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떠나보내다
싸구려 동네 영화관에서 동시 상영이 흔하던 내 중학교 시절, 시험이 끝나면 친구들과 나는 비디오 대여점에서 공포물과 쪼끔 야한 비디오 테이프를 두어 개 빌려 보거나 영화관에 갔다. 2000원? 3000원인가? 이것만 내면 2편의 영화는 물론 청소년이지만 청불 영화도 은근슬쩍 끼어 볼 수 있었다. 중학교 3학년 어느 날 청불이었던 이미숙, 안성기, 강석우, 이혜영 주연의 ‘겨울 나그네’를 보러 갔다가 숨이 꼴딱 꼴딱 넘어가는 정사신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한동안 머릿속에서 고장 난 레코드판처럼 그들의 정사신이 반복 재생되는 바람에 종종 멍해지곤 했다.
뭐든 홀딱 홀딱 잘 빠지는 사춘기여서일까. 한동안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던 ‘겨울 나그네’를 다시 또 보고 싶어 벼르고 벼르다 영화관에 갔는데 이번에는 '겨울 나그네'가 아닌, 그와 함께 상영을 했던 낯선 귀신 영화에 홀딱 빠져버렸다. 아찔한 정사 신보다 더 아찔하고 환상적인 그 영화는 바로 '천녀유혼'. 환상적인 장면 구성과 음악, 슬프고도 아련한 스토리는 중학교 3학년 사춘기 소녀의 감성을 자극하기엔 너무나 완벽했다. 게다가 귀신 왕조현과 서생 장국영의 욕조 안 키스신에서는 꽃향기가 아찔했다. 이런 영화가 세상에 있다니.
'천녀유혼'에 홀딱 빠진 나는 그 길로 바로 장국영이 누군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영웅본색 2’에서는 주윤발이 성냥개비를 입에 물고 총알구멍 숑숑 뚫린 버버리를 날리며 악당들을 향해 기관총을 날리던 장면이 주요 흐름이었지만, 나는 공중전화 박스에서 하얀 점퍼를 입고 피를 뿜으면서 사랑하는 여인과 마지막 통화를 하던 장국영이 더 아리고 애틋해서 미칠 듯했다. 아기 이름을 ‘호연’으로 지으라 하며 쓰러지던 장국영과 아기를 낳은 행복한 여인의 미소가 겹치며 장국영의 노래가 흐르던 순간은 잊을 수가 없다. “몰와이만몽 약쌈 띡씨. 쎄이위인호 쌈원로 워헌씨~~” 부모가 죽었다고 이렇게 울었을까. 극장에서 꺼이꺼이 대성통곡을 했다. 도대체 왜 주윤발은 살리고, 장국영만 죽인 건지 ‘영웅본색 1’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영웅본색 시리즈를 찾아본 뒤 나는 동네 비디오 대여점을 돌며 숨어있는 장국영의 영화들을 찾아내서 빌려봤다. ‘성탄쾌락’, ‘위니종정’, ‘우연’, ‘연지구’, ‘살지연’, ‘신최가박당’, ‘종횡사해’, ‘백발마녀전’. 유치하기 짝이 없는 어설픈 영화들이었지만 장국영이 나와서 좋았다.
나의 덕질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내 사춘기를 뜨겁게 달군 나만의 연인, 장국영. 한자로 張國榮, 그들의 발음으로는 장궈룽, 영어로는 Leslie Cheung. 56년 9월 12일 생으로 2003년 4월 1일 만우절날 거짓말처럼 죽은 사람.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전 세계가 하나 되던 시절이 아니어서 그 시절 나의 덕질은 꽤나 아날로그적이었다. 장국영 사진이나 브로마이드를 얻기 위해 <스크린>이라는 영화잡지나 <하이틴> 등의 청소년 잡지에 장국영이 나오면 잡지를 구매했고, 병원이나 은행 등에 있는 잡지에 장국영 사진이 있으면 몰래 뜯어왔다. 문방구나 서점에서 장국영 사진이나 엽서가 나오면 있는 대로 사들여 하나라도 더 장국영을 모았고 그렇게 모은 귀하디 귀한 연인의 사진을 오려 물건들을 만들었다. 그 시절 유행했던 하드보드지 필통, 사전 케이스 제작은 온통 장국영이었다.
