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히드로 공항 4번 터미널

by 한그루


2016년 12월 26일.

부산을 출발하여 광저우에서 18시간을 경유하고,

런던으로 가는 여정에 올랐다.


런던까지 가는 편도 비행기표를 30만 원대에 얻었으니

광저우 18시간 환승은 할만하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공항 노숙이 아닌 4성급 환승호텔이라니

그 정도면 호사지.


당차게 나섰지만

사실 나는 설레는 마음보다는 또 낯선 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더 컸다.


호주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보낸 3개월.

온기를 가득 받고 떠나온 길이라 더 그랬던 것 같다.




12시간의 비행 끝에,

항공기는 현지 시각 오후 3시 무렵

런던 히드로 공항 4번 터미널에 착륙했다.

부산을 떠난 지 약 35시간 만이다.


다행히 아직 해가 떠 있었다.

불안했던 것 과는 달리 짐도 잘 찾았다.

시작이 좋았다.


2주 동안 지낼 숙소가 있는 엔젤역까지.

피카딜리 라인을 타고 스물 세 정거장,

킹스크로스역에서 노던 라인으로 환승해 한 정거장 더.

구글맵이 안내하는 대로 지하철 탑승장에 내려갔다.


큰 캐리어, 작은 캐리어, 백팩, 커다란 보부상 가방 2개.

총 다섯 개의 짐을 끌고 힘겹게 전차에 올라탔다.

누가 봐도 이곳에 처음 이사 오는

외국인임을 숨길 수 없었다.


짐을 대충 옆에 세워 두고 구글맵을 다시 열었다.

세상에,

지하철 안에서는 인터넷이 잡히지 않는다.

경고음이 울리고 매섭게 문이 닫히더니,

당황하고 있는 사이 차가 출발했다.


갑자기 지진이 난 것처럼 전차가 흔들렸다.

손잡이를 잡지 않으면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마치 귀가 찢어질 듯한 쇳소리와 함께

열차가 커브를 돌았다.

한쪽에 세워둔 캐리어들이

물 만난 고기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스토퍼 없는 캐리어 두 개는 자유롭게 이동하며

마치 깡패처럼 조용히 앉아 있던 사람들을

마구 치고 다녔다.


당황스럽고 너무 부끄러웠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의 표정으로

죄송하다고 말했다.


"Sorry, so sorry..“


다행히 옆에 계신 분들이

내 캐리어를 잡아 다시 내 손에 쥐여주셨다.

하지만 캐리어와 함께 한번 흩어진 내 정신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드디어 킹스크로스역.

열차와 역 사이 간격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방심하면 그대로 빠질 것 같았다.


긴장하며 가방을 하나씩 내리고

화살표를 따라 환승 통로를 찾다가 패닉에 빠졌다.


계단이다.

엘리베이터가 없다.


들고 온 짐들은

도저히 혼자 들고 한 번에 갈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어떤 여성이 다가와 물었다.


"Are you okay? Do you need any help?"

"괜찮으세요? 도움이 필요하세요?"


"No, I'm okay."

"아니요, 괜찮아요"


날이 바짝 선 앙칼진 고양이처럼,

반사적으로 거절을 해버렸다.


'바보. 도와 달라고 했었어야지.'


그때 그 여성분이 다시 한번 나에게 물었다.


“Are you sure?”

"정말 도움 필요 없어요?"


그리고 나는 못 이기는 척 대답했다.


“Yes, Please.. sorry”

“죄송해요. 도와주세요. “


그 친절한 여성분은 나에게 스윗한 미소를 보이며

나를 도와줬다.


이제 역 하나만 가면 된다.

한 번 해봤다고 이제 제법 능숙하게 전차에 올랐다.




드디어 엔젤역 도착.

다행히 역에는 에스컬레이터가 있어서

무사히 지상으로 올라왔다.


그사이 해가 저물었다.


아직 가야 할 길은 먼데 인터넷 신호는 약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습하고 춥고,

거리엔 사람도 없고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했다.


동네 이름은 '엔젤'인데,

동네 분위기는 하나도 엔젤 스럽지 않았다.


단기 렌트하시는 분께 전화를 걸기 위해 멈춰 섰다.

손이 꽝꽝 얼어붙어 버튼이 눌러지지 않았다.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그곳에서

내가 덜덜 떨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에요, 여기!"


어두운 밤거리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고, 분명 한국사람이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바라보니

빨간 현관문 밖으로 새어 나오는

노란 불빛을 배경으로

렌트해 주기로 한 여성분이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처음 만난 사람이지만, 몇 년은 알고 지낸 것 같은

편안함.. 그리고 나도 모르게 온몸이 스르르 녹았다.


몇 가지 설명을 듣고, 나는 방으로 들어왔다.

빗물에 다 젖어버린 코트를 옷걸이에 걸어두고,

침대에 기댔다.


‘방수패딩을 가지고 왔어야 했는데,’


집에서 안 가져온 것들만 생각이 났다.


한국에 생존 신고차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잘 도착했어요. “

“우리 딸내미, 거기까지 간다고 얼마나 고생 많았니. “


엄마 목소리를 듣자마자 목이 메었다.

5초만 전화기를 더 들고 있으면

눈물이 터져 버릴 것 같아, 얼른 끊었다.


긴장이 풀렸는지

눈이 스르르 감기면서 잠이 들었다


주방에서 압력 밥솥 돌아가는 소리,

엄마가 요리하는 소리를 들으며,

따뜻한 방에 누워 귤을 까먹으며 무한도전 보던

세상 편한 내 모습이 보인다.


꿈이었다.

눈을 떠보니, 내가 누워있는 공간이 너무나 낯설었다.


‘그 익숙한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줄도 모르고

나는 또 무엇을 위해 왜 여기까지 왔을까.’


그리고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 다시 잠이 들었다.


나의 런던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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