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에 공연 관련 정보를 찾을 일이 있어서 티켓 판매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재미있을 것 같아 개막기념 타임세일로 예매를 해두었다. 해당 공연에 관한 사전 정보는 없었고, 좌석 배치도를 보니 ㄷ자 형태로 되어 있어서 좀 더 흥미롭게 보였다.
금요일, 공연 시간에 맞춰 여유롭게 퇴근한 후에 공연을 보았다. 정면에서 볼 수 있는 좌석을 원했지만 그 자리는 앉지 못했고, 정면 좌석 바로 옆 1열을 예매할 수 있었다. 무대와 관객석의 단차가 거의 없어서 무대가 무척 가깝게 느껴졌고, 덕분에 연극에 더 잘 몰입할 수 있었다. 아무리 사전 정보 없이 예매했다 하더라도 대강의 줄거리를 알아야 더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기에 팸플릿에 나온 정보만 훑어보고 연극을 보았다.
첫 장면부터 강렬했다. 음악과 함께 섬유회사 판매 총책임자이자 주인공인 '트랍스'가 호기롭게 자동차를 몰며 등장한다. 물론 실제 자동차는 없고 자동차를 모는 상황을 음악과 춤으로 표현했는데 배우의 춤 동작이 예사롭지 않게 세련되고 날렵했으며 얼굴도 어쩐지 유명한 배우 같아 보였는데, 오랫동안 뮤지컬 배우를 하신 박건형 배우님이었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뒤이어 나타난 5명의 출연자들도 다들 개성이 강한 역할에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열연을 하셔서 어느 하나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인터미션 없는 90분의 연극이었는데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고 모든 장면이 흥미진진했다.
트랍스가 사고를 당한 후 머물게 된 시골집은 전직 판사의 집이다. 이곳에서 전직 변호사와 검사, 사형 집행관이 함께 저녁을 먹으며 모의재판 놀이를 하는데 트랍스를 피고로 초대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처음에 놀이처럼 참여하던 트랍스는 시간이 갈수록 놀이와 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덫 속에 빨려 들어간다. 모의재판 놀이를 주도하던 4사람(전직 판사, 변호사, 검사, 사형집행인)은 우스꽝스러운 차림새와 발성으로 등장부터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모의재판을 시작하는 단계부터 유죄를 확정 짓는가 하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 '뭐 이런 허술한 놀이가 다 있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지만 중간중간에 섬뜩함을 느낄만한 장치들이 있어 이 연극이 어떻게 흘러갈지를 계속 궁금하게 만든다.
보통의 연극 무대가 정면의 관객을 기준으로 했을 때 가로가 긴 직사각형이라면, 트랩의 무대는 세로가 긴 직사각형이다. 트랍스의 유죄를 밝히겠다며 종횡무진하며 이 무대를 누비던 전직 법조 관련인들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기괴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트랍스의 마음속에 살고 있는 다양한 목소리를 사람의 역할로 형상화한 것 같았다. 내 마음속에도 나를 단죄하려는 검사와 나를 변호하려는 변호사, 그리고 그 가운데서 판결을 내리는 판사, 실제로 일은 하지 않더라도 존재감을 잃지 않는 사형 집행인이 있을 것 같다. 관객과 무대를 최대한 가깝게 만든 것도 이 어처구니없고 정돈되지 않은 마음속 목소리를 최대한 느껴보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말을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마지막에 불이 꺼지고 여러 생각을 하느라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직면하기. 자동차 사고가 나고, 한적한 시골집에서 예상치도 못한 전직 법조 관련인들과 모의재판 '놀이'를 한다는 설정 하에서만 직면할 수 있는 나의 마음이 아득하여 계속 생각이 머물렀다. 집에 와서 작가와 원작, 희곡집 등을 볼 수 있는지 찾아봤다. 원작자는 팸플릿에도 나와 있듯 프리드리히 뒤렌마트라고 하는데 트랩의 원작이나 대본집은 없는 듯했다. 겨울방학에 이 작가님의 다른 작품들을 봐야겠다.
트랍스를 비롯해 무대 위에서 90여 분간 쉴 틈 없이 열연하신 배우들과 작가, 연출, 스텝들께 존경과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 세종문화회관 블로그 아카이브에 가면 트랩 무대 사진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https://blog.naver.com/sejongnanum/224070786258?photoView=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