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 장에 숨기고 싶은 것들

모녀

by 윤서



네댓 살 쯤의 기억이란 명확하지 않거나 아예 잊어버리기 쉽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네가 그걸 기억한다고?'라는 말을 몇 번쯤 들었던 선명한 기억이 한두 개쯤은 있기 마련이다. 내겐 태어나서 다섯 살까지 살았던 강원도 양양에서, 미용실보다는 미장원이란 명칭이 일반적이던 시절의 기억이 그것이다.


어느 늦은 저녁, 엄마와 미장원에 갔다. 미장원이면 밝았을 법도 한데 내 기억 속의 그 공간은 꽤 어둡다. 혼자 삐져있을망정 투정은 부리지는 않는 조용한 아이였던 나는 낯가림도 심해서 처음 가본 미장원의 자잘한 도구들과 파마약 냄새 같은 것 때문에 조금 무서웠다. 손재주가 많았던 엄마가 어린아이의 헤어컷을 위해서 미용실에 갔다는 것은 미용사와 아주 친해서 마실 갈 핑계를 만들었거나 스타일을 획기적으로 바꿔주려는 결심을 했다는 뜻이리라.

나는 거울과 마주 앉아 머리칼이 잘려나가는 걸 보면서도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었나 보다. 끝났다는 말과 함께 거울 속에 비친 나를 확인한 순간, 충격을 받아 울음을 터트렸다. 거울 속의 나는 이미 내가 아니었다. 아무리 미장원 아줌마와 엄마가 더 예뻐졌다며 호들갑스럽게 얼러도 소용이 없었다. 길었던 머리가 너무나 짧아져서 이제 나는 남자가 되고 말 거란 공포가 밀려왔다. 엄마는 내 반응에 좀 놀랐는지 나를 업고 집까지 왔다. 세 살 터울의 동생이 있었으니 그 무렵 엄마가 나를 업어주는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좋은지 몰랐고 그저 잘려나간 머리칼이 서럽고, 밤길은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였던 기억뿐이다.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도 짧은 헤어스타일을 싫어하고, 내 마음대로 머리를 기를 수 있던 때부터 거의 평생을 긴 생머리를 유지한 이유가 그날의 트라우마 때문일 수도 있다고 거창한 짐작을 한 적도 있다.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에도 짧은 머리를 해 준 적은 없었다. 아이들도 나처럼 짧은 머리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때의 엄마는 아이의 긴 머리를 간수하기가 귀찮았을 것이다. 엄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고. 둘째는 아직 아가였고, 살림하면서 작은 양장점도 하던 때였으니까


그 후, 황지로 이사를 하고 유치원에 다닐 때, 엄마는 또 한 번 내 머리를 짧게 잘랐다. 엄마는 천주교 신자도 아니었고 당시에는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극히 드물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성당 부설 복자유치원에 보냈다. 그날은 유치원의 합동 생일잔치가 있는 날이었다. 내가 첫 아이라 아직 젋었던 엄마는 혼자 좀 들떴던 모양이다. 하긴 예쁘게 꾸미고 시어머니께 당당하게 외출사유를 밝힐 수 있는 드문 기회였을 테니 엄마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쉽게 짐작이 간다.


이른 아침에 부뚜막에 나를 앉힌 엄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 머리칼을 싹둑 자르고 연탄구멍에 꽂아서 달군 고대기로 머리카락 끝을 둥글게 말았다. 말린 머리는 처음 잘랐을 때보다도 더 짧아져서 끝이 귀에 닿을 것만 같았다. 한복 입으면 이 머리가 예쁠 거야. 할머니가 땋아주시는 새앙머리는 촌스러워. 하지만 엄마는 내 머리가 다시 길 때까지 여러 번, 엄마의 경솔함을 탓하는 할머니의 꾸중을 들어야 했다. 내 머리를 참빗으로 빗겨서 단장해 주는 건 할머니의 아침 소일거리 중 하나였었다.

머리 손질이 끝나자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동네 아줌마들이 하나 둘 안방으로 모였다. 특별한 일이 없이도 자주 보는 광경이었지만 이 날은 엄마와 내가 어떻게 꽃단장을 하나 구경하러 오신 게 분명했다. 나는 마치 온 동네가 공유하는 인형처럼 방 가운데 앉아서 수줍음을 참느라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엄마는, 지극히 내성적이고 예민한 내 성격을 배려하지 않았다. 외향적이던 엄마의 기준에서 보면 도대체 그게 왜 싫은지 이해할 수 없었고, 어린것이 지나치게 예민하고 까탈스럽다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엄마가 눈썹과 입술을 칠해주는 게 창피했고, 시집보내도 되겠다는 아줌마들의 농담은 더 싫어서 거의 울뻔했다. 엄마는 한복집에서 내 한복도 미리 맞췄었다. 당시의 아이 한복치고는 세련되고 특이했다. 고름 부분에 대한 엄마의 요구를 황당해하던 한복집 아주머니가 떠오른다. 내 단장이 다 끝나자 엄마도 화장을 하고 한복을 차려입었다. 흑백이라 사진으론 확인할 수 없지만 나는 지금도 그때의 엄마와 나의 한복을 기억한다. 엄마는 연한 황금색에 아랫부분에 조금 진한 금박무늬가 새겨진 한복이었고, 내 것은 잔 무늬가 있는 흰색에 가까운 은회색에 치맛단과 소매끝동과 고름이 색동이었다. 특히 고름이 보통의 저고리 고름이 아니라 리본처럼 묶어 길게 늘어뜨린 모양이라 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양새였다. 한껏 성장을 하고 온 동네의 배웅을 받는 기분으로 대문을 나섰다.


