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바다
그동안 동해를 그리워 한 마음으로 친다면 도착하자마자 바로 바다로 달려갔겠지만 일주일이 지나서야 바다를 만났다. 삼 년 만에 다시 온 한국에서 나는, 마치 낯선 곳에 불시착해서 모르는 사람들을 만난 것처럼 당황했고, 확신했던 것들이 갑자기 막막해지자 내 분별력을 의심하며 지척의 바다도 밀어냈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 마음이 상하지 않은 척했지만 마음속은 사막이었고, 만약 그 사막에 오아시스가 있다면 그건 캐나다로 돌아가는 것뿐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쉽게 내릴 결정은 아니었다. 직장까지 그만두고 거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오기도 했고, 가족 간에 얽혀있는 문제를 어디까지 푸는 게 내 역할인지에 대해 고민 중이다. 그건 내가 얼마나 오래 한국에 머물지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흔한 말은 언제쯤 기능을 상실할까.
집에서 나와 오분 정도만 걸으면 파도 소리가 들린다. 교통량을 체크하는 센서가 없는지 차량이 뜸한데도 건널목 신호가 바뀌는 데 오래 걸리는 큰 도로를 건너고 조금 더 걸어서 ‘세븐 일레븐’을 지나면 좁고 아름다운 해안도로가 나온다. 내 걸음으로 열 걸음이면 족한 그 도로를 건너면 바로 송림과 바다다. 등 뒤로 열병하듯 들어서 있는 고층 아파트 단지를 생각하면 믿을 수 없을 만큼 멋지고 비현실적인 주거환경이다. 여기는 강릉,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송정이다.
버라드 만의 시작이면서도 호수처럼 잔잔하거나 얇은 파도만 밀려오는 밴쿠버 우리 동네의 바다를 볼 때마다 언제나 동해에 대한 그리움은 저절로 따라왔었다. 만약 바다는 이래야 한다는 공식이 있다면 내게 그 공식을 대입시켜 얻을 수 있는 정답은 한국의 동해였다. 그래서 답을 알면서도 오답을 쓴 사람처럼, 내게 밴쿠버의 바다는 일종의 조바심이었다. 그건 마치 나는 지금 보이는 모습이 전부인 사람이 아니라 사실은 이런 사람라고 설명하고 싶은 억울함과 비슷했다.
송림에서 벗어나 바다 쪽으로 간다. 잘게 부서지는 햇살이 바다로 스며드는 풍경이 눈보다 가슴에 먼저 담긴다. 아름답다는 건, 예기치 못한 '순간의 충만'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바다 저 깊은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오늘은 그저 이 아름다운 표피가 바다의 진심이려니 바라본다. 그러니까 지금 바다는, 나처럼, 태연한 척하는 거라고.
태연한 척하는 것도 우아함의 일부다.
'에쿠니 가오리'의 '우는 어른'이란 책에 나오는 문장이다. 제목에 끌려 고른 책이지만 오래전에 읽었던 그녀의 소설에 비하면 평범했다. 하지만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묘하게 부끄러웠고 더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부끄러움은 '척'이란 한 글자 때문이었고, 위로가 된 건 '우아'였을 것이다. 이 한 줄의 문장이 그녀의 책 전체를 대신할 만큼 마음에 남았다. 무엇인지는 알면서도 적확한 표현을 찾아내지 못했던 내 심정이 더는 숨을 곳도 없이 드러난 것 같았다.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지켰다고 생각한 인간으로서의 우아함은 단지 '태연한 척' 하려고 애쓴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솔직하게 힘들다고, 아프다고, 슬프다고, 실망했다고 말하고 싶었던 대부분의 순간에, 나는 괜찮은 척하며 살았다. 얼마나 많이 그랬으면 이 한 줄의 문장에 내 인생을 몽땅 쑤셔 넣을 듯 공감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위로받았을까.
이쯤에서 뭔가를 깨닫고 어떤 의미로든 솔직하지 못할 때 사용하는 '척'이란 단어를 지워내고 싶은데 아무래도 나는 크게 달라지진 못할 것 같다. 상황이 시끄러워지는 게 싫어서, 걱정 끼치기 싫어서, 쓸데없는 자존심일망정 다치기 싫어서,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 싫어서, 나를 멋대로 평가하며 오해할까 봐, 등등의 오만가지 이유가 오래된 아침 습관처럼 내 곁에 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속으로는 불안하고 화가 나면서도 태연한 척하며 살아갈 것이다. 쉽게 변할 수 없는 건 인간의 보편적인 특성 중 하나가 아니던가. 하지만 억지로라도 웃으면 우리의 뇌는 정말 웃을 만큼 좋은 일이 있는 것처럼 반응한다는 원리가 여기에도 적용되어서 괜찮은 척하다 보면 정말 괜찮아졌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도 내내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선뜻 모래사장으로 내려서지 못하고 곁눈질로 바라보면서 걷는다. 마음의 준비를 더 한 후에 만나야 하는 오래 보지 못한 애인 같은 느낌이라면 지나친 감상이겠지만 사실은 그것과 비슷하다. 혹은 아끼는 것은 쉽게 사용하지 못하는 일상의 소심함 같은 거라고나 할까. 나는 바다 앞에서 수줍은 듯 머뭇거린다. 그리고 그 머뭇거림은 묘한 설렘이 되기도 한다. 마침내 신발이 푹푹 빠지는 얕은 모래 언덕을 지나 해변으로 내려선다.
