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영어 이름은 무엇인가요?

영어 이름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

by 한그루


나는 2015년부터 한국을 떠나 ‘외국'이라 불리는 곳에서 살아왔다. 필리핀 세부, 호주 브리즈번, 영국 런던, 그리고 지금은 6년째 영국의 남서쪽 어느 소도시에서 직장 생활하는 워킹맘으로 살고 있다.


내가 처음 영어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바야흐로 2006년,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파트타이머로 일할 때였다. 영어 이름을 하나 만들라고 해서 '루시'라고 급하게 지었다. 사실 '헤르미온느'가 좋았는데 너무 길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루시가 되었다.


나에게 루시는 편리한 가면이었다. 그 이름 뒤에서 나는 가끔은 대범해 지기도 하며 왠지 모를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렇게 루시로 살아가다 한 회사에 취업을 했고, 본사로 발령을 받아 출근해 보니 영어이름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했다. 망설임 없이 '루시'라고 했다. 그런데 팀장님 영어이름이라서 안된다고, 바꾸라고 했다. 팀장님이 바꿀 순 없지 않냐고. 잔인하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클로이’라는 세련된 이름을 지어줬다. 마음에 들었다. 루시가 한없이 착하고 따뜻한 느낌이라면, 클로이는 약간 차가운 도시여자의 느낌이 났다고나 할까.


나는 한동안 누구의 방해도 없이 그 차도녀스러운 이름으로 살아갔다. 그런데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갔더니, 또 영어이름을 지으라고 했다. 클로이 하겠다고 했더니, 어학원에 이미 있으니 다른 이름을 선택하라고 했다. 그럴 거면 차라리 내 한국이름으로 하겠다고 하니 단호하게 안된다고 했다.


호주에서는 만약 같은 이름이 둘이라면, 클로이 K, 클로이 L, 이런 식으로 불렀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다.






몇 가지 어색한 점이 발견된 것은 내가 런던에서 일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지금은 온라인으로 급여명세서가 나오는 회사가 대부분이겠지만 내가 2017년에 처음 일할 때는 프린트된 급여명세서를 스탭리더가 이름을 부르며 나눠줬다. 당연히 내 여권, 은행 계좌는 모두 내 한국이름으로 되어있었으니 명세서도 마찬가지였다.


"Who is Mi... Song?"

"미... 쏭.. 마이쏭이 누구야?


그게 나라고 하면 어김없이 2차 질문이 돌아온다. 근데 왜 네 이름을 놔두고 '클로이'라는 이름을 쓰냐고.

혹시라도 그 조직에 진짜 영국인 클로이가 있다면 상황은 더욱 어색해진다. 꼭 내가 가짜가 된 듯한..


같이 살던 포르투갈 아주머니한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아주머니는 내 한국이름이 너무 예쁜데 왜 굳이 영어 이름을 쓰냐고 하셨다. 그리고 이어진 희대의 명언..

"Misong. your name is just like a beautiful song"

"미송. 너의 이름은 마치 아름다운 노래(song) 같아!"


그때 처음 알았다. 내 이름이 외국인들이 듣기에도 좋은 이름인지. 영어이름을 쓰면 왠지 현지인들 사이에서 이질감 없이 스며드는 느낌이 있었다.

엠마, 엘리, 샬롯, 미송, 크리스틴... 뭔가 굉장히 이상하다. 그래서 현지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영어이름을 써주는 게 매너 아닌 매너라고 생각했다. 기억하기도 쉽고 굳이 내 이름을 어떻게 소리 내는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생각해 보면 일본인 친구들은 토모미, 유토, 타쿠야 등 자기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유난히 한국과 중화권 나라 친구들은 자기를 영어이름으로 소개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발음이 확실히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권 친구들은 완전히 다른 이름을 만들지 않고 자기 이름을 영어식으로 바꾸기도 한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로헝은 영국에서 로렌, 스페인의 루띠아는 영국에선 루시아로 소개한다던지 말이다.


그 이후로 나도 용기를 내기로 했다. 외국에서 클로이가 아닌 미송으로 살아보기로. 비록 그것이 마이쏭, 미쏭그, 미이쏭의 여정을 겪는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들이 편하게 배려를 해주는 것도 좋지만, 사람들에게 내 이름 발음하는 법을 알려주고, 특히나 내 이름 뜻을 한자씩 풀어서 설명해 주는 것도 굉장히 좋은 스몰토크 주제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 아이를 데리고 아이 친구 생일 파티에 다녀왔는데, 한 7살 정도는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우리 아이와 너무 잘 놀아주는 것이 아닌가. 너무 예뻐서 "안녕! 네 이름이 뭐야?"라고 물어봤더니 "파티마"라고 했다. 그래서 "파티마, 정말 예쁜 이름이구나!"라고 했더니, 파티마가 아니란다. 그러더니 나를 잡고 내가 똑바로 발음할 때까지 내 입을 보면서 계속 가르쳤다. 프, 히, 므, 프, 틈, 하. 결국 아이의 OK 사인을 받고 파티마 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7살 아이도 자기 이름을 똑바로 발음할 수 있게 이렇게 가르치는데, 우리도 앤드류, 올리비아 등 그들에게 쉬운 영어 이름을 알려주기 전에 아무리 어려운 이름이라도 우리의 이름을 먼저 알려주는 것도 괜찮다고 본다.


정답은 없다.

하지만 2026년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

금발의 파란 눈의 외국인이 한국인들의 편의를 생각해서 자기를 정숙, 영자, 영식이라고 소개한다면

우리 또한 그들에게 물어보지 않을까?

본인 이름을 두고 왜 굳이 한국이름을 사용하냐고.



한때 영어 이름을 사용했던 사람으로서

영어 이름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들을 적어보았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