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다는 행위는 단지 내 바깥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이상이다. '보이다'와 '보다'라는 말로 수동성과 능동성을 구분하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본다는 건 의지나 의도와 연결되어 있다. 마치 우연처럼 무언가를 보게 될 때도 있다. 어쩌다 보니 내가 그 자리, 그 시간에 있어서 목격하는 어떤 사건처럼. 그 광경은 내 시야에 일방적으로 밀고 들어온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도 나의 눈길은 알게 모르게 궁극적으로는 내 의지와 선택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어느 날 나는 전철역에서 집으로 가는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옆으로는 육 차선 도로가 달리고 시각은 해가 지고 어두워진 여덟 시나 아홉 시 무렵 혹은 더 늦었을지 모른다. 그 당시 나는 마음이 무거웠고 길은 오르막이라 시선이 자연히 아래로 향했다. 그런데 문득 길에서 빛나는 별들이 보였다. 반짝거리는 작은 빛들. 마치 밤하늘의 별들처럼 무수히 작게 반짝이는 무리들. 온통 별밭이었다. 그것들은 보도블록에 들어간 작은 규사 입자가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내 발걸음의 속도에 맞춰 반짝였을 뿐인데, 정확한 이성적 사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마음은 그것을 별처럼 느꼈다. 그래서 위로가 되었나? 그렇진 않았던 것 같다. 다만 시 같은 한 구절이 마음을 스쳤다. 밤길이 밤하늘처럼 별로 반짝이는구나, 하고
그때 우연히 내가 거기 그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에 별을 보았다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나는 마음이 괴로웠고 그런 사람이 흔히 그러듯 종종 시선을 하늘로 올리거나 바닥으로 내렸다. 희망 같은 걸 찾아서 하늘을 쳐다보고, 세상 모든 걸 부정하고 싶어서 땅바닥만 쳐다봤다. 그런데 그날 밤, 묘하게도 그 두 개의 시선이 만났다. 길바닥에서 반짝이는 하늘의 별로. 그것은 우연일 수도 있지만 내 의지가 내 시선을 이끌어서 만들어낸 필연적 풍경이기도 하다. 내가 간절히 무언가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내 눈에 들어온 풍경.
이 그림책의 작가도 걷다가 사슴을 발견했다. 삭막한 도심의 길을 걸어가다가 보도블록만 깔려있는 길바닥에서 사슴이 나타난 것이다. 그이는 평소에도 천천히 걸으며 길에서 작고 사소한 것들을 발견하는 일을 재미있게 느끼던 사람이었다.
사슴은 규칙 없이 제멋대로 끼어드는 낡고 깨진 보도블록들이 산책자의 시선에서-만들어졌다기보다-발견되었다. 그이는 마침 화가여서 길에서 만나는 형상들에 상상을 보태어 이야기가 풍부한 이 그림책을 탄생시켰다. 유심히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작고 하찮은 것들에 시선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일상의 사소한 풍경에서 이야기를 읽어낼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작가는 사슴도 꽃 악어도 보지 못했으리라. 그러니 그이의 시선이 포착하는 존재와 풍경과 사물은 모두 의지의 결과이며, 그이의 눈에 저절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그가 보려고 의도했기 때문에 보이게 된 것이다.
여기의 시인도 보는 사람이다. 이른 아침에 분홍빛이 살짝 감도는 해끄무레한 초승달이 하늘에 떠 있고 시인은 교회의 뾰족한 첨탑 아래 서 있다. 하늘은 터키석처럼 푸르고 교회 석조 건물은 위압적이며 교회 지붕의 색깔은 선명한 주황과 파랑이어서 달빛은 유심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도 않았으리라.
홀로 있는 제자에게
내 사랑, 보라
달의
하야스름한 분홍빛 대신
그것이
뾰족한 교회 첨탑 위로
비스듬히 떠 있음을.
잘 보라
하늘이
푸른 터키석처럼
부드럽다는 것 대신
지금이 이른 아침임을.
유심히 보라
첨탑의 검은 선들이
뾰족한 정점으로
어떻게 모여드는지를 ―
자세히 보라
정점의 작은 장식물이
그것들을 멈춰 세우려
얼마나 애쓰는지를 ―
저 봐, 놓쳤어!
저 봐
정점으로 모여든
육각형 첨탑의 선들이
꽃을 감싼
꽃받침 위쪽으로
벗어나는 것을!
멀어지며, 벌어지는 것을!
잘 보라
베어 먹힌 달이
미동도 없이
선들 안에서 보호받는 모습을.
그래 맞아,
아침의 여린 색조 속에
갈색 돌과 슬레이트 지붕은
주황과 짙은 파랑으로 환하게 빛나지.
그러나 잘 보라
땅딸막한 건물의
짓누르는 무게를!
잘 보라
달의
재스민꽃 가벼움을.
육중해서 공격적이기까지 한 교회 건물 앞에서 시인은 달을 보고 베어 먹힌 존재를 연상한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정신이란 사실을 시인은 상기하며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자 한다. 그러자 내 사랑 하고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고 보라, 잘 보라, 유심히 보라 한다. 교회의 육각형 첨탑의 직선들이 지상을 벗어나 하늘로 가뿐하게 날아올라 베어 먹힌 달을 얼마나 잘 보호하고 있는지를 보라고.
