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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틱 Nov 18. 2021

또라이와 성질 더러운 오지라퍼가 붙었을 때 일어나는 일

정의와 오지랖의 차이

정의와 오지랖의 차이. 그걸 모르겠다.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행동이 지나고 보니 쓸데없이 나섰음을, 요령 없는 고지식이었음을 깨닫게 된 경우가 많았다. 반대로 요령이라고 피했던 일이 비겁한 짓으로 느껴져 오래도록 양심에 상처로 남은 일도 많다. 그러니 오십을 넘긴 이 나이에도 명확히 그 구분을 못하겠다. 

다만, 내가 오지라퍼라는 건 확실하다. 첫 직장에서도 사장이 비용을 아낀다고 내부공사를 직원들에게 시켜서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다 먼지를 뒤집어쓰며 공사인부처럼 일하고 있는데, 내가 몰래 흠모하던 여직원이 한쪽 사무실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길래 불같이 화를 낸 적도 있다. 흠모하는 마음은 마음이고 부당한 것에 대한 지적은 해야 직성이 풀렸던 것이다. 당연히(?) 그 여직원과는 소원한 사이가 돼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참 멍청했던 것 같다. 살면서 주위를 보니 그럴 땐 대개 살짝 눈감아주거나 오히려 더 배려를 하던데, 내가 무슨 정의의 사도라고 좋아하는 여자에게 그따위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될 일도 자처하는 오지랖, 적당한 타협 지점을 찾기보다 매사 옳고 그름을 따지고 첨예하게 굴며 나만 옳다고 생각한 오만이 가득했던 시절이었다.        


옳은 일을 했다가 엉뚱한 결과가 빚어진 경우도 있었다.

한 번은 회사 건물 복도를 지나다 고장 난 엘리베이터 안에 갇힌 중년 여성을 강제로 문을 따고 구해 준 적이 있었는데, 글쎄 이 여자가 며칠 후 박카스를 들고 와 고마움을 표시하더니 이후로도 툭하면 찾아와서 나를 비롯한 회사 직원들을 귀찮게 한 적도 있었다. 보험 설계사였다. 옳은 일을 하고도 억울할 수도 있다는 건 나이가 들고 나니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데, 아직도 요령 없이 시도 때도 없이 발동하는 ‘나섬’은 대체 정의감인지 그냥 오지랖인지 구분을 못하겠다. 때문에 거쳐 온 한 직장에서 전설적 사건을 만든 적도 있다.     


30대 초반 때의 일이다. 

난 어찌어찌해서 스카웃 된 회사에서 나보다 두 살 많은 젊은 사장 바로 밑 직책을 맡게 됐는데, 그만한 권력(?)을 가졌으니 좋을 줄만 알았다. 그런데 좋기는 개뿔. 권한은 없고 책임만 잔뜩 늘었다. 직원들 관리부터 업무지시까지 사장이 툭툭 나섰다. 업무를 총괄하는 내 지시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사장의 지시 때문에 늘 업무 혼선이 빚어졌다. 가장 힘들었던 건, 직원들의 불만과 사장의 불만 사이에 끼여서 받는 스트레스였다. 사장 말대로 하자니 직원들이 부당하거나 굳이 할 필요 없는 업무까지 짊어질 테고, 직원들 불만을 해소해 주려니 툭하면 사장과 마주해 입씨름을 해야 했다. 안 그래도 영리하지 못한 나는 ‘모 아니면 도’에다가 아닌 건 끝까지 아닌 성질머리까지 타고났다. 게다가 무엇이 옳은 것인지 확신도 없고 곤란한 입장에선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요령도 부족하던 젊은 나이였다. 그러니 매일 사장과 마주하면 기싸움을 시작으로 무엇이 합리적인지 논리 싸움을 해야 했다. 하루하루가 전투였다.      


지금은 노동자를 위한 여러 제도도 있고 (미미하지만) 오너의 갑질을 방지하는 장치도 있지만, 90년대만 해도 ‘사장’은 권력 그 자체였다. 오너 대부분이 뭐든 자기 마음대로 직원을 다뤄도 된다는 인식이 팽배했고, 직원들도 감히 직장 상사나 오너에게 부당함을 지적하는 것은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짓’으로 치부되던 때였다. 사회 인식이 그러했고 직장 문화가 그랬다. 게다가 나와 직원들의 직업은 영상 제작이었다. 밤샘이 일상이고 도제식 기술 전수가 이뤄지는 데다 출근은 있어도 퇴근은 없는 직업과 직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흔한 업무 체계나 룰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그저 아무 때고 어떤 일이고 간에 오너가 시키면 무조건 해야 했다. 언제 어떤 지시가 내려 올 지, 언제 퇴근할지, 어떤 업무를 주 업무로 삼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하루도 사장과 직원들 간에 마찰이 없는 날이 없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그때 그 사장은 분명 또라이였다. (자기는 이상주의자라고 했다.)

