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웠던 추억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다큐멘터리 <노란 문: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를 보았다. 봉준호 감독의 초기 영화활동과 동아리 활동을 같이했던 지인들의 이야기를 다룬내용이었다. 그 영화를 보는데 정확히는 기억 안 나는데 같은 멤버였던 최종태 감독인 걸로 기억한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1막이 끝나야 2막이 시작되는 거잖아요. (그 시절 노란 문은) 우리 인생의 1막이었던 것 같아요. 그걸 잘 끝냈기 때문에 다음으로 갈 수 있었던 거죠."
각자 갈길을 찾아가며 동아리 노란 문의 활동이 희미해지는 것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그런데 저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수도꼭지 튼 거처럼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대학시절이 오버랩되면서 그 당시의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나 자신이 생각이 났다. 노란 문 멤버들의 열정과 활동은 내가 대학 1년 때의 모습과 너무나도 유사해서 보는 내내 오버랩되고 기억이 났다.
대학교 1학년, 나는 꿈도 많고 열정도 크고 추진력도 대단한 새내기였다. 나는 학력고사 세대인데 그때만 해도 미술이 정규교과과정 중에 하나였고 시험도 보았다(예체능 계열). 뻔한 이야기겠지만 과목 중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바로 미술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만큼이나 미술이론은 너무나 재미있었고 미술사를 가장 좋아했던 것 같다. 고전주의, 낭만주의부터 포스트 모더니즘까지 그 오랜 세월 동안 빌드업된 각 시대의 미술사조들 또한 그것들이 탄생된 배경은 항상 흥미로웠다. 어렸기에 가능했던 꿈. 나는 왜 미술사의 모든 사조들이 외국에서만 탄생되었는가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다. 왜 아시아 아니 한국에서는 사조(ism)가 탄생할 수 없는가?
그래서인가? 나는 초현실주의 그룹을 상당히 좋아한다. 후대에 시간이 흐른 뒤 명명된 것이 아닌 그들은 그들 스스로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발표를 하며 활동을 시작했다는 점은 정말 멋지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언젠가 한국인 작가로서 한국최초로 사조를 만들어내리라 다짐했다. 그것이 대학교 1학년때 일이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모임결성이 어떻게 됐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문예창작과 친한 동생과 의기투합을 하였다. 너는 앙드레 브루통(André Breton) 이 되어라 나는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가 되겠다며 끓어오르는 피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피아노, 첼로, 국악, 성악, 서양화, 판화, 문예창작과 1학년 생으로만 모인 모임을 만들게 되었다. 나는 그룹의 리더가 되어 그들에게 나의 의지와 그룹의 성격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품평회를 가졌다. 음악전공 하는 애들은 악기를 연주했고 미술 하는 친구들은 그림을 문학하는 동생들은 시나 본인작품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술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모임의 이름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형, 우리 이름을 지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모임의 성격은 폐쇄적인 아닌 누구에게나 오픈이 된 즉, 예술은 예술가들의 소장품이 아닌 모든 사람들과 소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익히 강조를 했었다. 우리 그룹 역시 마찬가지, 우리끼리 하는 것이 아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그룹이 되어야 한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오빠, 아무나 올 수 있으면 다 오면 되겠네. 다와! "
"다와? 다 오라고?"
"오.. 좋은데 다와? 다와이즘!! 다다이즘과도 명칭도 비슷한 것이 좋은데??"
"우와!! 다와이즘 좋다!!"
그렇게 우리 그룹은 '다와'가 되었다. 문창과 동생왈 다는 아래한글 표기로 해서 이렇게 표기하는 건 어때?
