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스펙트럼장애와 신경다양성
당신은 자폐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사실 나는 아이를 낳기 전까지 자폐가 무엇인지 잘 몰랐다. 그저 자폐는 한 개인을 사회와 완전히 단절시키는 발달장애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앨리스가 태어나고 한동안은 아이가 자폐스펙트럼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앨리스는 신생아 때부터 사람들을 엄청나게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사람들을 좋아하던 앨리스는 만 3세 경에 자폐스펙트럼 진단을 받았다.
항상 잘 웃고 말도 잘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이 끊이지 않던 이 아이가 왜 자폐스펙트럼 진단을 받았을까. 그 과정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자면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아주 간단하게 말해보자면, 처음에 아이의 다름을 알게 된 것은 아이의 목 가누기가 또래보다 매우 늦어서였다. 목 가누기가 늦어지니 다른 대근육 발달도 덩달아 늦어졌다. 언어발달도 또래보다 매우 느렸다.
물론 시간을 두고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면 아이는 언젠가는 목 가누기가 저절로 되었을 것이다. 걷기와 말하기도 마찬가지다. (앨리스에게 대근육 관련 유전질환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민했던 나와 성질이 급했던 남편은 그 잠깐을 기다리지 못했다. 우리는 생후 6개월에 앨리스를 데리고 대학병원에 방문했고 발달지연이라는 명목으로 돌 전부터 맹렬한 재활 치료의 세계에 입문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아이는 결국 그 대학병원에서 자폐스펙트럼 진단까지 받게 되었다.
아이와 함께 발달재활치료를 받으러 다니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아이의 자폐를 누구보다도 빨리 눈치챘다. 하지만 앨리스가 정식으로 진단을 받기 전까지 나의 걱정은 공감보다는 비난을 받았다. 아무도 아이에게 자폐라고 하지 않는데 나 혼자만 아이를 자폐로 보았기 때문이었다.(그런데 멀쩡한 아이를 두고 자폐라고 한다는 비난은 앨리스가 정식으로 자폐를 진단받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앨리스가 자폐가 아니라고 말하는 그 어떤 사람들보다 내 아이를 믿었다. 아이에게 자폐가 없다고 믿은 것이 아니라 아이의 능력에 한계가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수년간 아이의 발달재활치료에 내 시간과 체력을 모두 갈아 넣으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러자 앨리스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했다.
앨리스는 30개월이 지난 이후에는 어떤 발달평가를 해도 항상 또래와 비슷하거나 우수하다는 결과를 받았으며, 지능검사 결과도 매번 평균상 이상이었고 언어 검사 결과도 상위 1% 이내였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교사로부터는 (행동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아이가 정말 똑똑하다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다. (물론 인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앨리스의 빠른 성장이 100% 내 노력 때문만은 아님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앨리스에게 어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려움이 없다면 왜 자폐스펙트럼이 장애이겠는가. 앨리스도 진단을 받은 수많은 자폐스펙트럼 아이 중의 한 명이다. 흔히들 자폐 하면 불안정한 눈 맞춤, 상동행동, 감각추구, 제한된 관심사, 일방적인 의사소통, 단조로운 로봇 말투 등을 떠올리는데 이런 것들은 자폐스펙트럼의 특징이지 어려움은 아니다. 적어도 앨리스와 나에게는 말이다.
자폐스펙트럼 아이를 키우는 양육자로서 느끼는 가장 큰 어려움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날뛰는 아이의 불안정한 감정이다. 이 불안정한 감정은 시간과 공간을 가리지 않는다. 감정의 요동이 5분 정도라면 그냥 떼를 많이 쓰는 아이 중의 하나로 볼 수 있겠지만, 이것이 길어져서 1시간을 넘어간다면 양육자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다. 그나마 아이가 집에서 감정을 폭발한다면 양육자가 수습이라도 할 수 있는데 양육자가 없는 상황(특히 교육기관)에서 아이가 폭발한다면 양육자가 수습할 수 없는 일에 휘말릴 수도 있다. 나는 앨리스의 감정 폭발 이슈로 말하기 힘든 난감한 상황에 여러 번 처한 적이 있었다. 현재는 약물 복용으로 최악의 상황은 벗어났고 앨리스는 여러 수업을 통해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계속 연습 중이다.
감정 조절이 잘 안 되는 아이를 위해 가정에서는 아이의 감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여러 가지 치료 요법을 통해 아이의 감정 해소를 도와줄 수 있다. 하지만 결국은 아이가 양육자의 도움 없이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 능력을 길러야지만 독립적인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사회인. 이것이 내가 앨리스에게 가지고 있는 최종 목표다. 자폐 완치, 자폐 탈출, 자폐 치료는 내 목표가 아니다. 이런 것들은 현대 의학에서 가능한 영역도 아니다. (2025년 시점)
이 밖에도 앨리스에게는 비자폐인 아이들, 신경정형인 아이들과는 다른 특징이 있다. 사회적인 상황들과 일상적인 대화들을 자연스럽게 터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통째로 외운 후 나중에 기억해서 외운 대로 출력해 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보면 언젠가 내가 가르쳤던 말, 치료실에서 배웠던 말, 유치원에서 배웠던 말 등 누군가의 말이 다 녹아들어 가 있다. 그래서 가끔 아이가 쓰기에는 어색하고 어려운 표현이 출력될 때도 있다. 영어로도 마찬가지다.
이 특별하다면 특별하고 특이하다면 특이할 수 있는 아이는 사실 다른 평범한 아이들과 다를 바가 없다. 앨리스도 다른 아이들처럼 키즈카페나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것을 좋아한다. 카페에서 달달한 빵이나 음료수를 먹는 것도 좋아한다. 태블릿으로 영상을 보는 것도 좋아해서 엄마와 매일 실랑이를 벌이기도 한다. 사실 앨리스는 지극히 평범한 7살 어린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자폐를 동정과 혐오, 혹은 호기심으로 보는 시선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자폐스펙트럼의 유병률이 100명 중 2~3명인 (2.64%) 사실을 알고 있는가? 초등학교로 따지자면 한 반에 한 명은 있다는 뜻이고 우리 주변 지인 중에서도 한두 명은 있다는 뜻이다.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들은 희귀하고 별종인 사람들이 아니라 평범한 이웃이다. 편견과 오해는 버리고 동정과 혐오 대신 다름을 인정하는 시선으로 자폐스펙트럼을 바라보는 것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