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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Apr 05. 2024

건지 감자껍질 파이 북클럽

책, 편지, 그 밖의 그리운 것들


#The Guernsey Literary & Potato Peel Pie Society


2018년에 개봉한 마이크 뉴얼(Mike Newell) 감독의 영화로, 원작은 2009년에 '메리 앤 세퍼'와 '애니 베로스'의 공저로 출판된 동명의 책이다. 다른 장르도 아니고 소설을 두 사람이 같이 쓴다는 게 가능할까, 왜 그랬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는데 처음 이 책을 쓰기 시작한 메리가 집필 중에 건강이 악화되어서 편집인이자 아동 문학가인 조카 애니에게 책의 마무리를 부탁한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메리는 책이 발표되기 전인 2008년 초에 세상을 떠났다. 데뷔작이 유작이 되었지만 조카가 아니었으면 그나마 세상에 나오지도 못했을 테니 다행이다. 책의 내용은 런던에 사는 작가 '줄리엣'과 건지 아일랜드에 사는 북클럽 회원인 '도시'가 주고받는 편지 형식이다.


사전 정보가 없이 책을 고를 때 내용의 일부를 읽기보다는 제목이나 표지, 활자체등에 꽤 영향을 받는 편이다. 마치 사람의 첫인상처럼 그야말로 '감'에 의존해서 선택하는데 거의 실망한 적이 없다. 이럴 때마다 출판인의 역량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이 책도 처음 나왔을 때 제목에 바로 끌렸다. 뭔가 내가 알고 싶고 좋아하는 것들이 선별된 언어로 잘 직조된 느낌이랄까. 그런데 아직도 읽지 않았고, 넷플릭스에 올라온 영화를 보고 반가워서 열었다가 어떤 한 장면 때문에 첫 10분을 넘기지 못하고 덮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배경이 세계대전이었기 때문이다. 호러무비를 절대 보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유다. 대체로 전쟁이 배경이 되는 영화에는 고통과 슬픔만큼의 감동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단 안 본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이나 힘듦은 현실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무의식이 마치 보호본능처럼 작동하는 것 같다. 어쩌면 취향이라기보다는 기질적 선택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일상이 느슨해지니 마음도 따라 느긋해지는지 조금씩 달라지긴 한다. '절대'라고 외치던 것들도 시나브로 스며들고, 그런 소소한 변화를 즐기는 것도 나이듦의 베넷핏이 아닐까.




책을 원작으로 한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렇지만 책에 못 미칠 뿐 아니라 캐릭터의 성향이나 스토리의 흐름도 원작을 벗어난 표현이 많다고 해서 책을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했지만 언젠가 다른 글에서도 썼듯이 영화와 책을 비교하는 건 공정하지 못하다, 다소 조급하고 식상했던 부분들이 아쉽긴 해도 뒤끝이 좋은, 내 취향의 영화임은 분명하다. 차분한 앵글로 잡히는 섬의 풍경은 소소한 덤이다.



#북클럽의 독특한 이름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영국 해협에 위치한 채널 제도의 '건지 아일랜드'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유일하게 독일에게 점령당했던 영국 영토다. 섬이라는 지리적 특수성 때문에 더욱 고립되었고 그만큼 섬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고통은 컸다. 독일군은 전쟁 중인 대륙에 군사 식량을 보내려고 농장에서 기르던 모든 돼지들을 착출 한다. 그래서 다가온 겨울은 추위와 배고픔으로 혹독했다. 담요를 뒤집어쓰고 맹물에 삶은 작은 감자 한 알로 허기를 달래던 '도시'는 난데없이 정육 칼을 가지고 오라는 쪽지를 받고 어밀리아의 집으로 간다.


그곳엔 놀랍게도 어밀리아가 몰래 숨겨서 기르던 돼지 한 마리가 있다. 진을 만들어 온 아이솔라, 밀가루와 버터가 들어가지 않은 오직 감자만으로 만들고 껍질로 장식한 파이를 가져온 에반, 돼지를 잡아서 굽는 도시, 이 모임을 생각해 낸 엘리자베스와 그녀와 모녀처럼 지내는 집주인 어밀리아, 갑자기 모이게 된 이 다섯 사람은 작은 돼지고기 한 절미에 감탄하고 독한 수제 진을 마시고, 끔찍한 맛의 감자껍질 파이에 웃음을 터트리며 저녁을 먹고 대화를 나눈다. 오랜만의 배부름과 선한 사람들 사이의 따뜻한 교류가 주는 행복에 젖어서 독일 점령하에 있다는 것도 잠시 잊는다. 그들은 평소에 알고는 있었지만 그리 친한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들이 원했던 건 돼지고기 구이가 아니라 이렇게 허물없고 친밀한 유대감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통금이 시작된 밤길을 조심해 가면서도 즐거움을 감추지 못해 웃고 떠들며 집으로 돌아가다가 독일군 순찰대를 만난다. 불법 집회의 의혹을 피하기 위해서 엘리자베스는 임기응변으로 독서모임이었다고 둘러대고, 독일군이 모임의 이름을 묻자 그때 마침 감자껍질파이 때문에 속이 안 좋다고 중얼거리는 술 취한 에반의 불평이 들려서 다소 길고 독특한 모임의 이름을 말한다. '더 건지 리터러리 앤 포테이토 필 파이 소싸이어티 (The Guernsey Literary and Potato Peel Pie Society) 이렇게 타의에 의해서 측흥적으로 만들어진 독서 모임이지만 금요일 문학회는 그들에게 유일한 도피처이자 위안이 되었다.


