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직장인 영어 발음 실수담
영어는 자신감이 반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영어 공부에만 천만 원 넘게 써본 사람으로서 배우는 단계에서는 자신감이 중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문법과 발음에 위축되기보다, 일단 입 밖으로 꺼내는 용기를 내기가 그만큼 쉽지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영어로 실무를 하는 단계가 되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자신감뿐 아니라 문법, 발음, 억양까지 제대로 다듬어야 한다는 걸 영국에서 일하며 깨달았다. 특히 외국인 비중이 적은 소도시에서 일하다 보니 그 차이는 더 선명했다. 같은 단어라도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소통이 어긋나기도 하고,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직장생활을 하며 발음 때문에 의도치 않은 실수를 많이 해왔다. 부끄럽지만, 그중 잊히지 않는 네 가지를 정리해 보았다.
1. 난 그저 Beach가 좋았다고 말했을 뿐인데
월요일 아침 미팅. 주말에 뭐 했냐는 스몰토크 중 전날 바닷가에 다녀온 얘기를 했다. “That was the most beautiful beach I've ever seen!" 묘한 웃음이 흐르는 것 같았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역시, 평소에 내가 헷갈렸던 장단음이었다. Beach(비-이취)라고 길게 해야 하는데, 빗취처럼 짧게 내뱉어버렸다. 의도치 않게 아침부터 욕을 해버린 셈이다. 나는 멋진 바다에 다녀왔다고 말했는데 듣는 사람은 “내가 본 ‘쌍X’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 “라고 들렸을 수도 있으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2. 그 Sheet가 그 쉿트가 아니고요.
매니저에게 보고를 하고 있었다.
"사라 씨가 새로운 오버타임 워크시트를 요청했고, 저는 지금 엑셀을 이용해 그 시트를 만들고 있어요. 각 스프레드 시트들은 고유의 이름을 가지게 될 거예요."
매니저가 나를 쳐다보며 "Great!"이라고 했다. 100% 웃참 표정이다. 등골이 서늘했다. 그렇다. 또 장단음이었다. 길게 발음해야 할 'sheet [쉬-이트]'를 짧게 말해버린 것이다. 워크 쉿, 엑셀 쉿, 그리고 스프레드 쉿. 쉿쉿쉿. 듣는 내내 얼마나 귀가 가려웠을까. 욕한 거 아닙니다.
3.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금요일, 월요일 연차를 써서 주말을 길게 보내는 동료에게 인사를 건넸다. "Enjoy your long weekend!" 말을 하고도 뭔가 이상했다. 역시나 L과 R, 내게는 영원한 숙제다. 생각해 보니 'long [롱]'을 'wrong [뢍]'으로 발음했던 것이었다. "긴 주말"이 아니라 "잘못된 주말"을 보내라고 한 것. “당신의 잘못된 주말을 즐기길 바랄게요”라는 망언을 하다니.
4. 단지, 전부다 논의 됐다는 말이 하고 싶었어요.
미팅의 막바지. "Anything else to add?" 더 말할 것 있어요?라고 주최자가 물었다.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I think everything has been discussed." 내 말이 끝나자마자 한쪽에서 장난기 있는 매니저가 무슨 말을 보태려 하다가 말았다. 주최자도 묘한 웃음을 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Okay... let's call it a day then." 자! 그럼 오늘은 이만 마칩시다 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그 장면을 되새겨 봤다. 에브리띵 헤즈 빈...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내가 'discussed [디스커스트]'를 'disgusted [디스거스티드]'로 말해 버린 것. "제 생각엔 모든 게 논의됐어요"가 아니라 "제 생각엔 모든 게 역겨웠어요"처럼 말해버린 것이다. 그 어떤 누구도 뭐라고 한 사람은 없었지만, 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마나 웃겼을까. 매니저의 웃참 얼굴이 잊히질 않는다.
대부분의 내가 만난 영국 사람들은 이런 실수를 바로 짚어주지 않는다. 어학원이 아니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실수를 지적하는 게 무례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외국인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도 한다. 배려가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사소한 발음 차이가 보이지 않는 선이 되어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전략을 바꿨다. 자신 없는 단어는 다른 표현으로 바꿔 말하기로 했다. worksheet 대신 Excel file, beach 대신 seafront, 그리고 discussed 대신 handled. 완벽하게 말하려 애쓰기보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단어들로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을 선택했다. 영어는 여전히 자신감이 반이지만, 나머지 반은 결국 디테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말을 할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면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아무도 욕이라고 한 적도 없는데 누군가가 그것이 내 ‘마음의 소리’라 생각할까 봐. 그런 괜한 오해가 생길까 신경 쓰는 내 모습이 그냥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 그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외국에 나와 살다 보니, 자꾸 눈치를 살피게 되는 것도 사실인 것 같다. ‘외국인 동료’가 아니라 그냥 ‘동료’로 조금 더 자연스럽게 그들과 융화되기 위해 나는 오늘도 공부한다.
참 쉽지 않다. 외국살이.
그래도 어쩌겠어. 또 해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