동해와 헤어져 사는 동안, 늘 편애하던 '겨울바다'만 떠올렸다. 마치 동해에는 겨울밖에 없는 것처럼. 그러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봄 바다에 잠깐 주춤한다. 나도 모르게, 어.. 이게 아닌데...라는 마음속의 말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바다를 바라보는 내 눈길이 편해짐을 느낀다. 보면 볼수록 살찐 봄바다는 정다웠다. 느긋하게 밀어 올리는 파도마다 나를 토닥거린다. 너무 잘하거나 바꿔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제 좀 쉬어도 된다고.
의욕이 충만해서 바쁘게 생활하는 사람이 건네는 이런 식의 위로는 위로가 되기보다는 자괴감이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자신도 같은 처지, 혹은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건네는 위로는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일차원적이나마 가장 확실한 안도감을 준다. 그래서 타의에 의해 멈춰있거나 자신이 선택한 충동적인 쉼의 모습을 괴롭히지 않게 해 준다. 봄바다는 조곤조곤 나에게 말을 걸어오며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격려가 아니라 위로였다는 걸 알아채게 한다.
바다와 만나면 맨 처음 떠오르는 단어가 '자유'다. 내가 늘 바다가 그립고, 만나면 헤프게 좋아하는 이유는 아직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자유는 항상 감질 난다. 이것만 하면 자유로울 것 같고, 이것만 견디면 내게 보상처럼 주어질 것 같지만, 항상 변수가 작용하고 복병이 있다. 그래서 어쩌면 자유는 영원한 꿈인지도 모른다. 해도,
우리는 언제나 자유를 꿈꾼다.
때론 그 꿈을 현실로 끌어당기기 위해 무엇인가를 포기하거나 물리적인 이동을 시도한다. 자유롭고 싶다는 건 익숙함을 버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유를 얻기 위해 익숙한 관계, 익숙한 직장, 익숙한 생활을 포기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를 구속하는 것에서 벗어나 다른 것에 구속되는 것을 '자유'라고 착각했다는 걸 깨닫는다. 결국 우리가 꿈꾸거나 혹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구속의 '종류'인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애쓰고 노력했는데도 결국 자유로워지지 못했다고 실망하거나 자신을 탓하지 말자. 설령 우리가 자유라고 생각했던 것이, 최선을 선택할 수 없어서 최악을 포기한 것에 불과하더라도 자신의 소극적인 현명함을 주눅 들게 하지 말자.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그때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자유로운 곳이라고 믿어주기로 한다. 그래야만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다시 시작할 수 없는 명백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무엇이든 잘못되거나 실패한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건 산 자의 특권이다. 결코 죽음보다 쉽다고 말할 수 없는 이 삶 속에서 나 자신에게 베풀 수 있는 최선의 아량은, 누가 뭐라 하든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내가 원할 때 내 삶의 궤도를 수정하는 게 아닐까.
궤도수정을 하려면 맨 먼저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오랜 외국생활동안 닳아지지도 않던 그리움이나 옛정은 어쩌면 떠나온 자만이 갖는 착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동안 손님처럼 몇 번 다녀가긴 했지만 25년이란 세월이 바꿔놓은 것은 눈에 보이는 변화만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었다. 엄밀히 말한다면 생활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가 그랬다. 달라진 생활은 처음엔 불편하다가도 곧 적응할 수 있지만 관계는 그렇지 않다. 사람은 결코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건 불변의 진리고, 예전에 나빴던 관계가 시간이 지났다고 저절로 좋아지진 않는다는 걸 확인한다. 더불어 인간은 잘 변하지 않으면서도 간혹 변한다 해도 좋은 쪽보다는 나쁜 쪽이기가 쉽다는 것을, 마치 오랜 실험과 검증을 거쳐 도달한 결과지를 보듯 인정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삶이 계획한 대로 된 적이 거의 없었다는 걸 인정하며 시작에게 끝의 부담까지 주진 않기로 했다. 우린 끝내기 위해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살아가기 위해,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시작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습관적으로 '시작'앞에 붙이는 '새로운'이란 단어도 빼기로 한다. 어차피 삶은 낡고 진부하게 반복되는 시작으로 이어진 조각보 같은 것이다. 만약 당신이 썩 품질이 좋은 한 가지 원단을 가진 삶이라면 부디 그 '안정'을 유지하며 그렇게 살아라. 그럴 수 있다면 당신은 운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처럼 그럴 수 없다면 조각보를 잇듯 삶을 꾸려가는 것이 고단하긴 해도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때론 삐둘게 잘라진 조각천일 때도 있고, 무늬나 색상이 황당하거나 생뚱맞을 때도 있겠지만 조각조각 이어 붙인 조각보에서 삶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찾는 것도 내공이 필요한,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더라도 어려운 일을 하나씩 거쳐 왔다는 것만으로도 삶에게 충분히 예의를 지키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다시 먼 바다를 본다. 모래알만큼이나 자잘하게 뒤섞였던 시끄러운 마음을 파도의 결이 쓰다듬는다. 생각은 조금씩, 잘게 부서지며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게으른 봄 바다는, 멋있어 보이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는 것 같아 오히려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