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식탁

by 한그루


2017년 1월


이사를 위해 난생처음 우버 택시(Uber)를 불렀다.

터무니없이 비쌀까 봐 그동안 이용할 생각을 못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저렴한 요금에 한번 놀라고,

쾌적한 차량 내부와 친절한 서비스에 또 한 번 놀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공항에서 나올 때도 우버를 탈걸

그 짐 다섯 개를 가지고 낑낑대며 지하철을 타다니,

그것도 환승을 하면서. 미련하기 짝이 없었다.


우버는 하얀 고양이 ‘티토’

포르투갈 아주머니 ‘마리아’가 있는 집 앞으로 무사히 날 데려다줬다.


나의 새 보금자리,

센트럴 라인 홀랜드 파크역과 쉐퍼드부쉬역 사이.

걸어서 30분 거리에 영화에서 나온 노팅힐이 있는 동네.


짐을 다 옮기고 나서야

그동안의 긴장이 풀려서인지 침대에 엎드려

잠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주방에서 요리하는 듯한 소리에 눈이 떠졌다.


‘꿈인가? ’


일어나 보니 마리아가 주방에 있었다.

한인 단기 숙소에서의 ‘주방 이용 시간’이라는

수칙이 떠올랐다.

일단 상황을 모르니, 주방이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똑똑똑”


마리아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달링! 저녁 먹어야지."

”아? 저녁.. 좀 있다 먹으려고요! “

"좀 있다 언제? 벌써 7신데? 내가 만들었어. 얼른 앉아."


이미 상은 다 차려져 있었고,

식탁 옆에 있던 티토가

'어이 신참휴먼, 촌스럽게 서있지 말고 어서 앉아.'

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차려진 저녁식사.

마리아가 준비한 음식과 와인을 함께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현재 셰프로 일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음식이 정말 맛있었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방세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방세는 700파운드죠?

보통 런던에서는 첫 달에 보증금이랑 방세를 같이 내는 것 같던데, 그러면 오늘 1400파운드를 드리면 될까요? “


1400파운드, 그 당시에 우리 돈으로 200만 원 정도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런던에 이제 막 왔는데, 그 목돈을 내고 어떡하려고.

아가씨들은 항상 여윳돈이 좀 있어야 해.

보증금은 필요 없어.

3개월이든 6개월이든 원하는 만큼 살다 나가면 되고,

취직하고 안정되기 전까진 월 600파운드만 줘도 돼."


생각지도 못한 방세 할인.

하지만 괜찮다고 거절하기엔 내 사정이 너무 빠듯했다.

언제 일을 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

보증금을 안 받으시는 것만 해도 나에겐 정말 컸다.


그런 마리아의 조건은 단 하나였다.

나가기 전에 한국인 세입자 구해주고 가기.


“Only Korean!”


아! 그래서 포르투갈인 마리아의 집이

한인 커뮤니티에 올라왔었구나.


마리아가 한국인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가 다른 나라 세입자들에 비해

사고 일으키지 않고, 조용하고, 깨끗하고,

무엇보다 다정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XX 나라에서 온 여성분과 함께 살 때,

그분이 매일밤 다른 남자를 데려오는 바람에

아침마다 빤스바람의 남자들을 마주치는 게 일상이었다고.


친구를 데려오는 건 언제든 환영이지만

이런 극적인 상황을 만들진 않았으면 하는 그녀의 마음이 느껴졌다.


마리아는 런던에서 인생의 반 이상을 보냈다고 했다.

이혼 후, 한 살배기 아들을 본국에 두고

처음 런던에 왔을 때 아침 여섯 시부터 새벽 한 시까지,

하루에만 세 곳에 일하러 다녔다고 했다.


포르투갈에서 실내인테리어 디자이너였던 그녀가,

어떻게 해서 지금은 주방에서 일하는 셰프가 되었는지.

런던에 혼자 와서 처음 시작하는 게

얼마나 고된 일인지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나를 진심으로 이해해 주었다.


런던에서 당했던 인종차별을 얘기했더니,


“Huh, that little sh*t”


가끔 쫀득하게 비속어도 쓰시며, 격하게 반응해 주시니 오랜만에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당장 집에 돌아가도 미련이 없을 것 같았는데,

이렇게 따뜻한 사람 한 명을 만난 뒤로

이곳에 조금 더 있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텨보길 잘했다.‘





면접을 봤던 캔싱턴 호텔에서는

일주일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트라이얼이라는 명목아래 일을 4시간이나 시켜놓고선.

