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고통의 순간이 필요한 것일까.
드라마 ‘무인도의 디바’ 7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무인도에서 살아 돌아온 서목하(박은빈)는 오랫동안 좋아했던 가수 윤란주(김효진)를 만난다. 톱스타였던 란주는 목하가 무인도에 있는 15년 동안 많이 달라져 있었다. 성대결절로 노래도 부르지 못하고 자신감도, 인기도, 의욕도 없는 가수가 되어있었다. 가수 지망생이었던 목하는 우연히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란주를 대신해서 노래를 부른다. 목하의 목소리 덕에 주목을 받은 란주는 다시 무대에 오르게 되고, 제2의 전성기를 맞는다.
여러 가지 일들이 겹치고 결국 진실이 밝혀진다. 란주는 지금까지 자신이 립싱크를 했다는 사실, 극찬받았던 목소리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목하의 목소리라는 사실을 방송에서 고백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처음에 란주는 거부한다. 목하에게 네가 나의 무대를 뺏으려는 것 아니냐며 화도 내본다. 하지만 이내 깨닫게 된다. 거짓말은 오래갈 수 없으며 자신 또한 처음에는 목하의 목소리에 감동받아 데뷔시키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란주는 방송을 앞두고 홀로 불 꺼진 분장실에 들어간다. 그리고 자신이 고백해야 하는 내용이 담긴 대본을 본다. 그 순간에 란주가 흘리던 눈물은 거짓말을 고백해야 하는 괴로움과 부끄러움의 눈물만은 아니었을 것 같다. 지금까지 란주가 외면해 왔던 모든 상황에 대한 눈물이었을 것이다. 성대결절 수술 이후 인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된 자신, 믿었던 소속사 대표에게 배신을 당하고 돈도 인기도 없는 가수가 된 현실, 거짓말로 무대에 서지 않으면 더 이상 빛날 수 없는 자신의 상황. 목하를 만나기 이전에 란주는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지도, 그렇다고 그런 상황을 바꾸어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매일 술과 담배로 현실을 잊기에 급급했다. 예전의 명성에 기대어 불려 간 작은 행사에서 생활비를 벌며 근근이 살아왔다. 란주는 불 꺼진 어두운 방 안, 복도 끝의 분장실에서야 지금까지 외면해 온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란주에게 무한한 응원을 주는 목하가 곁에 있어도, 우는 란주를 위해 분장실 앞을 지켜주는 옛 친구가 있다고 해도, 어두운 방 안에서 슬픔과 대면해야 하는 사람은 란주 자신뿐이다. ‘지금까지 저는 남의 목소리로 무대에 올랐습니다.’라는 대본을 읽으며 거울을 바라보는 란주는 모습이 인상 깊었던 이유는 거기에 있다. 결국 그 순간에 깊고 차가운 어둠과 마주해야 하는 사람은 혼자뿐이라는 것. 그리고 또 하나, 아무리 괴로워도 그 어둡고 끔찍한 순간을 대면하지 않고는 결코 삶의 다음 지점으로 건너갈 수 없다는 것.
란주는 무대에 올라 립싱크 사실을 고백한다. 목하는 란주의 목소리가 아닌 ‘서목하’로 무대에 오른다. 멋지게 노래 부르는 목하를 바라보는 란주의 모습은 한결 편안해 보인다. 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고통의 순간이 필요한 것일까. 성장 따위 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 끔찍한 고통은 겪고 싶지 않다고 울었던 적이, 나도 있다. 나는 이런 고통과 불행 따위 선택하지 않았는데 왜 내 인생에 이딴 고난이 나타나서 나를 괴롭히는 것이냐며 믿지도 않는 신을 원망했던 적이 있다. 어두운 방 안에 홀로 들어가기 싫다며 주변 사람을 붙들고 징징댔던 적이 있다. 나는 저 어둠을 대면할 자신이 없으니 누구라도 같이 가달라고. 아니면 나 대신 좀 가달라고.
어두운 방 안에서 홀로 맞이한 순간은 생각만큼 괴로웠지만 상상만큼 끔찍하지는 않았다. 그 순간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누구에게나 어두운 방 앞에서 망설이는 시간도, 어둠 속에서 홀로 못난 자신을 대면해야 하는 상황도 있을 것이다. 란주의 편안했던 표정만큼 앞으로 드라마에서 보여줄 란주의 삶이 한결 더 평안하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다음에 마주할 어두운 방 앞에서는 조금 덜 망설이기를, 나도 란주도 부디 그러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