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크의 소설과 함께 여행하다
이번 여름, 프랑스의 몇 개 도시를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파리에서 기차로 한 시간 반 가량 떨어진 투르와 포도주 생산지로 유명한 보르도, 프랑스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마르세유 그리고 그 주변의 소도시 아비뇽과 엑상프로방스 등입니다. 가끔 외국으로 여행할 기회가 생길 때면 그곳과 관련된 소설을 한 권 들고 가는데 이번에 고른 책은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입니다. 투르가 발자크의 고향이거든요.
발자크.
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해서 그의 이름은 익숙합니다. 하지만 작품을 읽어보지는 않았습니다. 불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가인데도 말이지요. 수업 시간에 이름을 들은 기억만 나네요. 네, 맞습니다. 저는 불성실한 학생이었습니다.
발자크는 엄청난 다작을 한 작가입니다. <인간 희극>이라는 연작 소설에 90편이 넘는 소설을 담아냈다니 놀랍습니다. 하루에 열 시간 이상 글을 썼다고 해요. 줄 커피를 마시며 밤을 새워 글을 쓰도록 작가를 추동했던 동력은 두 가지로 짐작됩니다. 자신의 세계관을 소설로 구축하겠다는 작가적 야심과 빚입니다. 지극히 정신적인 동력과 지극히 현실적인 동력입니다. 둘 중 어떤 게 더 다급했을까요? 작가의 사정은 알 수 없는 일. 상상해 보기로는, 비등했을 것 같습니다. 세상일의 많은 것들이 정신적 이유와 현실적 이유가 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마차가 두 개 바퀴로 달리듯이 작가는 정신적 동력과 현실적 동력을 두 바퀴로 삼아 달렸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자정부터 시작해서 꼬박 밤을 새워서 글을 썼고 아침부터 오후 5시까지 원고를 수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녁에 잠깐 수면을 취하면 자정이 됩니다.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는 작업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는 51세로 세상을 떠납니다. 아직도 젊은 나이였는데요. 이런 삶을 일컬어 '목숨을 바쳐 글을 썼다'고 해야 할까요. 이렇게 열심히 쓴 책들 가운데 <고리오 영감>이 있습니다.
여행의 시작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누구는 여행할 생각을 떠올린 순간부터, 또 누구는 서점에서 여행 안내서를 고르고 여행 계획을 짜는 데서부터 여행을 시작합니다. 짐을 싸면서, 비행기 표를 예매하면서 시작되는 여행도 있습니다. 여행은 목적지로 향하는 물리적 시간에 맞춰지는 게 아니니까요. 제 여행은 공항에서 시작됩니다. 여행을 가기는 가는 건가, 무덤덤한 마음이 공항 로비에 앉아서 활주로를 내려다보는 순간, 설레기 시작합니다.
비행기를 탑니다. 창가 좌석입니다. 타원형 동그란 창문 밖으로 활주로를 내려다봅니다. 장난감 같은 네모난 공항 정비차량들이 활주로를 달립니다. 승객들이 짐칸에 가방을 올리고, 항공사에서 제공한 물병이며 담요며 일회용 칫솔 같은 물건들을 정리하느라 주변이 부산합니다. 바스락대는 비닐봉지, 안전벨트가 딸깍 걸리는 소리, 승무원들의 화사한 미소, 전형적인 기내의 냄새. 여행은 오감으로 전해집니다. 파리행 비행기임을 알지만 어쩐지 전혀 모르는 세계를 향해 떠나는 것만 같습니다. 우주여행이라도 가는 것처럼 마음이 들뜹니다.
비행기가 천천히 활주로를 달리더니 드디어 소리도 요란하게 비상합니다. 가방에서 <고리오 영감>을 꺼냅니다. 겉표지를 벗겨내 파란색 하드커버가 예쁘게 드러난 자그마한 책입니다. 손에 딱 맞게 들어옵니다.
비행기는 하늘을 날아가고, 책장도 넘어갑니다. 낯선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러고 보니 여행은 떠나는 게 아니라 들어가는 것이군요. 익숙한 세계에서 낯선 세계로 말이지요.
* 이하 글에서 인용하는 소설 본문은 <고리오 영감>, 임희근 옮김, 열린책들, 2022년 10쇄본입니다. 옮긴이의 글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문장을 약간 수정한 부분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