그의 노래가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사 모았고, 라디오에서 장국영 음악이 나올까 봐 늘 녹음 대기 상태였다. 장국영의 ‘투유’ 광고를 버전별로 녹화해놓고 돌려봤다. ‘영웅본색1, 2’와 ‘천녀유혼 ’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와 재생한 후, 그걸 또 다른 비디오 플레이어로 녹화하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나만의 비디오테이프를 만들어 수십 번도 넘게 돌려 봤다. 영화 대사와 노래가 너무 좋아 연습장에 소리 나는 대로 발음을 따라 쓰다가 아예 영화를 재생시킨 후 그 소리를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했다. 얼마큼 들었는지는 셀 수는 없다. 그냥 그 시절의 매일매일만큼 듣지 않았을까. 공부하기 싫을 때 친구들은 늘 선생님을 졸라 자칭 타칭 장국영 마누라였던 나를 불러내어 교탁 앞에서 '나'의 그 말도 안 되는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의 주제곡을 부르게 했는데 그럴 때면 부끄러우면서 무척 짜릿하고 꽤나 으쓱했다. 담임선생님이 장래 희망과 그 이유를 쓰라고 하셨을 때 매우 진지하게 캐나다로 이민 갈 장국영 집의 가정부로 취직하는 거라고 썼다. 대학을 들어가자마자 영어회화를 배워 캐나다에 갈 계획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89년 가을쯤, 이선희와 합동 공연을 하러 장국영이 내한했다. 나는 아주 당연하게 보충수업을 빼먹고 그의 공연을 보러 올림픽 체조경기장으로 갔다. 이미 긴 줄이 서 있었다. 혹시 몰래 들어갈 구멍이 없나 두리번거리는데 누군가 우리들에게 손짓을 하더니 리허설을 볼 수 있게 해주겠다 했다. 이게 웬 횡재인가. 그렇게 뒷문이 열리고 복도를 지나 공연장을 향해 가는 길에서 장국영을 딱 마주쳤다. 그렇게 리허설 장으로 가는 장국영과 나는 나란히 걸어 공연장으로 들어가는데, 나의 왼팔과 장국영의 오른팔이 나란히 부딪히고, 걸을 때마다 손등도 살짝살짝 스쳤다. 설레고 떨려 죽을 것 같은 중에도 “팔짱을 껴도 되냐”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은 벙어리요, 몸은 얼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공연은 감동 그 자체였다. 리허설뿐 아니라 본 공연도 숨 막히는 감동이었는데, 나는 모든 노래를 다 따라 부르며 미친 듯 춤을 췄다. 사람들이 모두 나처럼 미쳐 있어서 신발이 벗겨지는 바람에 바닥에 나동 구는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집에 왔다. 그런데 미친 듯 춤추는 나의 뒤통수가 9시 뉴스에 나왔다. 뉴스를 보면서 다시 삐져나오는 흥분을 조용히 억누르는 동안, 아버지는 공부는 안 하고 정신없는 애들이라며 허를 끌끌 찼다. (아버지 죄송해요. 그때 아버지가 허를 끌끌 차며 한심해했던 그 정신없는 애가 바로 당신의 막내딸이랍니다.)
