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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폴라리스 Oct 12. 2016

슬로 육아, 아이 내면의 뿌리가 깊어진다

월간 폴라리스 1월호 '아이의 마음'

글 윤영희  
에디터 한순호  
포토그래퍼 강봉형
일러스트레이터 서윤정

“하루에 2시간 만이라도 아이에게 낮잠 혹은 천천히 지낼 수 있는 시간을 줘요. 안 그러면 주말에 열이 나니까.” 육아 예능 프로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추사랑네 엄마가 한 말이다. 이제 겨우 두 돌이 될까 말까 한 아이를 2박 3일 동안 남편에게 맡기며 일본인 엄마 야노 시호는 진지하게 부탁한다. 이 말에서도 잘 드러나듯, 아이의 삶에는 활발한 활동과 자극만큼이나 고요하게 천천히 흐르는 시간과 여유가 꼭 필요하다는 인식이 일본 사회에는 전반적으로 깔려 있다. 영유아기의 어린 아이들에게 그런 여유를 주지 않으면 몸과 마음의 건강에 금방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나는 한국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일본에서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하나씩 하나씩 키우는 걸 미덕으로 삼는 일본 육아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지만, 사실 그전부터 아이가 지닌 고유한 성향과 재능이 채 드러나기도 전에 학습에만 올인하게 하는 한국식 교육에 회의를 많이 느껴왔다. 적어도 영유아기만큼은 따뜻하고 안락한 가정 분위기 속에서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기르고 자연 속에서 충분히 뛰어놀며 자란 두 아이가 올해로 초등 6학년과 1학년이다. 초등교육의 시작과 끝 시기를 보내고 있는 두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키워온 보람을 느낀다. 
 



일본의 육아 문화는 여전히 아날로그, 슬로 육아다


디지털 문화가 발전하면서 아날로그 문화가 거의 자취를 감춘 한국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디지털은 디지털대로, 아날로그는 아날로그대로 일상 속에 녹아 있다. 조금씩 과거의 물건이 돼 사라져 가는 것들도 많지만 가정집, 사무실, 동네 가게에서 팩스나 주판 같은 아날로그스러운 물건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육아 문화는 여전히 아날로그, 슬로 육아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다니며 쓰는 가방이나 소품을 모두 엄마가 만들어주는 초아날로그적인 문화도 여전히 남아 있으며, 아이들은 유치원과 학교에서 돌아오면 밖에서 꼬박 두세 시간을 놀고 들어온다. 큰아이가 워낙 물을 좋아해서 만 네 살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수영교실을 다녔는데, 자유형부터 접영까지 네 가지 유형 테스트에 합격하는데 꼬빡 5년이 걸렸다. 이렇게 더딘 속도를 못마땅해하는 일본 엄마들도 있기는 하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된 유영법을 완벽하게 익히지 않으면 안 배우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다. 많은 양의 지식과 경험을 아이에게 퍼붓듯 제공하는 것보다 생활 습관이든 학습적인 것이든 쉬운 것부터 하나씩,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아이 스스로 배워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일본 육아의 일반적인 분위기다. 
 

천천히, 무조건 느긋하게 키우는 것만이 좋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아이에게 꼭 맞는 육아와 교육 방법은 사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아이가 가진 성향을 제대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깨닫게 되는 부분이 많다. 젖이나 분유를 떼고, 기저귀를 떼고, 안정적인 수면 습관이 형성되는 과정은 아이 개개인 모두가 다르다. 그 아이만이 보여주는 고유한 발달과정을 부모가 섬세하게 관찰하다 보면, 앞으로 어떻게 키워야 할지에 대한 감을 잡기가 훨씬 쉬워진다. 육아 책에 쓰인 말이나 다른 집 아이들의 발달과 비교하는데 쓰는 에너지를 ‘우리 아이’에게 좀 더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본에서도 대략 시기가 정해져 있긴 하지만 육아를 하는 엄마들마다 양육 방식이 제각각이다. 빨리 떼는 아이들도 있고, 만 세 돌 이후에도 기저귀를 못 떼서 유치원 입학식 때 기저귀를 찬 채 참석하는 아이들도 있다. 한국 같으면 당사자보다 주변에서 더 야단일 텐데 일본은 특별히 예외만 아니면 괜찮다, 천천히 해, 이런 분위기여서 크게 서두르지 않는다. 일본에도 아이가 어릴 때부터 교육열에 불타는 엄마들이 분명히 있지만, 한국과 다르게 그런 엄마가 주변에 있어도 크게 신경 쓰거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여기 사는 한국 엄마들도 주변과 비교당하거나 눈치 보지 않고 아이들을 교육할 수 있어 비교적 스트레스가 적다고 입을 모은다. 
 


결혼 전에 배낭여행을 오래 했었다. 유명한 관광지보다는 남들이 잘 가지 않는 아기자기한 소도시와 마을 여행을 즐겨 했다. 여행 책자나 정보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세상의 작은 아름다움들을 하나씩 발견해가는 기쁨이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삶에 영감을 주고 있다. 이런 나만의 여행법처럼, 육아도 그렇게 해 온 것 같다. 남들이 학원 언제 보낼까 고민할 때, 아이와 부엌에서 함께 요리하고 그림책을 읽으며 유아기를 보냈고 자연과 좀 더 가까이 살고 싶어 아파트에서 단독주택으로 이사하고, 지금은 아이들과 텃밭 농사까지 짓고 있다. 그렇게 슬로 육아로 자란 큰아이가 올해 6학년 1학기를 마치고 받아온 성적표에는 담임선생님의 이런 평가가 쓰여 있었다. 
“내면의 뿌리가 깊은 아이입니다. 주위 분위기에 좌우되지 않고 목표를 향해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아이들이 뭔가를 3개월, 6개월 먼저 이뤄냈다고 해서 
그 아이의 앞으로 60년에 엄청난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그동안 ‘천천히 흐르는 시간’의 중요함을 무시해 온 탓에 큰 열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몇 개월 단위에 집착하지 않고 한 인간이 살아가야 할 전체 시간의 흐름 위에 현재의 시간을 얹어 생각해보는 여유가 필요하다. 적어도 영유아기만큼은 충분히 그럴 수 있고, 그래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세상에 태어난 지 겨우 2, 3년밖에 안 되는 아이들이 뭔가를 3개월, 6개월 먼저 이뤄냈다고 해서 그 아이의 앞으로 60년에 엄청난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겨우 몇 개월의 차이가 날 뿐, 비슷한 시기에 유아기의 과업을 순조롭게 달성한다. 
 
아이 내면의 뿌리, 마음의 뿌리를 먼저 깊게 만들어야 건강한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울 수 있다. 유아기 아이들에게 천천히 흐르는 시간이 꼭 필요한 이유다. 


윤영희

어린이 독서교육과 배낭여행에 빠져 지내다 여행길에 만난 일본인 남편과 결혼해 현재 도쿄 근교에서 아들 딸 남매를 키우며, 일본식 아날로그 육아법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생한 경험을 전하고 있다.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 육아>의 저자이기도 하다.




행복을 키우는 영유아 교육라이프 매거진 <폴라리스>는 매월 한가지 주제만 심층적으로 다루되, 확장성을 가지고 다양한 관점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폴라리스>는 앞서가는 부모를 위한 영유아 교육 지침서 역할과 교육의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는 교육 전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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