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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폴라리스 Oct 27. 2016

미술로 시작하는 프랑스 교육

월간 폴라리스 '아이가 미술을 만나면' 中

프랑스에서는 9월에 새 학년이 시작된다. 지난 9월, 프랑스 릴에 위치한 유아학교인 에꼴 아르고를 포함한 국립학교, 사립학교, 몬테소리 교수법의 학교를 찾았다. 에꼴 마떼흐넬(Ecole maternelle, 한국의 유치원)과 에꼴 프리메흐(Ecole primaire, 한국의 초등학교)에서의 미술 수업을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글 신유미  에디터 한순호  사진 제공 지식너머


본능에 따라 그리는 아이들 
유아학교에 들어서자 벽면과 유리창에 전시돼 있는 수많은 전시 작품들이 먼저 눈길을 끈다. 교실 안에는 미술 용품과 도구들이 가득하다. 약 3세부터 7세까지의 연령을 대상으로 하는 프랑스 유아학교의 커리큘럼은 미술로 시작해서 미술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술 활동이 전체 수업 시간의 80% 이상을 차지하며, 거의 모든 미술 기법과 재료를 접한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하고 풍부한 미술 활동이 이뤄진다. 이 시기를 ‘미술 수업의 전성기’라고 부르는데, 그만큼 미술교육이 어린아이들에게 효과적이고 적합한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 너무 빠른 시기도, 특별히 정해진 시기도 없다. 아이가 원할 때, 흔적을 남기고 싶어할 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할 뿐. 아이들은 모든 것에 호기심이 많고 관찰, 탐색하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단순히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본능적이다. 이런 본능에 따라 이어지는 행동이 그림 그리기다.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아이들은 낙서를 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잘하려는 걱정이나 환심을 사려는 의도 없이 실제 예술가처럼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며 즐거움을 느낀다. 대개 이 낙서들은 우리 눈에 막연해 보이지만 아이에게는 매우 특별하다. 아이 자신이 스스로 신체로 체득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손을 종이 위로 움직이고, 수성펜으로 자국을 남기며 만들어진 결과는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천천히 시작하고, 기다리기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등원한 아이들은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아침 모임을 갖고 바로 미술 활동(아틀리에)을 시작한다. 짧게는 한 달, 길게는 1년에 걸쳐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아이들은 함께 고민하고 탐색하며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기다림을 배운다. 기다림이 있기에 아이들은 자신만의 개성이 담긴 작품을 완성할 수 있고,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정 또한 각별하다. 한 가지 재료나 기법을 쓰기 보다는 여러 기법과 재료를 함께 사용하는데, 방식도 결코 고정돼 있지 않다. 아이들의 반응과 관심 사항에 따라 새로운 내용과 형식이 도입돼 커리큘럼이 더욱 풍부해지고 다양하게 변형되기도 한다. 중간중간 여러 요인에 의해 변형, 진행되는 수업 방식 덕에 아이들은 지루할 틈이 없다.
우리나라와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면 결과물보다는 시작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시작 단계에서 교사들은 아이들이 충분히 대상을 지켜보고 관찰한 뒤, 호기심이 생기고 하고 싶다는 의지가 생길 때까지 기다린다. 결과물을 먼저 보여주며 ‘이걸 만들자’가 아니라, 충분히 탐색하고 호기심을 갖고 뭔가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동기가 충분히 생긴 후에야 아이들은 직접 만지고, 느끼고, 표현하는 시간을 갖는다. 작업을 시작하고 나서도 중간중간 자신이 사용한 물감은 어떻게 마르는지, 신문지는 어떻게 찢어지는지 과정을 지켜본다. 1~2시간 동안 무언가 하나를 그리거나 만들어내는 한국의 미술 수업과는 다른 모습이다. 

너의 작품은 소중하단다 
프랑스 유아학교에서 교사의 역할은 아이가 사회 속에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작은 사회인 교실 안에서 한 명 한 명의 아이를 존중해주며 자존감이 잘 형성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선생님들이 가장 잘 쓰는 방법이 ‘아이의 작품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기’이다. 모든 작업이 끝나면 작품을 집으로 가져가는데 아이들은 부모, 친구, 친척들에게 칭찬을 듣고 자존감이 자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래서인지 많은 프랑스 부모들은 아이들의 작품을 버리지 않고 소중히 간직한다. 부모로부터 칭찬과 긍정적인 반응을 얻은 아이들은 미술 활동에 대해 동기부여를 받는 동시에 유아학교 생활에 더욱 적극적이 된다.
아이의 그림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쉽고 간단한 방법은 주변 사람들의 생일이나 기념일에 아이의 그림을 선물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아이는 자기의 그림이 여러 사람에게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프랑스에서 가족이나 친척 생일 때 아이들이 직접 그리거나 만든 뭔가를 선물하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프랑스 북부 지방에서 만났던 자비에 가족의 딸 리제트는 “두 살 때 아빠 생일 선물로 그린 그림이 아직도 아빠와 엄마 방에 걸려 있어요”라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림을 평가하지 않는 문화
프랑스 부모들은 아이들이 자신의 창의적인 활동과 느낌이 들어 있는 작품을 보여줄 때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아이의 창의력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른의 눈으로 평가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무의미한 일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잘했다”라는 형식적인 칭찬도 하지 않는다. 대신 “정말 신기한 색인데? 이건 무슨 색이야? 냄새도 나는 것 같아!” 등 다양한 어휘를 사용해 반응하고, 아이가 선택한 색과 재료, 어떻게 시작된 작품인지, 무얼 의도하고 싶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들이 진짜 원하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그림에 대해 얘기할 때는 스스로 표현하도록 기다려주고 미리 많은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가 그림을 그렸을 때 부모들이 흔히 하는 질문이 “이게 뭐야?” “누구야?”일 것이다. 그러나 이럴 경우 아이들은 엄마, 아빠를 기쁘게 하기 위해 기대에 맞춰 반응을 하거나 대답을 지어낼 수 있다. 따라서 그림의 형태보다는 사용한 색에 대해, 왜 그 색을 선택했는지, 다른 곳에서 같은 색을 본 적이 있는지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것이 좋다. 
또 하나 이 시기에 중요한 것은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어른의 간섭이 없는 온전한 자유의 순간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영유아기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은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 그리기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어떤 아이들은 매일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가끔씩 그리기를 원한다. 또 어떤 아이들은 독립적으로 그림을 그리지만 다른 아이들은 함께 작업하기를 원한다. 부모는 이런 아이들의 각기 다른 욕구와 창조력을 존중해야 한다. 