시인은 화려하고 강렬한 지상의 색들 속에서 하야스름한 달을 보고, 지상의 짓누르는 무게와 대비되는 달의 향기로운 가벼움을 보고, 베어 먹힌 달처럼 여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끝없이 베푸는 둥글고 둥근 사랑을 본다. 초승달이 지상의 고통받는 이들 같다고 생각하는 시인은 의지적으로 이 모든 풍경을 본다. 육각형 첨탑의 선들이 하늘로 비상하며 달을 감싸고 있는 풍경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
젊은이가 있다. 이름은 양. 그는 한 부부가 입양한 중국인 어린 딸을 돌보는데, 아이에게 중국 문화를 가르치며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구축하도록 돕는 게 그의 주된 일이다. 아이의 아빠 제이크는 잎차 가게를 운영하는 백인이고 아이의 엄마는 흑인 여성인데 회사의 중견 간부인 듯하다. 부부는 각자 자신의 정체성-차를 사랑하는 사람, 아프리카인-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당연히 아이도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갖기를 바라서 양을 샀다. 그렇다. 그들은 양을 샀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는 시대는 안드로이드 인간이 보편화된 미래 사회이기 때문이다. 양은 돌봄과 문화에 특화된 테크노로서, 중국인으로 프로그래밍된 안드로이드 인간이다. 영화 초반에서 양은 과부하가 걸려 작동이 정지된다. 영화는 존재하기를 그친 양의 이전 시간을 추적하는 이야기다.
여자아이 미카는 양 오빠의 고장을 죽음과 상실로 받아들이고 슬퍼하지만 부부는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 양을 그저 기계였을 뿐이다. 하지만 딸이 슬퍼하는 모습과 양의 부재로 인해서 부모로서의 역할에 시간적 심리적 어려움을 겪으며 그들은 서서히 양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된다. 양이 했던 행동, 양과 나눴던 대화를 그들은 돌아본다. 가족사진을 찍으며 양이 잠시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던 특별한 순간 같은 것, 잎차에 대한 정보와 잎차에 대한 사랑의 차이를 은연중에 구분시킨 어느 날의 대화 같은 것들을.
제이크는 양을 고쳐보려고 예전의 구매처를 찾아갔다가 여러 과정을 거쳐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데, 양 같은 테크노 사피엔스에게 기억장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양은 기억장치로 매일 몇 초씩 녹화를 했다. 제이크는 양이 기록한 영상들을 들여다본다. 알고 보니 양에게는 제이크가 모르던 과거가 있었다. 양은 리퍼 제품이었는데 판매자가 양을 완전히 초기화하지 않아서 양의 기억장치에 그가 살았던 지난 시간들이 그대로 저장돼 있었던 것이다. 그는 두 가정에서 이미 사용된 적이 있고 그곳에서도 그는 매일 녹화를 했다. 그는 어떤 순간들을 선택했을까?
어른거리는 빛 그림자, 어린 남자아이, 번민하는 아이의 뒷모습, 아들을 독립시킨 뒤 홀로 남아 우는 엄마, 늙은 여인을 돌보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슬퍼하며 나무 아래 놓아둔 꽃다발 같은 것들... 그 순간들은 특별할 게 없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순간들, 평범한 일상의 순간들이었다.
양의 영상들을 보고 있으면 그가 경험했던 세 가정에서의 시간이 하나의 삶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세 번의 삶을 살았다. 그가 녹화한 순간들을 단순히 기록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까닭은 그 안에 마음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는 따뜻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양은 아름다운 순간들, 소중한 사람들의 모습을 녹화했다. 생의 찬란함, 근원적인 가치, 가슴을 누르는 묵직한 뭉클함의 편린들이 그의 기억장치 속에 저장돼 있었다. 그러니 그것들은 기록이 아니라 기억이다.
양의 기억장치에 기록된 한 영상에는 양이 만나던 안드로이드 여자 에이다가 펍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I want to be... 테크노인 양은 인간이 되고 싶어 했는지 제이크가 에이다에게 물었고 에이다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그건 너무 인간다운 질문이며 모든 존재가 인간을 동경한다는 건 착각이라고 덧붙이며.
인간과 테크노를 넘어서 우리가 되고 싶은 것은 무얼까? 영화를 보면서 나는 우리가 눈에 담는 것들, 마음에 기록하고 싶은 것들, 그 순간들의 합이 하나의 생을 구성한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유심히 보는 것들이 결국 나의 한 생을 이루고, 그 안에 내가 되고자 하는 모습이 있다.
영화 말미에서 어린 딸 미카는 양에게 배웠다고 하면서 이 노래의 다음 구절을 이어서 부른다. 거기에는 양이란 존재를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이 들어있었다. 나는 단순하고 조화로운 멜로디가 되고 싶어. 나는 하늘이 되어 또 다른 곳으로 아주 멀리 날아가고 싶어. 나는 바람이 되어 넓은 공간에서 흐르고 싶어. 나는 바다가 되어 물속에서 편안하게 흔들거리고 싶어. 나는 모든 것에서 멀어지고 또한 동시에 모든 존재가 되고 싶어.
본다는 것. 그것은 내 시선을 내가 원하는 곳에 둔다는 것이다. 내 눈을 통해 그 순간을 내 마음속에 들이는 것이다. 마치 양의 기억장치처럼 순간들은 내 존재 안에 기억되어 나의 생을 이룬다. 내가 보는 것이 내 생의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내 생의 중요한 일부를 이룬다. 내가 보는 것에 내 마음이 있다. 내 마음이 내가 보는 것에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V_R2mwrQ_w
참고 자료
걷다 보면, 이윤희 글/그림, 글로연, 2021.
꽃의 연약함이 공간을 관통한다,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정은귀 옮김, 민음사, 2021.
애프터 양, 코고나다 감독,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