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나도 정신적 호더는 아니었을까
나는, 정리벽이 있는 편이다. 물건이 제자리에 있지 않거나 좀 비뚤어져 있으면 고칠 때까지 신경이 쓰인다. 지금껏 혼자만의 공간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서 대체로 고달픈(?) 삶이었다. 식구들 모두 내 맘 같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운 물건이 생기면 적당한 자리를 찾아주고 물건을 쓰고 난 후엔 다시 제자리에 놓는, 이 쉽고 단순한 일을 왜 하지 않을까? 대답은 늘 같다. 그냥 두면 언젠가는 알아서 치울 거야. 이 겉만 번지르한 말이 강요하는 유예기간을 나는 끝내 버티지 못한다. '이눔의 성격, 내가 고치고 만다.' 싶다가도 번번이 몸은 정신에게 굴복한다. 아무래도 나는 마음이 불편한 것보다는 몸이 힘든 쪽을 택하는 종류의 인간인가 보다.
한편으론, 정리정돈이란, 청소보다는 쇼핑의 개념으로 먼저 인식해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우리는 물건이 너무 많이 쏟아지는 시대에 살고 있고, 필요보다는 취향이나 기호로 비슷한 물건을 또 사서 멀쩡한 물건을 함부로 버리거나 소유물의 부피를 늘려가기 때문이다. 쇼핑에 대한 적절하고 합리적인 사고와 습관만 가져도 정리정돈의 일상이 그리 힘든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평소에 꽤 합리적인 쇼핑과 정리정돈을 하며 살았어도 성향이 반대인 사람이나 성장과정에 있는 아이들과 한 집에서 오래 살다 보면 소소한 물건들이 늘어나는 것을 어쩔 수 없다. 그중에는 낡았지만 여전히 사용하는 것도 있고, 별 쓸모는 없어도 추억 때문에 버리지 못하는 것도 있다. 심하면 어딘가에 있다는 것조차 잊고 있는 물건도 꽤 된다.
그러다 미니멀 라이프의 홍보 모델 같은 집을 보거나 넓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을 것 같아서 기회만 되면 사려고 벼르던 서랍장이나 콘솔 따위가 막상 따져보니 집안에 들일만큼 마땅한 공간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비로소 그동안 늘어난 '세월'이란 이름의 물건들을 둘러보게 된다. 아무래도 한바탕 뒤집어서 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마치 잘 고쳐지지 않는 습관처럼 그런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기가 그리 쉽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살림살이 햇수가 십 년 단위로 넘어갈수록 더욱더 마음과 행동사이의 거리는 멀어진다.
예전에 친한 직장 동료의 집에 갔다가 깜짝 놀란적이 있다. 집안에 빈 공간이 거의 없을 만큼 소소한 물건들이 많아서 눈길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어디에 앉아야 할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심지어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 가장자리에도 자잘한 물건들이 늘어서 있고, 식탁 위에도 온갖 약병과 그릇, 간식거리등이 놓여있어서 정작 밥을 먹을 때는 한쪽 귀퉁이를 겨우 치우고 상을 차려야 할 정도였다. 나 같으면 집안이 이런 상태면 절대 손님을 들이지 않았을 텐데 정작 당사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냥 평소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고 물건이든 음식이든 나눠주길 좋아하는 인심 좋은 사람이었다. 동물도 사랑해서 개와 새를 여러 마리 키웠다. 그래선지 정리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사는 그녀에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안 들고 그저 개인적인 취향이나 습관이 달라서라고 이해했다. 솔직히 말하면 심리적으로 많이 불편했고 당장이라도 나서서 치워주고 싶은 마음은 그야말로 '굴뚝같았지만' 끝내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그 무질서가 그녀에겐 지극히 정상적인 질서였고, 무엇보다 먼지는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와는 그저 성향의 차이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정도가 지나쳐서 거의 병적인 사람들이 있다. 처음엔 물건이었을지 모르지만 나중엔 쓰레기가 되어버린 것들조차 버리지 못하고 그것들에 짓눌려 사는 사람들,
그들을 호더Hoarder라고 부른다.
오래전에, 티비에서 이런 사람들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시청한 적이 있었다. 도저히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라고 여길 수 없는 광경이었다. 보기 시작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제대로 볼 수가 없어서 채널을 돌리고 싶었지만 도대체 왜 저렇게 사는지 궁금해서 눈살을 찌푸리고 가끔 고개를 돌리면서도 계속 보았다.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특정한 물건을 수집해서 보기 좋게 진열하거나 보관하는 수집광이 아니라 형체를 분별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물건과 물건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들까지 아무렇게나 뒤섞인 채 쌓아둔다. 더구나 여러 해 동안 그런 행위가 반복되니까 청소는커녕 발을 디딜 틈도 없고, 방문을 제대로 열 수가 없어서 몸을 옆으로 돌려 간신히 빠져나오기도 하고 집안을 돌아다니려면 마치 언덕을 넘는 것처럼 물건더미를 타 넘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 물건들 켜켜로 쌓인 먼지와 세균 때문에 호흡기와 피부질환을 앓고 있기도 했다. 그들의 집안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예전의 ‘난지도’였다.
