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은 과거의 메아리 속에서 길을 잃은 채 서있습니다. 바람은 오래된 돌벽을 어루만지며, 먼지와 함께 과거의 이야기를 속삭이지요. 성벽은 오랜 세월을 지켜낸 기억의 거대한 창고, 그 위를 걷는 발자국은 사라져 간 세월을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문득 시간의 경계가 모호해집니다. 어딘가에선 아직도 병사들이 창을 쥐고 벽을 따라 순찰을 도는 모습이 보일 듯하네요. 흙먼지 속에서 무거운 갑옷의 금속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성벽의 돌 사이에 감춰진 숨결이 바람에 실려 올라오는 듯합니다. 돌벽에 스며든 전쟁의 비명이, 그 위에 떨어진 핏방울들이, 잊힌 역사의 망령들이 이따금 귓가에 속삭입니다.
만리장성은 거대한 메타포, 감정과 기억의 성벽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도 이 같은 성벽이 있지요. 그곳엔 잊고 싶은 상처들이 숨겨져 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순수한 순간들이 고이 간직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성벽을 넘지 못한 채, 그 위에서 나지막이 흐느끼는 바람과 함께 조용히 침묵합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우리의 외부가 아닌, 우리 내면의 성벽이다.”
– 클라우디우스
벽에 손을 대면 느껴지는 차가운 돌의 감촉은 인간의 냉정한 이성 같습니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뜨겁게 끓어오르는 감정이 숨어 있다. 때론 성벽을 넘어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벽은 우리를 보호하는 동시에 우리를 가두는 경계선이기 때문입니다. 경계선을 넘어서는 순간, 우리는 한없이 취약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따금 성벽 위에 올라, 그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두려움이 문을 닫으면, 호기심이 창을 연다.”
- 알렉상드르 뒤마
성벽의 길은 끝없이 이어지네요. 눈앞에 펼쳐진 길은 우리의 인생처럼 보입니다. 고된 오르막길과 가파른 내리막길, 그 속에서 길 잃은 감정들이 헤매고 있습니다. 그리고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성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묻습니다.
“너는 무엇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서 있는가?”
성벽 위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는 말하는 듯하네요.
"모든 것은 지나간다."
시간은 모든 것을 쓸어가고, 성벽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까지 우리는 이 거대한 감정의 성벽을 따라 계속 걸어가야 합니다. 걸음마다 남겨진 발자국은 희미해져도, 그 속에 담긴 감정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습니다.
만리장성 위에 울리는 메아리는 끝없는 고요 속에서도 길을 찾지 못하는 듯, 벽을 타고 흘러내립니다. 그 소리는 때론 회한으로, 때론 소망으로 변주되며,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파고듭니다. 만리장성은 그렇게, 우리에게 기억과 감정의 무게를 느끼게 합니다.
"기억은 시간을 초월하는 단단한 벽돌이 된다."
- 마르셀 프루스트
이 성벽은 결국 우리가 쌓아 올린 것이지요. 그 속에는 기쁨도, 슬픔도, 그리고 아물지 않은 상처도 모두 섞여 있습니다. 만리장성은 그 모든 것을 품은 거대한 마음의 거울이자, 언제나 그 자리에서 묵묵히 우리를 비추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