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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Mar 29. 2024

우리는 여기서 시작했다.

The Best Exotic marigold Hotel, 2011



진짜 실패는 도전하지 않는 것이다. 성공의 척도는 실망을 극복하는 자세로 결정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 중에서 젊음만큼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 또 있을까? 하지만 그 가능성만큼 감당해야 하는 실패와 좌절의 무게도 만만치가 않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한 가지 힘듦으로부터 달아나려고 많은 것들을 포기하거나 잊어버린 채 살아가기도 한다. 막연하게 아직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세월은 마치 날렵한 야생동물이 담장을 '훌쩍' 넘어가듯 그렇게 훌쩍 사라진다는 것을 겪어봐야만 아는 게 인간의 약점 중 하나일 것이다.


어느 날 슬그머니, 사회적인 인식 혹은 개인적인 변화로 이제 더는 젊음이란 단어에 속할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이 온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달라지고 나는 그저 나이 든 인간일 뿐이라고 생각할까? 설마.. 몸만 늙지 마음은 그대로'라는 말은 실수나 무안함을 위한 변명이 아니다. 마음은 늙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여전함을 아무리 설명해 봐야 눈에 보이는 나이듦의 방해를 이길 수 없음을 알기에 숨기는 것이다.


더 베스트 엑소틱 메리골드 호텔

결국 마지막엔 다 잘 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아직 때가 아닌 것이다.


그들도 그랬다. 나름 열심히 살아온 시간을 수치로 환산해서 보상이 돌아온다면 편안하고 여유 있게 남은 시간을 즐기는 게 타당하지만 현실의 많은 변수들은 그 시간들을 엎어버린다. 게다가 이젠 누가 봐도 늙었고 삶에 지쳐 고단하다. 마치 흥행과 자기만족, 두 가지 모두 실패한 연극 무대에서 내려와 불 꺼진 객석에 앉아있는 것처럼 이제 어디로 가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절망한다. 그리고 이 절망의 순간에 영화는 시작된다.


이전까지는 전혀 모르는 타인이었던 그들이 비슷한 시간에  인터넷에서 같은 광고를 보고 있다. 편도 항공권을 주고 인도의 궁전 같은 호텔에서 우아한 영국문화를 경험하며 노후를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은퇴자들의 천국이라는 광고에 매료된 그들은 각자 다른 상처와 기대를 품고서 한 곳에 모인다. 하지만 어쩌면 그들의 궁극적인 바람은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너무 늦었다고 말할지도 모를 나이지만 다시 시작하고 싶은 것이다. 자괴적인 하찮음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바라는 대로 보지 않고 있는 대로 본다.


하지만 호텔은 그들의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건물은 허물어질 듯 낡고 전혀 관리가 되어있지 않다. 먼지는 기본 장식이고 벽장 속에는 새들이 떼거리로 살고 있고 심지어 문이 없는 방도 있다. 이쯤이면 인터넷 광고 사기 수준이다. 하지만 호텔을 다시 살리겠다는 의욕만 넘치는 젊은 주인 쏘니는 그저 희망에 차 있을 뿐이다. 광고 사진을 포토샵으로 처리해서 속였다고 항의하자 이 호텔의 미래를 미리 보여준 거라는 인도인 특유의 뻔뻔한 말발로 응대하며, 우리는 함께 이 호텔을 훌륭하게 만들어 갈 수 있다고 그들을 설득한다. 어이없게도 이건 그의 진심이기도 하다. 삶의 궁지에 몰려 다른 선택권이 없는 이들의 선택이어서 그랬을까.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지만 손님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적응해 간다.



개인적 취향으론 정말 좋아하는 주디 덴치(에블린)'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깊어졌고, '그레엄'(Tom Wilkinson, Dec.30, 2023 Died)은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장면들로 영화의 무게를 달라지게 했다. 그의 이야기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에블린, 더글러스, 진, 그레엄, 뮤리엘, 노만, 마지, 그리고 쏘니. 각자 처한 상황이나 바라는 것,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모두 다르다. 그리고 그 다름만큼 다양한 재미와 감동이 있다. 그들은 서로에게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아서 자칫 무심해 보이지만 그들의 삶에 대한 관조의 방식은 유연하다. 영화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단역의 인도인들까지 포함해서)의 관계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따뜻한 무관심이다. 어디선가 들은 표현인데 문득 떠올랐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면 그날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한다.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 중 누군가 갑자기 죽어도 별로 놀랄 일도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그들은 마치 처음으로 성인이 된 사람들처럼 각자의 슬픔이나 외로움을 다독거리며 자신의 마음을 다만히 들여다 본다. 관계로 인해 상처받은 마음을 새로운 관계 속에서 치유하면서도 결코 전적으로 의지하거나 조급해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기다리지 못해서 놓친 것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들이 각자의 편견과 오해, 망설임등을 한 겹씩 벗으며 비로소 진정으로 원했던 자신이 되어간다. 2011년에 개봉된 영화지만 인간의 평균수명이 급격하게 늘어가는 요즘에 다시 볼만한 영화가 아닌가 싶다. 장수가 축복이 되려면 단순한 '양'이 아니라 '질'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이민자들로 구성된 '모자이크 문화'인 캐나다에선 인도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내가 만났던 대부분의 인도인들은 아무리 인종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으려고 애써도 어쩔 수 없이 부정적일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민족성이 강한 민족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자주, 아름답게 표현된다. 서구인들의 시선, 특히 영국 영화에서 더 그런 것 같다. 어쩌면 역사적 사실에서 나오는 우월감이 만드는 야량일수도 있겠지만 그들에겐 인도에 대한 향수와 관대함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인도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가장 영적이고 속 깊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가 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또 넘어갔다. 여전히 현실에서 만나는 인도인들은, 거짓말을 잘하고 시끄럽고 말다툼이나 험담에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났지만 다른 인종과 무슨 일이 생기면 방금 전까지 싸우던 사람과도 이내 합심해서 잘잘못은 상관없는 집단 이기주의로 뭉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위생과 무질서와 향신료 냄새를 극복할 수 없어서 나는 절대 인도 여행은 못할 것 같지만(안 하는 게 아니고 못한다. 나는 자신의 부실함과 약점을 잘 알고 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무엇인가가 있으리란 걸 믿기에, 인도를 여행하고 인도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부럽다. 성인의 글에서 배우는 인도의 깊이가 아니라 지난한 일상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지키는 의리와 공손함과 사려 깊음은 현실에선 쉽게 만날 수 없을 것 같아서 영화로 아쉬움을 토닥거린다. 좋은 대사와 유쾌한 농담도 많고 가난마저도 안온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 속의 모든 풍경과 사람들이 아름다웠다.





우리는 여기서 시작했다.


기억에 남는 대사가 많아서 몇 개를 소제목처럼 사용했다. 그리고 처음과 마지막에 쓴 이 대사. 단순한 문장인데도 가장 나중까지 남았다. 어쩌면 언젠가는 '나는 여기서 다시 시작했다'라고 쓰고 있는 나를 상상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다가 2편이 있는 걸 알았다. 그들의 시작이 만들어낸 이야기, The Second Best Exotic Marigold Hotel이라는 제목으로 2015년에 개봉했다. 디즈니 플러스에 있어서 봤는데 결은 좀 다르지만 꽤 좋았다. 무엇보다 해피앤딩의 즐거움이 폭죽처럼 쏟아진다. 영화의 제목으로 사용된 '메리골드'는 꽃말이 나라마다 좀 다르긴 해도 주로 우정, 사랑, 행복 등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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