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여름이 지나가면>을 보고
* 글의 제목 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 중 한 구절을 차용했습니다.
*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올여름에 이 영화를 친구들과 한 번, 지인과 또 한번, 총 두 번 보았다. 전체적인 흐름이 군더더기가 없고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자연스럽게 자기 배역에 잘 녹아들어 있는 영화이다. 기준, 영준, 석호, 찬수, 영문을 비롯한 모든 배우가 눈빛과 표정 등을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고 출중한 연기력을 보인다. 영준이가 영화 내내 오래 입은 듯 칼라가 찌그러지고 헐렁한 파란색 상의를 입고 있는 것이나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를 지닌 또래 친구들의 모습 등의 디테일도 잘 살려서 현실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영화의 중심 내용은 농어촌 특별전형 기회를 이용하기 위해 기준이가 지방 소도시로 가서 겪는 일들이다. 기준이가 엄마의 주도하에 전학 절차를 밟으러 학교에 방문한 날 운동화를 도난 당하고,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지내는 영준, 영문 형제와 가깝게 지내면서 일탈이 시작된다.
나쁜 애들은 아닌데...
영준과 영문은 보호자가 없지만 시설에 들어가기를 완강히 거부한 채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금전적인 면에서의 결핍을 도둑질이나 금품갈취(속칭 삥뜯기)로 채운다. 이들의 절도와 금품갈취는 어떻게 보면 소소하고 나름의 선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5만 원을 훔칠 수 있어도 2만 원을 훔친다. 5만 원을 훔친 것은 티가 나기 쉬워서 들킬 수가 있으니 지속 가능한 도둑질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금품갈취의 대상은 암묵적으로 정해진 구역 내에서 행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 형제의 나쁜 행동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갈취는 단순히 금전의 문제가 아니라 당하는 사람이 자괴감을 느끼는 사건이기도 하고, 긴 말 필요 없이 1원이라도 남의 것에 손대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라도 옳지 않은 것이다.
학교를 비롯한 마을에서도 이들 형제의 나쁜 행동을 알고 있지만 대충 넘어가기 일쑤이다. 형제는 금품갈취, 자전거 절도, 상점 털이를 저지르고, 영준이는 수시로 다른 친구들의 물건에 손대는가 하면 수업 방해를 하며 햄버거를 방금 먹고도 안 먹었다고 천연덕스러게 거짓말을 한다. 주변 어른들은 이러한 사실을 명시적 혹은 암묵적으로 알고 있지만, 적절한 돌봄과 교육을 제공하는 대신에 이들의 일탈 행위를 연민과 체념으로 눈감아주며 책임으로부터 거리를 둔다. "나쁜 애들은 아닌데,..."라는 말을 하면서도 의심과 경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기준이도 처음에는 엄마의 말대로 반장인 석호와 친하게 지내며 영준을 멀리 한다. 하지만 어이없는 폭력을 당한 기준이의 복수를 영준의 형인 영문이가 해주면서 기준이는 형제와 가까워진다. 기준은 다소 거칠게 살아가는 영문의 살아가는 방식을 살짝 동경하고 흉내 내려다 선을 넘는 행동을 하고, 그 때부터 균열이 시작된다. 그 사건으로 영문과 영준도 곤욕을 치르고 기준은 결국 다시 서울로 가게 된다.
넌 재미있지?
기준이를 이들 형제와 떼어놓으려는 부모님의 시도는 간접적으로 이루어진다. 아빠는 형제가 살고 있는 집을 불쑥 찾아가서 별 이유 없이 용돈을 주고, 엄마는 얘기를 좀 하자고 영문을 불러내되 그만 만나라는 말을 본인의 입으로는 하지 않는 식이다. 하지만 눈치가 빤한 영문이 이것을 모를 리 없다. 도둑질을 하고 금품 갈취는 할지언정 자존심을 구기고 싶지 않아 기준의 게임기와 운동화를 돌려준다.
게임기를 돌려주면서 영준이가 맞을 때 기준이가 영준이를 챙기지 않았음을 알게 되고, 기준이가 허세를 부리자 영문이가 "넌 재미있지?"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정당하지는 않지만 일종의 생계형으로 도둑질과 갈취를 하는 자신들과 부러울 것 하나 없어 보이는 기준이 허세를 부리느라 갈취하는 행동이 다름을 알고 있는 것이다. 너와 나는 결코 '우리'가 될 수 없음을. 경찰서에서 '공부를 좀 할' 뿐만 아니라 '이런일을 할 애가 아닌' 영준이가 엄마와 같이 조사를 받고 나올 때 영준과 영문이 내려와서 쳐다보던 것도, 거실 유리문을 깨서 조이 스틱을 돌려주던 것도 이런 현실에 대한 자각이자 배신감의 표현이었다.
영준이만 보이네요
기준이의 전출 서류를 챙기러 들른 학교에서 운동화를 도난당하던 당시의 CCTV를 확인하던 엄마와 선생님은 그동안 의심했던 영준이 외에 다른 2명의 아이들도 합세한 것을 보게 된다. 나머지 아이들이 누구냐는 엄마의 물음에 선생님은 "글쎄요, 영준이만 보이네요."라고 말을 하는 장면이 몹시도 씁쓸했다. 현실에서 나를 비롯한 상당수의 사람들이 보여도 보이지 않는 듯,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일들이 또 얼마나 많을지. 기준이네가 떠난 후 쓰레기 더미에서 게임기와 쓸만한 물건을 챙겨가는 영준과 영문 형제. 우리 주변에 다르지만 같고, 같지만 다른 모습으로 꼭 있을 것 같은 두 아이의 모습에 마음이 아득해졌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길
앞으로 어떤 사람들과 어떤 일을 맞닥뜨릴지 모르겠지만 영준과 영문, 두 아이들이 씩씩하고 올곧게 잘 살아가길. 서울로 떠나면서 그동안의 일을 없었던 것처럼 하고 싶은 기준이네도 여름 동안의 일들이 아무 일도 아닌 것이 아니길. 이 영화를 본 나도 이전과 조금은 달라지길. 여름이 지나간 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수 있길.
덧. 처음 영화를 볼 때는 온통 기준, 영준, 영문에만 초점을 맞추어 감상했다면, 두 번째로 영화를 볼 때는 '석호의 재발견'을 할 수 있었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덤덤한 얼굴로 수년간 반장의 역할을 해왔다는 석호. 적당한 리더십을 갖추고 있으면서 영준의 사정도 이해하고 있고, 기준이가 맞을 때 제일 먼저 달려가 선배를 말렸다. 주변의 일탈 행동을 모르지 않지만 휘말리거나 기웃거리지 않으면서 자기 삶을 꾸려나가는 인물이다. 이런 반장 캐릭터, 기시감이 들고 몹시도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