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11 : 집으로

발자크의 소설과 함께 여행하다

by 스프링버드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짐을 꾸려 마르세유 공항으로 향합니다. 며칠간 우리의 발이 되어주었던 렌터카를 공항 주차장에 반납합니다. 유료도로 톨게이트에서 카드가 안 돼 후진을 했던 일, 다람쥐 쳇바퀴 돌듯 같은 길을 돌고 돌았던 일, 주유소에서 돈 내는 방식이 생소해서 우왕좌왕했던 일... 난감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우리와 며칠을 동고동락했던 차를 반납하려니 괜스레 서운하네요. 낯선 나라에서 운전을 한다는 건 매일이 도장 깨기였습니다.


수하물을 부치고 탑승 수속을 하려고 줄을 섰습니다. 죄다 파리드골 공항으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카운터에서 한 가족이 한참 시간을 끄네요. 문제가 생겼나 봅니다. 눈 둘 곳이 별로 없으니 그 가족을 자꾸 보게 되는군요. 수속을 마치고 나오는데 그 가족이 다시 보입니다. 딸이 엄마를 꼭 안더니 다시 아빠를 꼭 안습니다. 이혼한 부분가, 엄마나 아빠를 보내는가 보네, 헤어지기 서운해서 저러는구나, 남동생이 둘이나 있네, 아이들은 누구랑 사나... 혼자서 별별 상상을 합니다.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라운지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남프랑스의 강렬한 햇살을 맞고 자란 과일을 놓고 마지막 만찬을 즐깁니다. 납작 복숭아 두 개, 서양배 두 개, 체리 한 봉지. 단물이 입안 가득 퍼집니다. 햇살의 맛이란 게 있다면 이런 맛이 아닐까요?


탑승 시간이 되어 보안검색대로 가니 아까의 딸이 내 앞줄에 서있네요. 내내 전화기를 붙들고 통화를 합니다. 아하, 딸이 떠나는 거였구나. 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딸은 아마도 처음으로 독립을 하는가 봐요. 그래서 그렇게 애틋하게 엄마를 껴안고 아빠를 껴안았던 거겠지요.


에어프랑스를 타고 마르세유 공항에서 파리드골 공항으로 이동한 뒤에 마침내 대한항공 비행기에 탑승하니 이제 정말로 안심이 됩니다. 파리드골 공항에서 지체가 되어 비행기를 놓칠까 봐 마지막까지 마음을 졸였거든요. 창가 좌석, 승객들의 부산함, 비닐봉지 바스락대는 소리, 안전벨트가 딸깍 걸리는 소리, 활짝 웃는 승무원들, 그리고 익숙한 한국어. 이제 진짜 돌아가는 시간이 됐습니다.


비행기가 굉음을 내며 하늘로 떠오르고 나는 책을 꺼냅니다. 총 4장 중 못 읽은 마지막 장의 제목은 <<아버지의 죽음>>. 그러고 보니 <<고리오 영감의 죽음>>이 아니라 <<아버지의 죽음>>이네요. 발자크가 이 단어로 전달하고 싶었던 속뜻을 알 것 같습니다. 마르세유 공항에서 딸을 꼭 껴안던 남자는 폴도 앙드레도 자크도 아닌 딸의 '아빠' 아니겠어요.


발자크는 고리오 영감을 바람직한 아버지로 그리지 않습니다. 두 딸도 그렇고요. 저자는 가장 근본적인 관계가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췄지요. 돈과 집착 그리고 어리석음이 어떤 비극을 빚어낼 수 있는가를요. 고리오 영감은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그녀가 남긴 두 딸을 목숨처럼 사랑한 아버지, 아낌없이 주는 아버지였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부모를 꿈꿉니다. 그런데 도대체 뭐가 잘못이라는 거지요? 다 주는 아버지라면 이상적이지 않을까요?


고리오 영감은 국수제조업자로 엄청난 재산을 모았고 두 딸을 애지중지 키워서 백작과 자작 집안에 결혼시킵니다. 많은 지참금을 딸들에게 주었지요. 하지만 사위들은 장인을 싫어합니다. 여기에는 당시 시대적 상황도 한몫을 합니다. 왕당파와 혁명파가 엎치락뒤치락하며 정권이 거듭 바뀌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사람들의 가치관은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었지요. 큰 사위는 전형적인 귀족 계급이었고 작은 사위는 급부상하는 부르주아 은행가였습니다. 고리오 영감은 돈은 많으나 아무 배경 없는 소시민에 불과했고요. 두 딸은 아버지와 남편을 어떻게든 어울리게 해보려고 했지만 실패합니다.


영감은 두 딸과 살지 못하고 보케 부인의 하숙집으로 들어갑니다. 그때는 아직도 수중에 남은 돈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딸들의 사치는 도를 넘어 아버지에게 계속 손을 벌립니다. 딸들을 만나는 일도 어려워서 영감은 그들이 파티와 극장으로 가는 길목에서 기다립니다. 먼발치에서나마 딸들을 보려고요. 그들은 몸치장을 하고 애인에게 돈을 쏟아부으며 사랑을 지키느라 바빠서 아버지를 볼 틈이 없는데 말이지요. 야심가 청년 라스티냐크가 둘째 딸과 좋아하는 사이가 되자 영감은 뛸 듯이 기뻐하며 묻습니다. 딸아이가 나에 대해서 무슨 소리를 하더냐고요. 청년은 "따님이 진심 어린 입맞춤을 보낸다고 하더군요." 하고 말해줍니다. 하지만 거짓말이었지요.