문학적으로나 디자인적으로 그리고 글씨자체에서 리듬이 보이는듯한 느낌에 우리 그룹과 너무나 찰떡궁합이름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더더욱 박차를 가해 서로의 위치에서 열심히 활동을 하였다. 같이 술 한잔 걸치며 밤새 예술토론을 하기도 했고, 여름엔 다 같이 모여서 단합 MT를 가기도 했다. 밤새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며 시를 읊고 퍼포먼스를 해대며 여름밤을 지새웠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겨울이 되었다. 난 우리 1학년 마지막을 그냥 보낼 수 없다고 사람들을 초대해서 퍼포먼스를 하자고 제안했다. 다들 너무 좋아하고 흥분했다. 백남준과 오노요코가 활동했던 플럭서스(Fluxus) 그룹에 대해 멤버들에게 설명하고 그들은 우리와 같은 성격의 그룹이고 대선배, 대선생님들이고 이미 이러한 예술활동은 오래전에 시작되었다고 설명을 해주었다. 그래서 강당에서 사람들 앞에서 즉흥연주와 퍼포먼스 그리고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시상을 그대로 읊기로 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우리는 각과의 선배들, 교수님들에게 우리의 의견을 내비치고 이러한 공연을 하겠노라고 말했다. 강당도 꼼꼼히 살피고 음향장비도 체크하고 의자들도 세팅하고 미리준비한 팸플릿도 의자마다 가지런히 놓았다. 퍼포먼스의 모습은 이러했다. 강당에 미리 커다란 하얀 천을 펼쳐놓아 관객에선 마치 큰 도화지가 공중에 떠있는 듯한 모습이 연출되고 음악전공 친구들은 강당아래 하지만 눈에는 크게 뜨지 않게 자리를 잡았고 문창과 친구들은 마이크를 쥔 채 관객들 뒤쪽에 배치를 하였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모습은 육안으로 쉽게 찾지 못하는 그러한 배치였다. 눈과 귀로서 예술을 체험하게 하려는 나의 아니 우리의 의도였다. 나는 천 뒤에서 미술전공 친구들과 미리 준비한 페인트와 물감 붓등을 꼼꼼하게 체크하며 누가 얼마나 왔는지는 알 수 없는 상황. 시간이 되면 관객수와 관계없이 시작하자고 서로 약속했다. 3,2,1 시간이 되었다. 내가 먼저 페인트를 하얀 천에 흩뿌렸다. 그것은 연주를 시작하라는 사인과 동시에 이어서 모두 페인트를 뿌리거나 큰 붓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관객에서는 하얀 천에서 어느 방향에서 어느 색감이 나타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양쪽에서는 스테레오로 음악이 연주가 된다. 그리고 뒤에서는 즉흥시가 읊어진다. 그야말로 관객은 세상에서 하나뿐인 음악, 미술, 문학을 한 공간 한 시간에 한꺼번에 느끼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한참이 흘렀을까? 준비된 물감과 페인트가 다 동이 나 더 이상 천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모든 퍼포먼스를 끝이 나는 것이라고 미리 약속이 돼있었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천 밖으로 우리는 나갔다. 조명을 켜고 관객석을 보니 5명 정도만 앉아서 박수를 쳐주고 있었다. 5명..
관객에 관계없이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으며 서로를 축하해 주고 격려해 주고 눈물을 흘렸다. 물론 해냈다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우리 중 가장 먼저 군대에 갔었던 내가 전역을 하여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학교 동아리 방이었다. 신생동아리였던 터라 방이 없었는데 드디어 우리 방이 생겼다고 편지를 두어 번 받았기에 가장 먼저 찾아갔다. 두근거리는 마음에 문을 열고 들어갔으나 텅 비어있었다. 다들 어딜 간 걸까? 알아보니 남자들은 하나둘씩 군대에 갔고 여자들은 벌써 3학년 이상들이 되어 연주하러 다니거나 졸업준비등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멤버 한 명을 만나게 되어 동아리 활동 안 할 거냐는 질문에 아직도 그거 할 시간이 있냐는 식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 후 나는 졸업할 때까지 아무도 만날 수가 없었다. 동아리방도 반납을 했다. 이후로 나는 한 번도 그날의 일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수십 년이 지나 이 영화를 보며 저 말을 들었을 때 타임머신을 탄 거 처리 순간적으로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1막이 끝나야 2막으로 넘어가고 그렇게 순차적으로 가야 한 편의 연극이 끝이 나는 건데 나는 대학교 1학년때의 1막을 나 혼자서 끝내지 못한 채.. 그렇게 한 작품을 끝내지 못한 사람이 돼버린 느낌이 들었다. 흘렸던 눈물이 정확히 나도 잘 모르겠다. 세월이 너무 흘러서인지, 그때 혼자서라도 더 활동을 할걸 하는 아쉬움인지, 젊디 젊은 나의 모습이 떠올라 그 모습이 그리워서인지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거다.
우린 너무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