이 암흑기에 촛불 하나만으로도 자유롭게 새로운 세상을 탐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각자 다를지라도 책이 우리를 하나로 엮어준다는 걸 알았습니다. _ '도시'의 편지 중에서.


스톱워치로 시간 제한을 두고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해서 발표하고 질문에 대답하다가 의견이 엇갈리면 시간에 쫓겨서 마치 말다툼을 하듯 흥분해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다가도 시간이 끝나면 금세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어서 칭찬과 인정을 아끼지 않는 북클럽 분위기는 영화를 보는 내내 무척 부럽고 설레기까지 했다.


#한 권의 낡은 책


그들은 독서클럽을 지속하기 위해서 책 보관소에 가서 각자 좋아할 만한 책을 고른다. 그때 도시가 고른 책은 '찰스 램'이 쓴 ' 엘리아 수필 선집'이었다. 속표지에는 한때 그 책의 주인이었을 사람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있다. 그녀가 바로 '줄리엣'이다.


전쟁 때 폭격으로 부모님을 잃어서 도시의 개방형 건물에 트라우마가 있는 줄리엣은 런던에 살면서 평전과 소설을 쓰는 나름 성공한 작가다. 유명 작가로서의 위치와 부유한 남자친구 덕분에 종전 직후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화려한 생활을 하지만 뭔가 잘못되었거나 불편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러던 어느 날 '건지 아일랜드'에서 '도시'가 보낸 편지를 받는다. 예전에 가난할 때 팔았던 그녀의 책을 갖고 있으며 덕분에 찰스 램을 알게 되었고 그의 글을 더 읽고 싶지만 섬에는 서점이 없으니 찰스 램의 '셰익스피어 선집'을 구할 수 있는 런던의 서점 주소를 알려줄 수 있냐는 편지였다. 그의 편지를 읽으며 줄리엣은 뭔가 형언할 수 없는 감동과 친밀감을 느낀다. 그녀는 서점에 직접 가서 책을 구해서 우편으로 보내주고 두 사람의 편지는 계속 이어진다. 그의 편지를 통해 알게 된 '건지 감자껍질 파이 북클럽'이 궁금해진 줄리엣은 마침내 모든 일정을 미루고 섬을 찾아간다. 마침 타임지에 기고하기로 한 원고 약속도 있었다. 한 권의 중고책이 이어준 두 사람의 인연이 영화를 이끌어 간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타의에 의해서긴 했지만 북클럽을 만들고 모임의 중심 역할을 하던 엘리자베스는 적극적이고 두려움을 모르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다. 독일군을 증오하고 행동으로 표현하기도 했지만 병원에서 만난 독일인 군의관 크리스티안과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결국 사실이 알려져서 크리스티안은 전출되어 섬을 떠나게 되는데 가는 도중 배가 폭격을 맞아서 죽는다.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딸을 임신했다는 사실도 모른 체... 홀로 아이를 낳은 엘리자베스는 당시 독일군이 초소를 짓는 작업에 투입해서 혹사시키던 포로들 중에서 탈출한 한 소년을 돕다가 체포되어 섬을 떠나게 되고 그녀의 딸인 어린 '킷'은 도시가 키운다. 도시는 난산인 소의 출산을 돕다가 알게된 크리스티안과도 친구였다. 나라들은 전쟁 중이었지만 서로의 마음을 알아본 이들은 친구나 연인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 전쟁이 만든 편견이나 금기가 모든 걸 갈라놓았다. 북클럽 회원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엘리자베스의 부재는 그들 모두를 고통과 슬픔에 빠지게 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엘리자베스가 돌아오기 전에는, 아니 생사여부만이라도 확인하기 전까지 그들에겐 전쟁은 끝나도 끝난 게 아니었다. 함부로 선전포고를 한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 종전을 선포했다고 아무 죄 없이 파괴되고 고통받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전쟁도 끝나는 건 아니니까.