이상주의자. 근사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혼자 이상을 추구하면 상관없는데 현실과 동떨어진 자신의 이상을 남에게 요구하니 권력 남용이고 때론 업무적 폭력이 됐다. 프로젝트 완성에 필요한 업무 외에 본인이 꿈꾸는 목표치를 첨가했다. 프로젝트 컨셉과도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회사 여건 상 가능하지도 않고, 어차피 클라이언트는 관심도 없을 자기만족적 기대치였다. 사장은 조증까지 있어 집에도 잘 안 갔다. 잠시도 가만있질 못하는 데다 늘 즉흥적으로 일을 만들어 생각나는 대로 지시했다. 그런데 그의 그 조증은 업무적으로만 보면 엄청난 능력이어서 30대 초반 나이에 프로덕션을 차리고 업계에서 인정을 받아 설립 후 몇 년 만에 회사를 업계 매출 3위로 키워냈다. 그러니 혼자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인 데다 권위 의식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 있어 직원은 그냥 하수인이었다. 


그런데 나는 또 만만했느냐. 나는 나 홀로 정의로운(?) 오지라퍼였다. 성질도 더러웠다. 그러니 직원들 불만이 쌓이면 업무 수정과 지시체계를 수정하기 위해 사장과 치열한 전투를 했다. 그렇게 긴 싸움 끝에 한 문제를 해결하면 사장은 또 엉뚱한 불만을 야기시키니, 나는 제작은 부 업무고 사장과의 입씨름이 본 업무가 됐다.      

가족이 운영하는 회사는 들어가지 말라는 격언이 진리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싸모(사장의 아내)까지 툭툭 나타나 업무 간섭을 했다. 사장의 엉뚱한 지시도 소화하기 힘든 마당에 회사 정보나 실태도 모르는 싸모가 불쑥불쑥 나타나 쓸데없는 지적과 지시까지 하니, 자리에 없는 여직원을 옥상에서 찾아 눈물 닦아주는 날이 허다했다. 요즘 말로 ‘오너의 갑질’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 나는 두 명의 또라이들과 싸워야 했다. 또라이들과 한 성질 오지라퍼와의 싸움. 이 환상적 조합의 전투는 기어이 그 회사의 전설을 만들게 된다.


한 여름, 강촌으로 워크숍을 갔을 때다. 물론, 그간 분기마다 있던 워크숍이 항상 그랬듯 사장이 일방적으로 정한 일정이고, 말이 워크숍이지 술을 양념 삼아 직원들을 달달 볶으려는 뻔한 수작이었다. 이미 속셈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전날부터 밥맛이 없었다. 당일 날, 회사를 벗어난 직원들이 당시엔 생소했던 번지 점프도 하고 바이킹도 타며 모처럼 활짝 웃으며 잘 노는 동안, 난 곧 이어질 전투를 준비하느라 마음이 바빴다. 


드디어 저녁 술자리. 이제 사장이 직원 단속에 들어갈 시간이 된 것이다. 그런데 사장이 안 보였다. 직원들 중 누군가 찾아오겠다며 일어서는 걸 내가 막아 세웠다. 어쩌면 처음으로 평화로운 워크숍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워크숍에 처음 동행한 싸모가 복병이었다. 싸모는 그간 불만이 많이도 쌓였던 듯 날카로운 목소리로 포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 불만이라는 게 어이없게도 사무실 청소였다. 가끔 와보면 사무실이 청결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하긴, 회사 업무엔 무지한 싸모가 가질 불만이란 건 어쩌면 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싸모가 쏜 뜬금포에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일순간에 싸해졌다. 싸모가 날린 포탄은 자연히 팀 막내에게 떨어졌다. 이미 다른 형태의 공격에 대비해 전투 준비를 했던 나는 엉뚱한 지적으로 기습을 당한 기분이었다. 당황한 나는 즉각 반박하지 못하고 마음만 어수선해하고 있었다. 막내라는 이유로 기도 못 펴고 근무하고 있는 마당에 싸모가 지적질을 하자 팀 막내는 자동으로 고개가 꺾였다.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막내에게 싸모의 지적질은 오히려 더 기세 등등하게 이어졌다. 끝내는 화분에 시간 맞춰 물 주기라는 업무까지 추가됐다. 회사 청소는 이미 건물 청소업체가 있으므로 관리비를 내고 맡기자는 게 내 오랜 주장이었건만, 사장은 비용을 아끼려고 이 핑계 저 핑계 삼아 요리조리 피해 왔다. 그 배후엔 회사 금전 관리를 하는 싸모가 있음을 안 지도 오래였다. 마침내 꼭지가 돌았다.    


