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That's not your fault

by 한그루


검정 셔츠, 검정 바지, 검정 신발.

내일 트라이얼 때 입을 복장이었다.


뷰잉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근처 쇼핑몰에서 검정 바지와 셔츠를 샀다.


신발은..

그냥 내가 가져온 구두를 신기로 했다.


한국 레스토랑 홀에서 일할 때도

늘 5-7센티 구두를 신고 일했었으니까.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다.


집으로 돌아와 자기소개 등 면접 준비를 했고,

내일 아침에 탈 버스 시간과 경로를 미리 확인해서

스크린샷을 찍어뒀다.


힐튼 켄싱턴 호텔
6시 50분까지 면접장 도착.
환승 없음, 예상 소요시간 버스로 25분.


숙소에서는 아침 6시쯤 나가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맞춰놓았던 다섯 개의 알람 중

첫 번째가 울리지도 않았는데 눈이 번쩍 떠졌다.


준비를 마치고, 현관문을 열었다.

‘어김없이 비가 오는 구만.’


정류장에 도착해서 기다리는데 버스가 오지 않았다.

이미 10분이 지났고, 또다시 10분이 지났다.

초조해졌다.


6시 10분까지 오기로 한 버스는

결국 6시 30분이 넘어서야 도착했다.

같은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짜증 난 표정이었다.


‘아니, 이렇게 늦으시면 안 되죠!‘

사람들이 시작하면

나도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속으로 연습하며 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항의하는 사람도, 불평하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들은 되려,

"Well, it is what it is, not your fault."

어쩔 수 없죠. 기사님 잘못이 아니잖아요라고 말했다.

혼자서 중얼중얼거렸던 내가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한 손으로 실시간 구글맵을 보며

남은 거리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신호에 걸린 듯했던

버스가 아까부터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또 10분, 20분…


사고가 났나?


내가 도착을 예상했던

6시 50분은 이미 지나가고 있었고,

아직 반도 못 온 상황이다.


기사님의 잘못은 아니지만,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을 것 같다고 호텔에 전화하려고 보니

엎친데 덮친 격으로 신호까지 잡히지 않았다.


목이 타기 시작했다.


‘이놈의 동네는 정말 한 치 앞도 예상할 수가 없구나’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그제야 차들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고,

드디어 막힌 길이 뚫린 듯,

내가 탄 버스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결국 나는 7시 20분이 되어서야

겨우 호텔 리셉션에 도착할 수 있었다.

20분이나 늦어버렸다.


“So sorry, I am late!”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내려서 얼마나 뛰었는지,

숨을 헐떡이며 정말 죄송하다는 얼굴로 연신 사과했다.


"No need to apologise, that happens.

It's not your fault."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그쪽 잘못 아니잖아요."


딱히 활짝 웃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굳이 불편한 표정도 짓지 않았다.


'런더너의 마인드인가..'


매니저와 함께 서둘러 조식 식당으로 가는 길에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을 만났다.


그녀가 내 7센티 구두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You wouldn’t wear those shoes, would you?”

“당신 그 신발 신고 일할 건 아니죠?”


그녀는 나를 경멸하듯 쳐다보았다.

그건 definitely 불편한 표정이었다.


그렇다. 이곳은 직원이 예쁘게 보이는 것보다,

발등에 포크 나이프가 떨어져도 보호해 줄 수 있는 신발, 물기 있는 바닥에서도 미끄러지지 않을

안전한 신발을 신는 게 더 중요했다.


“You can’t work today if you don’t have proper shoes”

“신발 없으면 오늘 일 못합니다. “


금방이라도 나를 집으로 돌려보낼 것 같은 분위기였다.

심장이 철렁했다.


면접 끝나면 신으려고 챙겨 온 검정 운동화가

불현듯 내 머리를 스쳤다.


“Of course not, I have got my other shoes.”

“아! 당연히 아니죠. 다른 신발 가져왔어요.”


겨우 위기를 넘겼다.


지각, 부적절한 복장.

시작도 안 했는데 2 연타다.


나는 이미 그녀의 싸늘한 표정에서 멘탈이 흔들렸다.


그 상태로 4시간 동안 조식을 서비스를 했다.

빈 접시도 치우고,

냅킨도 가져다 드리고,

테이블도 정리하고 세팅하고.


과거 300석이 넘는 레스토랑에서 얻은

폭풍 테이블 치우기 스킬로

조식 업무에 금방 적응했고

동료들과 잘 지내는 모습을 보였다.


'좋았어! 오늘 나쁘지 않았어.'





트라이얼이 끝나고 매니저와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20분가량 면접을 봤다.

자기소개, 과거 경력, 지원동기..

결과는 이번 주까지 주겠다고 했다.


"네?"


당황스러웠다.

나는 당장 결과가 필요한데,

이번 주 까지라니,

'제가 너무 급해서 그런데 일단 된다 안된다만 좀 말해주면 안 될까요?' 하고 한번 말이라도 해볼까?


하지만 나는 그 정도로 대범하지 못했다.

허탈한 마음으로 호텔을 나섰다.


어떡하지?

아주머니께 연락을 드려야 하는데

아직 결과를 모르니,


하지만 나는 지금 있는 곳에서

내일까지 방을 빼야 하는 상황이었고.

어제 본 집을 계약하지 않을 거라면

당장 지금이라도 다른 곳을 보러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체념한 듯, 정처 없이 걸었다.


익숙한 간판이 보였다.

맥도날드다..

비가 점점 더 많이 오니 일단 들어갔다.


빅맥 세트 하나를 시키고 다이어리를 펼쳤다.


막막했다.


어제 본 집에서 살려면

월세 700파운드, 매달 교통비 200파운드.

식음료 보조로 일하면

한 달에 보통 1,100파운드를 버는데,

과연 내가 이 생활을 감당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다시 한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방을 보기 시작했다.


갑자기 전화가 왔다.

엄마다.


“잘 지내니? 우리 딸?”


숙소 때문에 고민 중이라고 하니 엄마가 말했다.


“어제 본 곳에서 마음이 편했다면,

조금 더 비싸더라도 거기로 하는 게 어때?

마음이 편해야 하는 일도 잘되는 거야!

엄마가 살아보니까,

있다 가고 없고, 없다가도 또 있는 게 돈이더라.”


그렇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면접 당락에 상관없이

온기가 가득했던 그 집에서 살고 싶었는지도.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누구의 탓도 하지 않기.
너에게도 나에게도 조금 더 관대하기.


오늘 아침, 런더너들에게 배운 교훈으로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면접이 떨어져도 그게 네 잘못은 아니잖아.

이왕 이렇게 된 거,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그사이에 방이 나가버린 건 아니겠지?

나는 어제 집주인아주머니께 얼른 연락을 드렸다.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죠?

저 어제 집 보고 온 사람인데요. “


그러자 아주머니가 기다린 듯 물었다.

“오! 그럼요. 면접은 잘 봤어요? “


그리고 나는 말했다.

“아니요. 망했어요.

그래도 혹시 아직 가능하다면

제가 그 집에 같이 살아도 될까요?”


그러자 아주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Of course my darling, Come!”


이사는 내일 오후 3시.

땅땅땅!

그렇게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홀가분했다.

진작 그렇게 하면 될 것을..


그리고 아까 주문했던

내 빅맥 세트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다 식어 버린 햄버거와 감자튀김.

그리고 얼음이 다 녹은 콜라가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어느새 비도 그쳤다.

얼른 가서 이사 준비해야지.


노팅힐 게이트 역, 그 맥도날드에서

나는 그렇게 런던 신참의 모습을 한꺼풀 벗어냈다.





화, 수, 금,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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