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담스럽지만 괜찮아
거기서 오는 편지는 뭐든지 싫다. 그게 E-MAIL이든, 문자든, 아니면 집으로 날아오는 편지든 그냥 다 싫다. 내 한 달이 고스란히 들어있고, 몇 날 며칠 무엇을 먹었는지, 어딜 다녔는지 다 적혀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고 보는 순간, 아 나 또 왜이랬지? 가 자꾸 떠오른다. 길게 오면 길게 올수록 치명적이다. 이는 다음 한 달에 대한 스트레스를 가중시키고, 나의 생활을 무기력으로 꽉꽉 채운다. 안 받는 게 가장 현명하지만, 안 받고 살 수 없는 현실의 안락함 때문에 매달 한 번 우리는 그 고통을 겪어야 한다. 남들은 쉬운 일이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늘 힘겨운 일이다. 그저 한 달이 또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라는 안도감과 함께. '그래 인생이 이렇지 뭐'라며 탄식할 수밖에 없는 날. 내 월급이 사이버 머니로 탈바꿈해버리는 순간과 함께 받아 드는 건 카드값. 로그인과 동시에 로그아웃 되어 버리는 내 월급을 지로를 통해 바라보고 있자면, 뭔가 강탈당한 느낌이다. 내가 다 썼음에도 불구하고.
소비는 우리 삶에 땔 수 없는 숨쉬기이다. 인생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소비하는 행위이고, 우리는 이 행위를 통해서 자존감을 찾기도 하고, 기본적인 것들을 영위하기도 하고, 존재감을 부각하기도 한다.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도 일종의 소비가 들어가고, 가족을 꾸리는 일도,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도, 소비는 줄일 순 있지만 없앨 수는 없다. 그런데 어느새 우리가 소비에 잡아 먹히고 있다. 생산보다 소비가 많아질 때,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맞닥드릴 때, 우리는 절망감을 느낀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소비의 문화가, 세상이 우리를 압박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로 인해 물질의 소비를 넘어서 정신의 소비를 강요당한다.
아버지는 어릴 때 내게 ‘용돈기입장’을 적는 일을 매우 중요하다고 가르치셨다. 어디에 어떻게 정확히 돈을 썼는지 명확하게 하라고 했다. 돈은 버는 것보다, 쓰는 일, 그리고 쓰는 것보다는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꼼꼼하게 보셨다. 나는 그 시간만 되면 떨렸다. 내가 용돈을 쓰는 것에 대한 지적을 늘 받았기 때문이다. 가령 떡볶이를 사 먹었으면 무슨 상황에서 왜 사 먹었냐도 가끔 물어보셨다. 집에 와서 점심을 먹을 일이지 왜 이런 데다가 돈을 썼느냐라고 물으셨다. 한 번은 잔액이 맞지 않아 된통 혼나기도 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했고, 용돈 기입장을 거짓말로 적을 수 있는 기술이 생겼을 때, 나는 조금 더 자유롭게 돈을 썼다.
자유로워지기 시작하면서 관리는 소홀 해졌다. 사고 싶은걸 사면된다. 친구들과 떡볶이가 먹고 싶을 때 썼고, 학교를 오가면서 충동적으로 쓰고 싶은 곳에 돈을 썼다. 충분히 아버지 눈을 속일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과 그 자유를 만끽했다. 어릴 때, 퐁퐁 타는 걸 좋아했는데, 퐁퐁은 30분에 500원이었다. 그 당시 퐁퐁(트램블린)은 내게는 부릴 수 없는 사치였다. 떡볶이 500원어치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친구들과도 적당히 먹을양이었기에, 500원은 꽤 큰돈이었다. 함부로 탈 수 없는 퐁퐁이었고 가장 무서운 건 아버지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퐁퐁 탔어요”라고 말할 용기도 없었다. 그런데 용돈을 통제 없이 쓸 수 있게 되면서 마음껏 탈 수 있었다. 다만 그러고 나니 누구나의 예상처럼, 오래가지 못했다. 한 달 용돈이었는데, 열흘 도 못 가서 돈이 끝이 났다. 아버지를 계속해서 속일 수 있었지만, 용돈이 없어진 상태가 벌어진 것이다. 나머지 20일을 지낼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처음으로 부모님 지갑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뭐든지 꼬리가 길면 잡힌다. 아버지 지갑에 손을 대다가, 현장에서 발각됐다. 한 번은 봐주셨다. 그럼에도 사라지는 용돈을 채우기 위해서 나의 못된 손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3번째 발견되었을 때, 나는 아버지에게 죽기 직전까지 맞았다. 그리고 실토했다. 처음엔 용돈이 부족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용돈기입장은 언제나 완벽했기 때문이다. 그날 모든 것이 드러났다. 오랜 기간의 내 거짓말과, 나쁜 짓이.