“사모님. 얘가 청소하러 들어왔습니까? 화분은 사모님이 좋아서 갖다 놨으니 사모님이 물 주세요. 얘들 그런 잡일이나 할 만큼 한가한 애들 아닙니다. 밤새우고도 한가하게 화분에 물이나 줘야 합니까?”     


내가 늘 사장과 싸우더라도 가끔 만나는 싸모에겐 깍듯해서 그런지 내가 정색을 하며 격한 목소리로 말하자 싸모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워크숍이 직원들 군기 잡는 댑니까?”      


나 역시 그간의 워크숍에 불만이 많았기에 기세를 몬답시고 싸모에겐 불필요한 말까지 튀어나왔다. 직원들 앞에서 무시를 당한 싸모는 이내 표정과 자세를 싸늘하게 고쳐 잡았다. 그리고 처음 들어 본 싸모의 찢어질 듯 하이톤 목소리. 그리고 쏟아지는 말들. 


‘청소는 당연히 직원이.’ ‘화분은 회사에 있는 거니까 직원이.’ ‘그런 게 뭐가 그리 힘들다고.’ ‘내가 사장 와이프인데.’ 따따따...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나는 지지 않고 반박을 했고 싸모는 말도 안 되는 합리화를 하며 위신을 되찾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반박에 재반박이 이어졌고 우리 둘의 말싸움 주제엔 이미 애초 불만 사안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오너에 대한 내 태도와 항명에 대한 지적이 자리했다. 그야말로 쓸데없는 기싸움이었다. 나 역시 술을 마신 터라 싸모와 내 목소리는 펜션 밖 산울림이 될 만큼 높아질 대로 높아졌다. 언쟁은 기싸움에다 술기운까지 더해져 격한 감정싸움으로 번졌음에도 우리를 말리는 직원은 없었다. 사장과 언쟁을 벌일 때도 은근히 응원하는 직원들이었고 그렇다고 싸모를 말리기에는 싸모는 ‘너무 먼 당신’이었다.

       

얼마나 입씨름을 했는지 싸모와 내가 뿜어대는 찬 입김에 방안 공기는 꽁꽁 얼었다. 대상만 다를 뿐 오너와 나의 싸움을 지켜보는 게 일상이었던 직원들은 축 늘어져 자기들끼리 말없이 술잔만 돌리고 있었다. 그때, 쾅하고 방문이 열어젖혀졌다. 그때까지 사라졌던 사장이 나타난 것이다. 방문을 걷어차듯 들어 선 꼴이 싸모와 나의 고성을 어디선가 듣고서 황급히 들이닥친 게 분명했다. 이제 사장과 본격적 전투를 치러야 할 차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싸모는 사장을 보자마자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더니 순식간에 눈물 섞인 목소리가 됐다.      


“팀장님, 어쩜 나한테 그렇게 무례할 수가 있어요? 그래도 내가 사장님 와이픈데. 흑흑.. ”     


그다음은 뻔하지 뭐. 마누라 두둔하는 남편사장과 한 성질 하는 직원의 전투.

이 전투가 전설이 됐는데, 생생함을 위해 그때의 상황을 장면으로 옮겨 보겠다.      


#1. 펜션 룸 안     


사장 : 야! 니가 사장이야?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아주 머리끝까지 기어오르네?     

 : 그동안 내가 기어올랐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관리자 입장에서 아닌 걸 아니라고 얘기했는데 그걸 기어오르다뇨. 그럼 시키는 대로 아무 말 없이 일할 줄 알고 날 데려 왔습니까? 그리고 회사 워크숍에 와이프를 왜 데려 옵니까?      

사장 : 뭐, 임마? 와이프? 이 새끼가 아주 기고만장했네. 그럼, 내가 사장인데 마누라도 못 데리고 오냐?      

