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1의 경쟁률을 뚫고 영국에 왔지만,
그렇다고 뚜렷한 계획을 가지고 온건 아니다.
서른 살의 패기로 당차게 회사문을 나선 후
필리핀을 거쳐 호주로 갔던 지난 1년처럼
어떤 자격증이나, 공부를 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막연히, 지금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돌아가려면 적어도 이전에 일했던 회사보다는
더 나은 직장, 더 나은 직급이어야 하는데,
퇴사 후 지난 일 년 동안
과연 나에게 그만큼의 경쟁력이 생겼을까?
더 솔직하게 말하면
그냥 남들 보기 부끄러워 갈 수 없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영국으로 온 목적은 매우 명확하게
‘도피’와 현실에 대한 ‘회피’였다.
그리하여, 나에게는 2년이라는 시간이 생겼다.
유럽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영국.
이렇게 오게 되었으니,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야겠다고.
나의 전문 분야인 환대산업에 대한 경험을 쌓으면서
틈틈이 유럽에서 열리는 중동 항공사 오픈데이에
계속 지원해 봐도 좋겠다고.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나의 오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내 생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 일 수도 있으니까.
나는 생각했다.
도움이 될 만한 이력은 무엇일까?
그때 면접에서 만났던 사람들 중에는
외국 호텔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렇다. 그럼 호텔이다.
일단 프런트 데스크는 아니더라도
식음료 보조쯤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체인 호텔에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다.
힐튼, 메리어트, 르네상스, 하얏트, 그리고 리츠.
이 중 한 군데에서 연락이 왔다.
Hilton Kensington - Food & beverage assistant
힐튼 켄싱턴 - 식음료 보조.
식음료 직종은 보통 트라이얼을 본다.
즉, 인터뷰 과정 중 하나로
손님 응대를 어떻게 하는지,
동료들과 어떻게 소통하는지,
몇 시간 동안 일을 미리 시켜보는 것이다.
대부분은 무급이다.
나는 한국에서 대형 체인 레스토랑 매니저로
일한 경험이 있으니 그 정도라면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 면접을 보지도 않았지만
마침 그 힐튼 호텔에서 5분 거리에
올라온 방이 있었고, 냉큼 뷰잉 약속을 잡았다.
사실 그때,
나는 이미 6-7번 정도 다른 집들을 본 상태였다.
한국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매물들 위주로
찾아다녔지만,
생각보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집도 어둡고, 같이 살 사람들 표정도 어둡고,
모두가 런던의 겨울에 찌들어 있는 모습이었다.
주방 쓰는 시간, 게스트 금지, 청소 등
같이 살면서 지켜야 할 ’ 수칙‘ 도 너무 엄격했다.
대신 한국인끼리 살아서 깨끗하다는 게
유일한 장점이었다.
“오늘 청소하는 날인 거 몰랐어요?”
브리즈번에서 한국인 세입자들과 지낼 때
내 차례인데 아침에 화장실 청소가 안되어 있다고
카톡을 받은 게 생각났다.
깨끗함이 유지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거다.
그렇게 나는 마음에 드는 집을 찾지 못한 채
방 빼기 3일 전까지 와버렸다.
말 그대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당장 3일 후면 길바닥에 나앉을 수도 있는 상황.
간절한 마음으로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노팅힐 근처에 있는 그 집을 보러 나섰다.
만나기로 한 시간은 오후 6시,
건물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주소를 받았다.
약속시간 40분 전,
주인아주머니가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전화를 하셨다.
폰에 배터리가 2%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통화하는 사이에 전화기가 꺼져버렸다.
마지막 1%가 최선을 다해 버텨주었지만,
일이 생겼단 말 뒤로는 정확하게 듣지 못한 채로
그렇게 전화가 끊겼다.
'어떡하지?'
일단 저녁 6시에 아파트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기다릴 각오를 하고 무작정 약속장소로 갔다.
그런데,
“You must be the korean girl!!!”
“네가 그 코리안 걸이구나! “
우산을 쓴, 60세 정도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나를 알아보시고 반갑게 인사했다.
전화로 들었던 그 목소리다!
아주머니는, 우리의 전화가 그렇게 끊겨서
혹시라도 내가 기다릴까 걱정이 되어
하던 일을 멈추고 그냥 오셨다고 했다.
죄송하단 말을 할 새도 없이
아주머니는 춥다고 얼른 들어가자며, 내 등을 떠밀었다.
주인아주머니는 포르투갈 사람.
20층에 위치한 방 2칸짜리 아파트,
주인아주머니, 세입자,
그리고 하얀 고양이 한 마리,
이렇게 사람은 딱 두 명만 사는 구조였다.
방을 보여주시기 전
일단 나에게 포트 와인 한 잔을 따라주셨다.
달콤한 와인이 목을 타고 부드럽게 넘어가자,
온몸이 노곤해졌다.
아주머니의 포르투갈식 유머에 자꾸만 나오는 웃음.
런던에 도착한 뒤
처음으로 긴장과 경계가 조금씩 풀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곤 와인 잔을 들고 우아하고 여유롭게
집 이곳저곳을 볼 수 있었다.
아주머니는 집 이곳저곳을 보여주시며 말했다.
"여기가 네가 쓰게 될 주방,
여기가 네가 쓰게 될 욕실과 화장실."
내가 이미 이곳에 같이 살게 될 사람처럼
따뜻하게 날 맞아주시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여기가 네가 쓰게 될 방."
방문을 열어주셨다.
“와…”
내 눈앞에는
노팅힐 너머 런던아이까지.
런던이 훤히 보이는 멋진 뷰가 펼쳐졌다.
'여기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방세가 너무 비쌌고,
내일 면접에 합격하지 않는다면
굳이 여기 와서 살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망설여졌다.
아주머니는 인터뷰 잘 볼 거라며 손을 잡아주시고
따뜻하게 안아주셨다.
면접 끝나면 다시 연락드리기로 하고 나왔다.
하얀 고양이와 아주머니가 문 앞에서 날 배웅해 주었다.
다시 내 마음속에 온기가 피어나는 기분이었다.
‘나 여기 살고 싶은데 어떡하지? ’
방법은 하나다.
내일 면접을 잘 보는 것.
마음이 급해졌다.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둑어둑 해졌는데도, 그날은 춥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