뭐든지 잠수 타는 게 제일 나쁘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력서를 넣었고,

곧 다른 호텔과 면접 일정이 잡혔다.


Hilton Euston - Food & Beverage Assistant
힐튼 유스턴 - 식음료 보조


이번에는 트라이얼에 대한 안내가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복장을 챙겨 면접장으로 향했다.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타야 했지만,

25분 정도가 걸리고, 버스보다는 확실히 믿을 만했다.


다행스럽게도 10분 전에 프런트 데스크에 도착했다.


"Good morning, I've got an interview at 11"

“안녕하세요. 오늘 11시에 면접이 있어서 왔습니다.”


프런트 데스크 매니저 니콜라가 활짝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So lovely to meet you. Thank you for coming. We have been so waiting for you. Please take a seat. Adel will come and get you in 2 minutes."

"정말 반가워요. 우리들은 당신을 정말 기다리고 있었어요. 와줘서 고마워요. 잠시만 앉아 있으면 아딜이 와서 면접장으로 데려갈 거예요."


말들을 어쩜 이렇게 예쁘게 하는지.


얼음장같이 차가울 때도 있지만

영국인들이 말하는 방식은 참 젠틀하고 따뜻하다.

부산 토박이였던지라 나는 이런 다정한 말을 들을 때면

마치 ‘밥 먹었어?’와 같은 서윗한 서울말이 주는

그 특유의 몽글몽글 함이 떠올랐다.


니콜라가 했던 말을 기억했다가

나도 나중에 누군가를 환대할 때 써먹어야겠다.

그런 날이 언젠가는 꼭 오길.


식음료팀 슈퍼바이저 아딜과 30분가량 면접을 봤다.

그는 웃으며 면접을 잘 이끌어줬고

긴장했던 내 마음도 서서히 녹았다.


아딜도 성실해 보인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면접이 끝날 무렵 내가 언제부터 일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I can start as soon as possible, even tomorrow.”

“내일부터라도 할 수 있습니다.”


아딜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잠시 자리를 비우더니

식음료 매니저 마크와 함께 들어왔다.


마크는 웃으며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Congratulation! Welcome to the team!"

"축하해요. 우리 팀에 합류하게 된 걸 환영해요!"


‘드디어 해냈다!’


나는 아딜의 안내에 따라 서류를 작성하고

첫 출근날 입을 유니폼을 받았다.


돌아오는 길 지하철역사에는

누군가 기타를 치며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다.

노랫소리가 들리다니, 대체 이게 얼마만인가.




현관문을 열자마자

넘치듯 흘러져 나오는 집안의 따뜻한 온기와 함께,

마리아와 티토가 나를 반겼다.


"어떻게 됐어?"

"다음 주부터 출근하래요!"


누구보다 기뻐해 주는 그녀는

오늘 같은 날은 외식을 해야 한다며

집 근처에 있는 그릭 레스토랑에 나를 데려갔다.


취직도 했으니 내가 한턱 쏘겠다고 했더니, 이런 건 원래 초대한 사람이 사는 거라며 한사코 거절했다.


“Chin Chin!!”


그녀와 축배를 들며 생각했다.


마리아가 초대한 식탁에 내가 앉을 수 있었던 건,

이 집을 거쳐 간 한국 세입자들이

좋은 흔적을 남겨준 덕분이었다.


어렵게 구한 이 직장에서 내가 모범을 보이면

나처럼 간절한 한국인들이

한 번이라도 더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런던에 사는 동안 국위선양은 못하더라도

어글리 코리안이 되어 다른 사람의 소중한 꿈에

걸림돌이 되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이삿날 우버를 처음 불러본 것처럼,

모든 게 처음 투성이인 나의 런던이었지만,

어느새 하나씩 내 방식대로 헤쳐나가고 있었다.

그 속에서 작은 성취들을 느끼며,

조금씩 나의 자리를 또한 찾아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잠수이별 같은 면접결과에 실망도 했지만,

그 덕분에 ‘찐’을 만나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어쩌면 이곳에서 재밌게 살아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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