: 그럼 워크숍이 아니라 야유회 구만. 야유회라고 하면 놀고먹느라 애들 군기 잡을 시간이 없으니까 워크숍이라고 한 거 내가 모를 것 같냐? 단 한 번이라도 워크숍다운 워크숍을 한 적 있냐구. 놀고, 술 먹이고, 직원들 달달 볶고 말이야. 그리고 너 자꾸 욕하지 마. 사장이면 사장 다운 품위를 좀 가지라구. 

사장 : 뭐 너? 이 새끼가 직원들 앞에서. 


(사실, 사장과 술집 같은 사석에서 입씨름할 때는 은근히 말깠다.)

어쨌거나 직원들 앞에서 저질 계략이 까발려지고 수모까지 당하자 주먹을 부르르 떠는 사장, 갑자기 웃통을 벗는다.     


사장 : 너 따라와. 내가 오늘 계급장 뗄 테니까 한판 붙자. 어차피 너랑은 살풀이 한번 해야  돼.      


(이 사건으로 상대를 너무 구석으로 모는 건 위험하다는 걸 알았다.) 

전투를 준비했건만 결투를 해야 할 상황이 되자 어이없어하는 나. 사장이 먼저 일어선다. 그런데 어디서 술을 먹었는지 휘청거린다. 직원들은 그제야 두 눈이 똥그래진다. 이게 뭔 일인가 싶은 것이다. 지금껏 말싸움 소리가 사장실 밖으로 울린 적은 많지만 몸싸움이라니. 사태가 심각해지자 직원들이 말리기 시작한다. 

말리면 더 한다고, 사장은 더 공격적으로 나온다.      


사장 : 안 일어나? 따라오라고!!     


(어쩔 수 없었다. 나도 혈기 왕성한 나이였고, 또한 몸싸움을 피하는 건 비겁한 짓이라고 생각할 나이였다.) 


  : (일어서며) 갑시다. 가자고.      


말리는 직원들을 뿌리치고 문을 나서는 사장과 나.      

#2. 펜션 뒤 주차장     


바닥에 자갈을 깔은 야외 주차장. 울그락불그락한 얼굴로 씩씩대는 사장 앞에 서있는 나. 

방금 전까지 말리던 직원들이 이젠 아예 우리를 에워싸고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 직원들 보는데, 그만 하죠?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사장 : 지랄하지 마, 새끼야. 너 내가 우습게 보이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장의 주먹이 날아온다. 그러나 사장은 어디선가 술을 먹었음이 분명하다. 그것도 많이. 내가 살짝만 움직여도 주먹이 허공을 가를 정도로 취했다. 자기 주먹이 허공을 가르자 쪽팔렸던지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더니 덥석 몸으로 덮치는 사장. (징그러웠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발을 걸어 사장을 바닥에 넘어뜨림과 동시에 사장의 목을 잡은 나...........라고 생각했는데 내 중지 손가락이 사장의 입속에 들어가 있고 사장의 입이 꽉 다물어진다.     


#3. 구급차 안      

손가락에 붕대를 칭칭 감고 누워있는 나. 앞에 여직원 중 한 명이 걱정스런 얼굴로 앉아 있다. 

요란한 싸이렌 소리와 깜깜한 창밖 시골 풍경이 어울리지 않아 몸이 으스스 떨린다.      


#4. 춘천 한림대 병원 응급실     

간호사 : 어떻게 다치셨다고요?

구급대원 : 손가락 마디가 찢어졌어요. 

간호사 : 어쩌다가요?

구급대원 : 물렸어요.

간호사 : 개한테요? 

구급대원 : 아뇨. 사람한테.

간호사 : ...??     


응급실 침대로 옮겨진 나. 한참 후, 당직 의사가 온다.     


의사 : 손가락이 찢어졌다고요? 어떻게 다치신 거죠?

 : 그게.... 물렸어요. 

의사 : 개한테?

 : ....아니, 그게... 사람이요.

의사 : 아, 네......에?....(어색한 시선을 주고받는 의사와 나.) 음... 이게 말이죠. 일단 찢어진 건 봉합하면 되는데, 이게 사람한테 물린 거면 좀 위험하거든요? 사람 입이 제일 더러워요. 세균도 많고. 그래서 감염 여부부터 확인을 좀 하고요 그다음에 봉합을 해드릴게요.     