늦었다. 빨리 가자.


동네 아줌마들과 웃고 떠들며 준비를 하느라 늦었는지 엄마가 갑자기 서둘렀다. 유치원에 거의 도착할 즈음에 길에 서 있는 아빠가 보였다. 기다리는 걸 무척 싫어하는 분인 걸 알면서도 엄마는 재밌다는 듯 소곤거렸다. 니 아빠 화났다. 저, 삐딱하게 서서 담배 피우며 한쪽 주머니에 손 넣고 있는 거 봐. 아빠의 목에는 큰 카메라가 걸려 있었다. 아빠는, 지금이 몇 시냐고, 근무 시간 중에 나오는 건데 시간을 안 지키면 어쩌냐고, 게다가 수녀님이 출석 확인 하시면서 내 이름을 계속 불러서 창피해서 있을 수가 없어서 나왔다며 예상대로 화를 내셨다. 하지만 엄마는 못 들은 척하며 오히려 칭찬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생글거리며 내 손을 고쳐 잡고 걸음을 재촉했다.




내게 흠없이 순한 기억들만 모여 살고 있는 시절을 말하라면 아무 망설임 없이 유치원을 다니던 1년이라고 할 것이다. 어쩌면 정제된 증거물처럼 남아있는 졸업앨범과 여러 장의 사진들 덕분에 더욱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만 기억의 갈피마다 곱고 예쁘지 않은 것이 없고, 한때 내가 좋아했던 로버트 풀검의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는 책 제목에 전적으로 동의할 만큼 평생 유지하는 좋은 습관이나 마음을 수녀님께 배웠다. 그리고 그 시절의 추억 속엔 자주, 엄마도 등장한다.


내가 갖고 있는 사진 중에 엄마와 단 둘이 찍은 것으로는 유일한 이 사진도 그날 찍은 것이다. 그날 엄마는 다른 누구의 엄마보다도 상냥하고 예뻤으며 어린 나도 평소보다 예뻤다. 창을 통해 실내 가득 들어서던 꼬리 긴 햇살도 예뻤고, 우리 모녀의 한복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몇 번이나 칭찬을 하시던 신부님의 파란 눈도 예뻤다. 이 사진을 볼 때마다, 이후로도 계속 엄마와 내가 이 사진 같기만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아쉬움에 매번 달콤 쌉쌀한 아픔을 느끼지만 그래서 더욱 아끼는 사진이다.


어느 날, 한국에 있는 친구가, 정말 '눈만 흘겨도 찢어질 것 같은' 곱디고운 아이들의 한복을 소포로 보내주었다. 아직 어렸던 아이들에게 한복을 입히고 사진을 찍어주다 불현듯 이 사진 생각이 났다. 사진을 꺼내 액자에 넣고 벽난로 위의 아이들 사진옆에 놓았다. 집안을 오갈 때면 자주 사진에 눈길이 갔고, 믿을 수 없게도 눈물과 미소와 원망이 한 감정이 된다. 어쩌면 나는, 이 한 장의 사진뒤에 아픈 기억을 모두 숨기고 봉인한 후, 우리가 이 사진 같은 모녀라고 나를 세뇌시키고 싶었을까.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 딸과 함께 하는 일상에서 자주 엄마를 떠올린다. 돌아가시기 전에 한국에서 두 달 정도 엄마와 함께 지낸 적이 있는데, 어느 날 엄마가 했던 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밴쿠버에 있는 아이와 카톡을 끝내고 나자 대화는 자연스럽게 아이에 관한 것으로 이어졌다. 세 살에 이민을 간 아이를 엄마는 딱 두 번밖에 보지 못했다. 더구나 성인이 된 모습을 본 건 내가 보여준 사진이 전부였다. 나는 엄마의 상상력을 도와주려고 아이의 일상에 대해서 말하다가 별생각 없이 아이와 함께 공연을 보러 가거나 산책을 하고, 맛있는 식당을 찾아가고, 아이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이보다 더 흥분해서 흉을 보고, 함께 영화를 보거나 같은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등의 사소한 일상을 얘기했는데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엄마가 그랬다. 나도 딸들이랑 그러고 싶어.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미 병색이 짙어진 엄마는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상태였으니 빈 말이라도 그러자고 했으면 좋아하셨을 텐데, 나는 끝내 매정하게 침묵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빈말조차도 끼어들 수 없을 만큼 아주 팍팍한 관계의 세월을 보냈고, 그 시절의 아픔은 빈집의 낡은 벽에 걸린 허름한 옷 같은 흉터로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끝내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엄마는 나 같은 엄마가 아니었고 나도 내 딸 같은 딸은 아니라는 것을.


흔히들 말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후회할 테니 생전에 잘하라고.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후회라니.. 말도 안 되는... 하지만 막상 돌아가시고 나니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감정이 아니란 걸 알았다. 엄마를 떠올리는 내 마음 안에는 아직도 사랑받고 위로받고 싶은 내가, 아이처럼 남아있다. 하지만 엄마는 여전히 내가 바라는 것을 해 줄수 없다. 그래서 이젠, 돌아올 수 없는 것을 기다리는 그 아이를 데려다 곁에 앉히고 엄마가 잊었던 말들을 찾아내 내 언어로 위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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