호더는 일종의 정신병증을 가진 사람이다. 이 프로그램도 그들의 치료를 도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맨 처음 하는 일도 청소가 아니라 상담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과거에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경험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죽었거나 실직을 당했거나, 혹은 어떤 일이 생겨서 낯선 곳으로 혼자 옮겨왔는데 견딜 수 없이 외롭다거나 할 때, 갑자기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정신적 변화가 오고 이것이 일상의 청결이나 정리정돈의 의지가 멈춤으로 연결된 것이다. 그들이 끌어안고 사는 물건들은 사실 물건이라고 말하기엔 적당하지 않은 것들이 더 많았다. 어떤 집은 쌓아둔 물건들이 이미 쓰레기가 된 지 오래여서 방독마스크를 한 사람들이 삽으로 눈을 치우듯 집안의 물건들을 밖으로 퍼내야 했다.
처음에는 그들을 이해하기는커녕 점점 더 화가 났다. 혹시 저들은 게으름을 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시키는 게 아닐까,라는 의심까지 들었다. 마치 흉악범에게 정신이상이라는 면죄부를 주는 재판 결과에 화가 나는 것과 비슷한 심정이었다. 그 정도로 그들의 집안 풍경과 일상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점점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그들의 외로움과 힘듦에 감정이입이 되었다.
한 여자는 상담을 통해 어렵게 물건을 내다 버렸는데 결국 혼자 남았을 때, 다시 집 밖의 쓰레기통을 뒤져서 몇 가지 물건들을 도로 가져온다. 그녀의 눈물을 보면서 보통사람에겐 당연히 치워야 하는 쓰레기가 그녀에겐 견딜 수 없는 상실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결국 그들의 상처는 모두 일종의 상실감이고, 내게 속한 것들 중에서 무엇이든 더는 잃을 수는 없다는 절박한 심정이 쓸모없는 물건에까지 집착하게 만든 것 같았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은 비슷한 일을 당하고도 상처와 슬픔을 간직한 채로 정상적인 일상으로 복귀한다. 하지만 그에 비해 소수라고 해서 이런 이상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비난할 수만은 없는 이유는, 개인차라는 것도 있을뿐더러 그 누구도 인간의 정신에서 생기는 현상을 정확히 알아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람보다 물건에 더 집착하고, 함부로 어질러놓기 때문에 대개는 가족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다. 그래서 혼자 사는 경우가 많고 설령 가족과 함께 산다 해도 정상적인 생활을 나누지 못한다. 그런데 이렇게 물건 때문에 사람들과 멀어지면서도 정작 그들과의 추억 때문에 잡다한 물건들을 버리지 못하고 쓰레기 더미에서 사는 경우가 많으니 참 슬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누군가와 함께 먹었던 맥도널드의 햄버거 포장지와 조잡한 사은품 인형은 절대로 버리지 못하면서 그 햄버거를 함께 먹었던 사람과는 점점 더 멀어진다. 과거 때문에 현재와 미래가 무너지는 걸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기만 한다.
인간에겐 적당한 망각의 능력이 있다. 만약 우리가 자신이 당한 괴로움이나 슬픔의 무게를 고스란히 모두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면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렇게 적당하게 수위를 조절을 해주는 기억과 망각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일 테다. 어쩌면 뛰어난 기억력보다는 느슨한 망각의 능력에게 고마움을 가져야 할지도 모른단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생각도 해본다. 만약 내 기억 속이나 마음속을 집안의 물건들을 보듯 한눈에 볼 수 있다면 혹시 나도 정신적인 호더는 아닐까? 늘 생각이 많고 부끄러움이나 슬픔에 대해서 쉽게 잊지 못하는 편이다. 남을 배려하느라 나를 돌보지 못하고 후회한 적도 많았고, 솔직하게 말하지도 못하면서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내가 한 실수, 내가 받은 상처들을 뒤적거리며 아파한 적도 많았다.
필요 없는 물건들을 치우고 나서 말끔하게 넓어진 집안을 보면 기분이 좋은 것처럼 칙칙했던 마음속의 잡동사니도 모두 치우고 홀가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일상의 물건과는 달리 그것들은 치운다고 아예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쉽게 내다 버릴 수도 남을 줈수도 없다. 없앴다고 안심하고 있으면 어느새 또 슬그머니 다시 제자리를 찾아와 나를 흔든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버리거나 고쳐야 할 것들을 골라내고, 남겨두어야 할 것들의 적당한 자리를 찾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뿐이다.
되짚어보면,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쏟았던 노력에 비하면 불필요한 것을 버리려는 노력은 늘 충분하지 않았다. 굳이 편견이나 미련 따위의 단어로 말하지 않더라도 버려야 할 것을 제 때에 버릴 줄 알아야만 그 빈자리로 새로운 가치와 인연이 들어와 줄 것이다.
잊지 말자.
내 삶에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간직하며 살아야 할지에 대한 분별력이 더러 대책 없이 찾아오는 후회의 부피를 줄여준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