그해 겨울. 워커힐 뒤쪽 어디에서 장국영이 공연을 한대서 친구와 나는 무작정 택시를 타고 갔다. 사인을 받겠다고 커다란 브로마이드와 손수 만든 사진첩 등을 양손에 들고 갔는데 택시가 내려주고 떠난 곳은 어둠이 짙게 내린 어느 산등성이었다. 멀리 워커힐이 보였을 뿐 워커힐이 아닌 인적 없는 산속에서 어둠이 순식간에 몰려오자 갑자기 겁이 더럭 난 우리는 손을 붙들고 눈물로 기도를 하며 “살려달라”라고 외쳤다. 그렇게 30분쯤 공포에 떨고 있을 때 봉고차 한 대가 지나갔다. 우리는 그 차를 타고 큰길로 내려왔다. 만약 그 차가 위험한 차였다면 어땠을까? 집으로 가는 길에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착하게 살자”라고 다짐을 했고, 그 징표로 가장 아끼던 장국영 브로마이드를 친구에게 선물했다.
90년도에 장국영은 연예계 은퇴 선언을 했고 나는 고3이 되었다. 방을 도배했던 장국영 사진들을 치우고 고3 코스프레를 하다가 대학에 입학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170이 전후의 키, 야리한 어깨와 팔다리, 나를 사로잡았던 그 아름답던 얼굴과 똑같이 생긴 한 선배가 자신을 “장국영”이라고 소개하며 웃고 있었다. 비현실 세계에만 있던 어린 시절 연인을 현실 세계에서 만나다니. 나는 한 달 만에 그의 연인이 되어 연애도 해야 했고, 학생운동도 해야 했고, 권총 찬 학점도 메꿔야 했으며, 매주 10개도 넘는 술 약속을 수호하며 새벽까지 술에 절어 사느라 너무나 바빴다. 덕분에 장국영은 내 삶에서 그렇게 희미해져 갔지만, 그의 영화가 개봉하면 최소 열댓 번은 챙겨봤다. ‘패왕별희’, ‘동사서독’, ‘해피투게더’, ‘아비정전’. 영화를 볼 때마다 더 깊어지고 아름다워진 그를 만났다. 그가 표현하는 인생의 외로움에 감응하며 배우 장국영을 아끼고 아꼈다. 내 가슴속 연인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큰아이를 키우고, 직장을 다니며 둘째 아이 출산을 한 달 앞두고 있던 2003년 4월 1일, 돌연 그가 죽었다. 언론은 그가 머물던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했다고 했다. 희한하게도 얼굴에는 외상 하나 없이 그대로 아름다웠다고 했다. 나는 놀라고 충격을 받아 얼얼했지만 조금 아쉽고 조금 슬펐다. 그 ‘조금’ 때문에 나한테 조금 섭섭했다. 그래도 언젠간 그를 애도하기 위해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엔 반드시 가리라 다짐만은 가슴에 품었다.
그러고도 11년이나 지난 2014년에서야 홍콩에 갔다. 그토록 가보고 싶던, 연인이 죽은 자리.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앞에 서기 전부터 나는 연인을 애도하는 슬프고 애절할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왔다. 막상 그 거리에 서자 빵빵거리며 지나가는 2층 버스들의 소음에 고막은 터질 것 같았고, 턱밑으로 후끈후끈 치받쳐 올라오는 매쾌하고 뜨끈한 도시의 열기에 숨이 막혀 그만 정신줄을 놓고 말았다.
"장국영이고 뭐고 여기 와봤으니 됐다."며 서둘러 잡아탄 택시 안에서 이제 살았다며 안도했다. 그제서야 훅 가슴이 아려왔다. 그보다 먼저 뒷통수를 가격하는 하나의 질문. 만약 호텔 앞에 지금의 내가 아닌 '뜨겁고도 발랄했던 어린' 나였다면 그렇게 허겁지겁 그곳을 빠져나왔을까? 모든 사라지는 것은 아리고 아프다. 어쩌면 눈가에 살짝 뜨거운 게 맺혔던 것도 같다. 못내 아쉽고 마냥 섭섭해하다 슬퍼졌던 것도 같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장국영’이 아니라,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를 뜨겁고도 발랄했던 어린 ‘나’를 애도하고 있었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