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찌질남이라고 욕하지 마라 그는 성장 중이니까! <리빙보이 인 뉴욕
마크 웹의 전작 <500일의 썸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다름 아님 영화가 제대로 시작되기 전, 그것도 오프닝도 전에 나오는 이 문구이다.
The following is a work of fiction. Any resemblance to persons living or dead is purely coincidental. Especially you Jenny Beckman. Bitxx.
이 작품은 허구입니다. 살아있거나 죽은 누군가와 유사점이 보이더라도 우연의 일치입니다.
특히 너, 제니 벡맨. 나쁜 X.
이 문구를 너무 좋아한다. 그야말로 찌질남의 '정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진짜로 톰이 어디에 있을 것만 같고 마크 웹이 '제니 백맨'이라는 전 여친을 겨냥해 만든 영화처럼 느껴진다. 어떤 블로그에서 실제로 마크 웹 감독이 저 이름을 가진 여자를 만난 적 있었고 그 여자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줬는데 톰을 보고 순정남이라고 좋아했다고 한다. 사실 이 이야기를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마크 웹 감독이 여태껏 만난 전 여친의 모습을 모두 썸머에 반영했다고 100% 확신한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영화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마크 웹 감독에 대한 기대가 컸다. 완벽한 '연애 공감 백서'를 연출한 사람이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지 기대를 했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나 어메이징 메리 모두 화려한 성공을 거두진 않았지만 나름 좋았다. 그의 영화를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담백하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가볍지도, 지나치게 무겁지도 않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좋아한다.
그렇게 마크 웹은 돌고 돌아 다시 찌질남 혹은 평범남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 영화는 <500일의 썸머>와는 다르다. 로맨스 영화로 포장한 20대 청년의 성장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리빙보이 인 뉴욕> 속 주인공들은 그들의 삶에 무언가 하나씩 빠져있다. 주인공 토마스에게는 활력이, 이웃집 아저씨 제랄드에게는 그의 친 자식이, 그리고 나머지 조한나, 에단, 주디스에게는 모두 숨겨진 진실한 사랑이 빠져있다. 무언가의 부재가 눈에 띄게 그들을 자극하진 않지만 그들의 삶을 점차 황폐하게 만든다. 이렇게 나사가 빠진 듯한, 하지만 억지로라도 살아가야 하는 그들의 삶은 무엇이든지 일어날 수 있고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는 뉴욕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나와 같은 이방인에게 뉴욕은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가고 언제나 노란색 택시가 빵빵 거리고 타임스퀘어엔 사람이 가득한, 꽉꽉 차 있는 도시처럼 느껴지지만 그들에게는 아니다. 그렇기에 주인공 토마스는 뉴욕이 '영혼을 잃은 도시'라고 이야기한다.
항상 무언가 빠져있는 삶 속에서 토마스는 그의 삶의 의미를 두 가지에서 찾는다. 바로 글과 사랑이다. 출판사 업계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따라 어렸을 때부터 글을 쓰고 싶어 했던 토마스는 자신이 쓴 글을 아버지에게 보여주자 '봐줄 만하네'라는 말을 듣는다.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썸녀 미미는 사실 남자친구가 있었고 그녀는 그와 그 이상의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 두 가지 수단을 잃음으로써 자신의 삶에 활력을 잃은 토마스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도시 뉴욕에서 방황하고 또 방황한다. 하지만 결말 속 토마스의 얼굴을 활기가 넘친다. 마지막에는 글과 사랑, 모두 잡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을 피해 뉴욕 언저리에 사는 토마스의 옆집으로 아저씨가 이사를 온다. 첫 만남부터 마치 토마스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그의 마음을 꿰뚫고 있던 남자는 시도 때도 없이 토마스의 고민을 상담해준다. 썸녀 미미의 문제부터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자신의 글쓰기 재능까지. 만난 지 불과 몇 달 되지 않은 제랄드는 토마스의 삶을 온전히 이해해주고 조금씩 그에게 글을 쓸 수 있다는 응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따분하고 지루한 삶을 살던 토마스는 자신의 아버지 에단이 엄마를 두고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게다가 그 여자는 엄청나게 아름답다. 애써 부정하던 토마스는 결국 아버지의 내연녀 조한나에게 빠지게 되고 얽히고설킨 한 부자와 내연녀가 서로를 사랑하는 이상한 삼각관계가 생긴다. 평범하고 찌질한 남자 토마스가 점차 생기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조한나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한다. 서로 예의만 차리는 부모 아래에서 조심성 있게 자란 토마스는 격렬한 감정을 겪어보지 못했고 아름다움으로 무장한 조한나는 자신이 지금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격렬한 감정에 휩쓸려 자신도 모르게 토마스에게 다가간다.
언뜻 보면 막장 드라마 같다. 하지만 <리빙보이 인 뉴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한다. 로맨스를 빌렸을 뿐 토마스의 성장 이야기이다. 토마스가 자신이 잃어버린 글과 사랑을 되찾는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토마스가 찌질남의 정석을 벗어나지 않는다. 영화가 끝나도 그는 여전하다. 내가 가장 크게 웃었던 장면이 하나 있다.
토마스 : 조한나랑 잤어.
미미 : (빗 속으로 뛰어간다) 너랑은 이제 끝이야!
토마스 : (미미를 잡으며) 미안해.
그는 찌질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마크 웹이 벗어나지 못한 걸지도. 남자친구 닉과 헤어지고 겨우 마음을 돌린 미미에게 저런 말을 해버리다니. 게다가 비가 오는 와중 뛰어가는 미미를 잡으며 사과까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크게 웃어버렸다. 다행이다. 아직도 마크 웹이 찌질남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리빙보이 인 뉴욕>은 절대로 친절하지 않다. 러닝타임이 끝나고 나서도 무슨 영화인지 잘 모르겠고 곱씹어 봐도 마크 웹 감독이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토마스 웹'이라는 주인공을 빌려 이야기하는 걸지도 모른다. 심지어 주인공의 성도 웹이다. 마크 웹의 찌질남 스토리가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썸머랑 헤어지고 어텀을 만나 성장한 듯 보였지만 그는 여전히 찌질남이다. 완벽한 도시 뉴욕으로 이사와 새로운 여자를 만나보지만 쉽지는 않다. 게다가 짝사랑하는 여자는 남자친구가 있다.
모든 로맨스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은 완벽하다. <나의 소녀시대>처럼 여자가 필요할 때 짠하고 나타나 여자를 위로해 주는 남자도 있고 <귀여운 여인>처럼 여자가 갖고 싶어 하는 모든 옷을 사주는 남자도 있으며 <노트북>처럼 평생을 한 여자만 바라보는 남자도 있다. 하지만 현실 속 우리는 다르다. <500일의 썸머>처럼 썸머를 잊지 못해 고군분투하는 찌질한 남자가 있고 <어바웃 타임>처럼 시간을 돌려야만 여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찌질한 남자도 있으며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처럼 몇 년을 제대로 고백하지 못해 쩔쩔매는 찌질한 남자들도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찌질할 지도 모른다. <리빙보이 인 뉴욕>은 그런 우리들에게 '너만 그렇지 않다'라고 살포시 위로해주는 귀여운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