지금은 내가 돈을 어떻게 써도, 아버지가 나를 혼낸다거나, 그리고 내게 몰래 손을 댈 수 있는 아버지 지갑도 없다. 전적으로 책임은 내게 있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에게서 끝이 난다. 돈을 쓰는 것도 나고, 갚는 것도 나다. 카드 청구일과 내 월급날은 동일하다. 오전 일찍, 돈의 로그인 소식에 기뻤다가, 잠시 후에 오는 로그아웃 문자에 절망한다. 돈보다 상대적으로 쓰기 쉬운 카드는, 아주 쉽게 내 지갑을 열게 만들었고, 그렇게 계획 없이 쓴 돈은 싸여서 한꺼번에 내 돈을 강탈해 간다. 분명히 쓴 건 나인데, 어디에 어떻게 썼는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버지에게 맞을 일을 없지만, 매달 얻는 정신적 타격은 그때 못지않다. 우리는 어쩌면 돈에 쫓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지각하지 못하는 우리의 소비에 쫓긴다.
더운 여름날 에어컨을 틀면 나오는 전기세, 추운 겨울날 따뜻하게 보낸 대가로 드는 난방료, 살아가는 집의 재산세, 누군가와 연락하기 위한 통신비, 먹고살기 위한 기본적인 식비, 부차적인 소비재들, 몇 번하진 못하지만 꼭 필요한 분위기 있는 외식, 그것 말고도 소소한 것들까지 별것 아닌 것들 합쳐져서 크게 다가온다. 그걸 매달 20일 날 마주해야 한다. 내가 쓴 건데도 부담스럽고, 그제야 이것 하지 말았어야 했네, 사지 말았어야 했네 후회한다. 그리고 반성도 일 년에 12번, 그리고 똑같은 것을 다시 또 12번. 절망의 20일을 감당해야 한다.
아직 무엇이 더 현명한 소비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어떻게 20일을 감당해내는 것이 좋은 지도 확실치 않다. 살다 보면 꼭 필요한 소비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많다. 그리고 부득이 생겨버리는 소비도 있다. 삶의 질을 형성시키는 소비의 삶은 때로는 감당해내야 할 만큼 크게 다가오기도 한다. 어느 정도의 적절한 통제와, 또 때로는 통제를 풀고 순간을 즐길 수 있는 시각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담담히 우리에게 오는 절망의 20일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삶이다. 20일이 부담스럽지 않은 삶의 만족도가 높다고 할 수도 없고, 20일이 너무 힘겨운 것이 잘못되었다고 보기도 힘들다. 다만 우리의 시각이 어디에 더 가치를 두는지 명확하게 할 필요는 있다. 그러면 조금은 그 부담에 대한 타당성을 우리가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20일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절망적이다. 작게 쓰던, 크게 쓰던 여전히 부담이다. 계획이라게 늘 계획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아예 안 쓰고 살 수는 없으니까. 다만, ‘잘 벌고 잘 쓰자’가 원칙이다. 그리고 여기서 잘 쓰자는, 정말 잘 쓰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라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좀 덜 아끼고, 그게 아니라면 더 아끼고. 그리고 그 부담은 클수록 내가 더 사랑했구나 마음먹는다. 그렇게 근근이 버틴다.
글_사진 이인석 (Myste.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