초등학교에서의 미술 수업 
프랑스 초등학교의 경우 유아학교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특히 초등학교 1, 2학년에 해당하는 CP, CE1의 경우 미술 시간이 일주일에 1~2회로 대폭 줄어든다. 그 이유는 이 일 년 동안 쓰기, 읽기를 처음 접하며 쓰기, 읽기를 떼기 위해 집중하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이 돼 처음 읽고, 쓰기를 접하는 아이들은 수업 시간에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주며 학습을 하고, 그 효과는 아주 뛰어나다고 한다. 솔직히 프랑스 초등학교를 처음 방문했을 때는 약간 실망도 했다. 유아학교 아이들의 작업에 대해 놀랐었기 때문에, 초등학교 미술 수업에 대해 매우 큰 기대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각각의 수업 과목에서 미술교육이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은 유아학교에서 사용했던 재료와 기법들을 기억해내며 작업을 진행해나간다. 유아학교에서 모든 재료와 기법을 한 번씩은 경험해봤기 때문에 초등학교에서는 그 작업들을 바탕으로 보다 폭넓은 선택과 활용을 해낼 수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글을 배우고 자신이 이야기를 상상하여 스토리를 구성하는 프랑스어 시간에 아이들은 스스로 이야기 속 주인공을 이미지로도 표현해내고 있었다. 글이 빼곡한 노트 한쪽에 아이들이 자신이 상상한 주인공을 그림이라는 이미지 언어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세계사 시간에는 입체로 된 세계지도를 보며 면적을 직관적으로 파악, 그려내고 있었다. 또한 일주일에 한두 번 진행되는 미술 시간에는 소리, 지역문화, 무성영화 등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테마들에 대해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좀 더 복합적이고 고차원적인 접근으로 이루어진 미술 시간에 교사들은 아이의 미술 활동을 격려해주고 칭찬해주며 동기부여를 해주고 있었다. 프랑스 교육에서 ‘미술 활동이 아이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교육방식이며, 가장 즐겁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라고 여겨진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생활 속에 자리 잡은 미술 
프랑스 부모들은 예술의 본질인 자신의 무의식을 표현하고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활동을 열심히 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잘 컨트롤할 수 있고, 어려움을 만났을 때도 잘 극복해 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 부모들은 아이가 마음대로 자신이 미술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여러 미술 재료와 재료들을 모아둘 작은 공간을 준비해준다. 그렇다고 특별한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방 한쪽 구석, 탁자 또는 함께 사용하는 벽장일 때도 있다. 거실 한쪽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종이, 펜, 크레용, 가위, 풀 등의 재료는 아이들에게 언제든 와서 놀자고 손짓한다. 사실 진짜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창의적인 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하는 엄마, 아빠의 마음이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만들 때 격려하며, 도우면서, 용기를 주면서, 옆에 있어주면서 말이다.  
학교 참관을 마치고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식사를 기다리면서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프랑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프랑스 아이들은 노트와 크레파스를 가지고 다니며 레스토랑에서 나눠주는 전시회 홍보 엽서나 냅킨 등에 그림을 그린다. 아마 우리나라였다면 크레파스가 아닌 스마트폰이 아이 손에 들려 있지 않았을까. 프랑스 아이들도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조용히 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쥐어주지는 않는다. 오늘은 아이에게 스마트폰 기기 대신에 크레파스를 쥐어주는 것은 어떨까. 미술교육은 멀리 있지 않다. 




신유미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프랑스로 갔고, 2013년부터는 프랑스 미술교육 프로그램인 ‘쥬트’를 한국에 론칭했다. 저서 <프랑스 아이는 말보다 그림을 먼저 배운다>에서는 프랑스의 교육기관과 여섯 가정을 관찰하며 알게 된 프랑스 교육 노하우를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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