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겨울

by 한그루


부산에서 런던까지 35시간의 여정,

그리고 이어진 어둠의 숙소 찾기,

그 여파로 인해

나는 12시간을 내리 자고 마침내 일어났다.


목이 타고 허기가 졌다.

수돗물을 그냥 마셔도 된다고 했지만

못 미더웠다.

비행기에서 먹었던 남은 생수를 몇 모금 마신뒤,

어제 렌트해 주신 분이 주고 가신 안성탕면을 끓였다.


라면을 끓이면서

메모 앱을 열어 당장 해야 할 일들을 적어 내려갔다.


지금 있는 곳이 2주만 있을 임시 숙소라

앞으로 살 집을 얼른 찾아야 했다.

그리고,

NI번호 신청, 일자리 구하기.


NI(National Insurance) 번호가 있어야

일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안내된 번호로 일단 전화를 걸었다.

20분을 기다린 끝에

굉장히 불친절한 상담원과 연결됐고,

동문서답을 몇 번이나 거치고서야.

겨우겨우 신청을 마쳤다.


이놈의 영어는 긴장하면 더 안 나온다.

그래도 하나는 끝났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인터넷으로 봐둔 방을 보기로 약속을 잡고 나왔다.

패딩턴, 첼시, 캔싱턴, 핌리코

방은 부촌으로 알려진 곳 위주로 알아봤다.

상대적으로 안전할 것 같아서였다.


가는 길은 출발 전에 찾아서

스크린샷을 만들어뒀다.

갑자기 인터넷이 안 될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미리 준비해야 했다.


파란 하늘이 참 맑고 예쁘다고 생각하고 나왔지만,

그렇게 말나오기가 무섭게, 다시 우중충 했졌다.

어떻게 날씨가 이렇게까지 드라마틱하게 변할까.


브리즈번에 있을 땐 모르는 사람이라도

길에서 마주치면 "Hi “ 하고 인사했다.

참으로 러블리했던 사람들.


그때를 떠올리며

눈이 마주치는 사람에게 '브리즈번 식'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브리즈번은 브리즈번이고 런던은 런던이었다.


눈이 마주친 사람이 갑자기 나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 하는 살기를 느끼며,

죽기 살기로 도망갔다.


물론, 나에게 먼저 인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니하오"


나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I'm not Chinese."


내가 차이니즈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그들은 그냥 낄낄대며 웃었다.


그런 비웃음 말고는 사람들의 얼굴이 온통 회색이다.

이곳이 더욱 춥게 느껴졌다.


나는 내가 이렇게 날씨에 영향을 받는 사람인지 몰랐다.

우스갯소리로 365일 중에 300일이 맑다는 브리즈번에선 걸어만 다녀도 기분이 전환됐다.


거기에 비하면 런던의 1월은

셜록 홈스에 나올법한 우중충한 하늘,

뼈를 파고드는 습한 비바람,

그로 인해

밖에서는 10분 이상 걸어 다니기가 힘들었다.


‘일단 어디든 들어가자.’


슈퍼마켓에 들어가서 계산을 하려는데,

셀프 체크아웃은 카드만 되고,

카드 리더기에 한국 카드가 안 된다.

도와주러 온 직원은

하나도 도와주고 싶지 않은 표정이다.


‘그래도 당장 필요한 것들은 샀으니 다행이야.’


다시 숙소로 향하는데,

이번엔 11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날 원숭이 보듯, "너도 먹어" 하며

먹고 있는 빵을 던진다.

그러면서 깔깔거리며 난리가 났다.


치욕스러웠다.

아니, 생각해 보니 어이가 없었다.


나한테 왜 이래?

단지 내가 동양 사람이라서?


30년을 살아오면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나에게 인종차별은 늘 예외인 줄 알았다.

그냥 티비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만 보던 이야기.


나는 그동안 그냥 운이 좋았던 것이다.


부촌에서도 이 정도면..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걸까?


길고양이한테도 눈치가 보이는

그렇게 상처만 가득한 날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며칠 뒤 신청했던 NI 넘버가 우편으로 왔다.

‘Misong Kin’


N 아니고, M! M! M!!!!!!!!!!!!


내가 그렇게 Kim, 끝에 M이라고 했잖아!!!!!


참고 참았던 가슴속의 분노가 터져버리고 말았다.

그러게, 그렇게 성의 없이 들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그 불친절한 직원들과 또 통화를

해야 한다니. 그냥 그 사실이 너무나 싫었다.


런던의 겨울은 내 가슴속에 그나마 남아 있던 온기를

조금씩 식혀내고 있었다.


방수자켓과 모자를 쓴 사람들 사이에서,


내 회색코트는 또다시 젖었다.

내 머리도 젖었다.


어쩌면 나는 이곳과 어울리는 사람이 아닌 걸까?


수돗물 한잔 마실 용기도 없으면서

단지 영국이라는 환상에 젖어

시간을 더 벌어보기 위해

이렇게 대책 없이 도망 와버린 이곳에서

나는 지금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게 아닐까?


런던에서의, 나의 첫 겨울이었다.



화, 수, 금, 일 연재
이전 01화런던 히드로 공항 4번 터미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