# 가장 슬펐던 장면


독일군이 '건지 아일랜드'를 침공하기 삼 일 전에 영국 본토에서 배가 오고 아이들만 피신시킨다. 안녕을 보장할 수도 없고,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는 부모와 어린 자식들과의 이별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일 것이다. 그중엔 우체국 국장인 에반과 그의 어린 손자 '일라이'도 있었다. 다행히 일라이는 5년 후에 다시 섬으로 돌아와서 지금은 할아버지를 도와 우체국에서 일하고 어리지만 북클럽에도 참여한다. 배가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배에서 뛰어내렸다는 아이, 오 년 동안 훌쩍 컸지만 금세 알아보았다는 에반의 말속에서 뜬금없이 그 '오년'이란 단어에 울컥했다. 어느 날 갑자기 홀로 떨어진 네댓 살쯤 된 소년의 5년은 우리가 가늠하는 수치의 시간은 아닐 것이다.


#글로 풀어야 자유로워지는 감정


그 누구보다도 엘리자베스를 기다리고 그녀를 둘러싼  헛소문에 괴로워하는 어밀리아는 자신들의 이야기가 발표되어서 오해속에서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를까 봐 타임지에 공개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한다. 그래서 그들과 독서모임에 관한 글을 쓰지 못하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줄리엣은 섬을 떠나지 않고 계속 독일점령기의 사건들을 조사한다. 그녀가 섬에 머무는 시간을 자꾸 연기하자 약혼자였던 마크는 엘리자베스의 소식을 가지고 직접 섬으로 찾아온다. 북클럽 회원들은 엘리자베스가 독일의 수용소에서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폭행당하는 한 소녀를 구하려다 죽었다고 한다. 그녀의 죽음은 댐처럼 가둬두었던 그들의 슬픔을 터지게 했지만 '도시'에게는 어떤 감정의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줄리엣은 마크를 따라 떠나야 했고, 세 사람은 이미 각자 감정의 이상기류를 눈치챘지만 무시한다. 하지만 런던으로 돌아온 줄리엣은 마크와는 헤어진다. 멋진 남자지만 각자의 가치관이나 원하는 것이 달라서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멍한 상태에 빠져있던 그녀는, 출판은 안 하더라도 그들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결심하고 집필을 시작한다. 어떤 감정들은 결코 마음속에만 가둬둘 수 없고, 다른 방법이 아닌 글로만 풀어낼 수 있다는 걸 그녀는 깨달은 것이다. 글이 완성되자 출판하지 않는 걸 전제로 원본은 매니저 겸 출판인이기도 한 오빠 시드니에게 주고 사본은 편지와 함께 '건지 감자껍질 파이 북클럽'에 보낸다.


나는 지난 몇 년간 편하고 익숙한 얼굴들을 찾아 헤맸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게 바로 당신들이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만약 책이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힘이 있다면 이 책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_ 줄리엣의  편지 중에서


원고를 받은 북클럽 회원들은 감동하고, 동봉한 편지를 읽어주던 '도시'는 편지 내용과 속표지의 for kit라는 문구를 읽자 뭔가 깨달은 듯 줄리엣을 찾으러 런던으로 떠난다. 기막힌  타이밍으로 그가 내린 배를 타고 건지로 가려던 줄리엣과 극적으로 마주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마크와 도시의 대결구도(?)를 위한 복선으로 꽃과 부둣가를 선택한 것 같은데 귀엽지만 좀 서툴고 진부한 장면들이었다.) 암튼, 두 사람은 섬으로 돌아가 킷과 함께 세 식구가 되어서 평화롭게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디즈니 버전(happily ever after)으로 영화는 끝난다.

해피앤딩을 좋아하지만 조금 열린 결말로 끝냈으면 어땠을까 싶다. 줄리엣이 보낸 원고를 받고 기뻐하는 북클럽 회원들과 그녀의 편지에서 두 사람의 유대감과 사랑을 확인하는 '도시'에서 끝나거나, 줄리엣이 혼자 건지 아일랜드로 다시 돌아가는 뱃머리에서 그녀가 처음 건지를 찾아갈 때 바라보았던 섬의 풍경을 비슷한 각도에서 다시 보여주면서 끝나는... 정성껏 차려놓은 밥상에서 반찬투정을 하는 것 같은 미안하지만 그냥 이런 아쉬움도 있었다는 말이다.



Do you suppose it's possible for us to already belong to someone before we've met them?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기 전부터 서로에게 유대감을 느끼는 것이 가능할까요?


Oh, very much so, 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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