇을 들을까 고민을 했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일까? 고른 모든 음반에는 내가 아는 곡이 몇 곡 없었다. 뮤지션 위주로 고르는 것에 흥분을 한 나머지 아는 곡이 있는지 체크를 안 했다. 하지만 어떠랴, 원하는 곡이야 전화기를 통해서 수초 이내에 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이 순간 원하는 곡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 순간을 즐기고 싶은 것이다. 레코드판의 디자인, 가사가 담긴 누렇게 뜬 속지, 얼마나 스크레치가 있는가 이리저리 둘러보는 이 모든 행동이 즐거운 것이다. 또한 모름에서 오는 신선함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불편함에서 오는.. 그러니까 손끝으로 만지면서 눈으로는 오래된 디자인의 겉표지를 들여다보고 하는 그런 움직임, 굳이 다음 곡으로 넘기지 않아도 된다. 느림을 배운다.
느림은 여유로움을 여유로움은 마음을 느긋하게 한다. 그래서인가? 우리가 구입한 모든 음반을 거의 다 들어보았다. 딸아이나 내가 구입한 모든 음반에 아는 곡이 기껏 해봐야 2~3곡 정도밖에 없었지만 우리는 그 음반을 모두 듣는 내내 너무 행복하고 즐거워했다. 만약 아는 곡이 많이 나왔으면 아마도 신선함이 떨어졌을 것이고 우리의 대화는 그다지 재미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이지 음반을 듣는 내내 우리는 음악이야기를 편안한 상태에서 느긋하게 할 수 있었다.
시간을 아끼는 상태에서 원하는 것만 빠르게 습득하고 취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 한다면 나의 이러한 생각들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
나는 포틀랜드 호텔방에서 음악만을 들은 것이 아니다. 나는 대화를 나누었고, 추억을 떠올렸고, 시간이 멈춘듯한 여유를 즐겼고, 모르는 음악을 듣는 신선함을 느꼈고, 60년대 혹은 90년대로 들어가 시간여행도 했다. 가장 좋았던 것은 이 레코드 판을 둘러싸고 우리 세 가족이 오손도손 오롯이 우리만의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거면 된 거다. 이게 행복이다. 나는 음악만 듣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나누고 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