영감은 돈 때문이라도 딸들이 자신을 찾아주기를 원하지만 상황은 점점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큰딸은 변심한 애인의 마음을 돌리려고 엄청난 빚을 지고 남편 집안의 귀한 다이아몬드까지 내다 파는 지경이 됩니다. 그 딸을 위해 영감은 가진 돈을 다 끌어다 씁니다. 또 작은 딸과 라스티냐크의 사랑을 지켜주기 위해서 자신의 연금을 청년의 아파트를 마련하는 데 써버립니다. 이제 고리오는 빈털터리가 됐습니다. 하지만 두 딸 앞에는 불행한 미래만 기다리고 있을 뿐. 아버지는 절규합니다.


내 천사들아, 왜 너희의 결혼 생활이 이리도 불행해야 하지?


고리오 영감은 방을 덥힐 장작조차 사지 못한 채 쓰러져 누웠는데 두 딸은 제 앞가림에 바빠서 아버지의 임종 자리에도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리오 영감은 진정으로 딸들을 사랑했던 것일까요? 혼미한 정신에서 터져 나오는 헛소리 속에 고리오 영감의 진심이 드러납니다. 그의 무의식은 진실을 알고 있었지요.


딸애들은 둘 다 목석같은 마음을 가졌어. 내가 그 애들을 너무 사랑해서 애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야. 아버지란 항상 부자라야 되고, 자식들은 말처럼 굴레를 씌워서 꽉 잡고 있어야 하는 건데. 나는 딸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으니... 한심한 것들! 10년 전부터 딸들은 나에게 못되게 굴면서도 아주 당당했어... 내 딸들, 그건 내가 끊지 못하는 악덕이었어. 그 애들은 내 애인이었고, 한마디로 전부였지... 딸들의 무질서한 삶은 바로 내가 빚어낸 일이야. 내가 딸들을 망쳐 놨으니까. 딸들은 옛날에 사탕을 원했듯이 지금은 쾌락을 원해...


공항에서 보았던 포옹을 떠올립니다. 몸으로 표현하는 사랑. 사랑은 참 간단한 것 같습니다. 상대를 따뜻하게 안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 단순한 것을 우리는 평생 배워야 합니다. 너무 꼭 안지도 말고 너무 덜 안지도 말고 딱 적당히 안는 그 방법을 말이지요.


발자크는 사실주의 작가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사실주의 소설이 싫고 읽기 힘들었습니다. 현실이 이미 끔찍한데 소설 속에서 또 그런 현실을 봐야 한다는 건 고문 같았지요. 사실주의는 위안도 해답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젊은 나는 혼란스러운 현실을 담아줄 큰 그릇, 이왕이면 둥글고 부드러운 그릇을 원했습니다. 암흑 속에서 방향을 잡아줄 불빛, 차가운 현실의 바닥에 깔아줄 따뜻한 위안을요. 하지만 이제 사실주의 소설도 읽어냅니다. 내공이 생겨서일까요, 둔감해진 걸까요.


분명한 건, 내 안에서 냉정한 현실 인식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들린다는 사실입니다. 주관과 객관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보라, 목소리가 말합니다. 인내하라, 너 자신이 부드럽고 둥근 큰 그릇이 되어 현실을 담아내라, 하고요.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 속에서 사람들은 참 냉정하더군요. 보케 부인은 고리오 영감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그에게 입혀줄 깨끗한 셔츠와 침대에 깔 깨끗한 시트를 내어주는 것도 아까워합니다.


일곱 번 뒤집어서 쓴 시트로 갖다 줘. 아무렴. 그것도 죽은 사람용으로야 황송하지 뭐.


하숙인들은 위층에서 사람이 죽어가는데 그 사람을 놓고 말장난이나 하고 있고요.


화가가 말했다. "그래 어때, 저 위층에서는 이제 '시체라마'를 보게 될 것 같은데?"
"샤를, 농담을 하려거든 좀 덜 침울한 주제를 갖고 하는 게 좋겠는데 말이야."
"그럼 이제 이 집에선 웃지도 못하는 건가?"
화가가 말을 이었다.
"비앙숑 말로는 영감이 이제 의식도 없다고 하던데 뭐 어때?"
"그래요, 살아왔던 대로 죽을 테지요."
박물관 직원도 말을 받았다.


사실적으로 묘사된 현실을 보아낼 수 있을 때 우리는 다른 선택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현실과 다른 현실, 이 행동과는 다른 행동, 이 길이 아닌 다른 길을 말이지요. 여행을 통해서 내가 노는 물이 전부가 아닌 것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그들의 삶이 수많은 삶의 형태 중 하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주의 문학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정확하게 그려서 현실의 모순을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바라는' 현실이 아니라 '지금의' 현실이지요. 소설은 애당초 허구인데 사실주의 문학이 추구하는 객관적 사실 묘사가 문학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비판이 나올 수 있습니다. 나는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기술해도 소설 속 세계는 가공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허구의 인물들이 허구의 시공간 속에서 허구의 사건을 놓고 갈등합니다. 신문 기사로는 절대 지을 수 없는 허구적 건축입니다. 내 생각에, 사실주의 문학의 가치는 현실을 얼마나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인물들을 얼마나 전형적으로 그려내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읽어내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결국 소설은 독자에게 와서 완성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가장 좋은 독법은 다음의 질문으로 끝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인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훅 끼치는 습한 공기가 딱 한국이군요. 비행기에서 내리며 나의 여행은 끝났습니다. 책장을 덮으며 책 속의 여행도 끝이 났습니다. 다시 일상입니다. 이제 진정으로 사실주의적으로 살아야 할 시간. 네, 이제 질문에 대한 답을 할 때입니다.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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