의사가 돌아가자마자 갑자기 옆을 가리던 커튼이 홱 젖혀진다. 보니 사장이 바로 옆 침대에 누워 나를 쳐다보고 있다.     


사장 : 야. 많이 찢어졌냐?

 : 존나 많이 찢어졌다, 왜? 

사장 : 나도 앞니 두 개 나갔다.  .......근데 너 계속 반말할래? 

 : 그럼 이 상황에서 존댓말 하리? 나 1월생이니까 엄밀히 얘기하면 한 살 차이다.

사장 : 나 사장이야, 임마. 

 : 알았어, 알았다고.          


내 손가락이 사장 입에 들어간 순간엔 설마 했다. 그런데 사장의 입이 악다물어졌다. 내가 비명을 질러도 놔줄 기미가 안 보여 본능적으로 바닥에 깔린 자갈로 사장의 입을 내리쳤던 것이다. 아무튼, 사장과 나는 그렇게 응급실에 나란히 누워 마치 각자 다른 사람과 싸우다 온 사람들처럼 태연하게 대화를 하자 내 옆에 앉아 있던 여직원은 화장실에 가겠다고 후다닥 일어섰다. 뒤이어 병원 대기실에 있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둘의 대화가 어리둥절한 데다 사장과 나 사이에 앉아 어느 쪽을 위로해야 할지 난처했을 테다.     


이상이 오너와 직원이 언쟁도 모자라 몸싸움까지 하다 둘 다 병원에 실려갔다고 좁은 영상 바닥에 알려진 전설의 전말이다. 그들은 얼마나 심한 격투를 벌였으면 병원까지 갔겠나 하겠지만, 실은 무척 황당하고 저질스런 개싸움이었다. 

응급실을 벗어나 서울에 도착한 건 다음날 오후였다. 곧장 집으로 가려다 정리할 게 많아 회사로 향했다. 직원들이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일하고 있었다. 1박 2일 일정의 워크숍이 하루 만에 끝났으니 당연히 쉬어도 됐건만, 곧바로 출근한 직원들이 고맙고 추태를 보인 내가 부끄러웠다. 내게 걱정과 위로를 전하는 직원들에게 퇴근을 지시했다. 직원들이 우물쭈물 서로 눈치를 보고 나는 퇴근을 재촉하는 사이 회사 문이 열리고 사장이 들어왔다. 직원들은 일제히 자리로 돌아갔다. 사장은 출근한 나를 보더니 반갑다는 듯 씩 웃었다. 앞니 두 개가 없었다. (저질이지만) 결투를 벌인 다음 날이라 그날만큼은 또 부딪치고 싶지 않아 나도 내 자리로 갔다.    


이후로도 상처 소독을 위해 회사 근처와 집 근처 병원에서 두 번을 더 들었다. 뭐한테 물렸냐고. 그리고 깊은 상처를 보고 어이없어하는 의사와 간호사 얼굴을 봐야 했다. 지금도 남아 있는 흉터를 볼 때마다 헛웃음이 나올 만큼 어이없는 상처였다. 더 어이없었던 건 그날 싸모와 언쟁을 하던 그 시간, 사라졌던 사장은 자신의 차 안에서 여직원 한 명에게 작업을 걸고 있었단 것이다. 그 여직원이 바로 응급실에서 내 옆에 있던 그 여직원이었다. 그녀는 하마터면 사장을 옆에 두고 욕할 뻔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싫다는 여직원에게 추근댔으니 지금으로 치면 권력형 성폭력이고 그녀는 내게 상담하려고 한 셈이었다. 그 여직원이 그 시간에 차 안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동안 나는 방 안에서 입씨름이나 하고 있었으니,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그녀는 곧바로 내가 부탁해 놓은 회사로 이직했고, 나 역시 옮기고 싶었으나 남아있는 직원들이 걱정돼 줄기찬 전투를 하면서 지냈다. 확실한 오지라퍼인 대목이다. 여직원이 떠난 후, 싸모에게 그 사실을 일러바치려고 했으나 남의 사생활에 끼어드는 건 또 질색이라 시치미 뚝 떼고 있는 사장만 있는 대로 까버렸다. 


제 버릇 개 못준다고, 사건 후 일 년 만에 기어이 사장은 드나들던 어떤 작가와 바람이 나 딴살림을 차렸다. 싸모와 사장의 법적 다툼 후 회사는 싸모의 소유가 됐고, 회사 업무에 깜깜했던 싸모는 운영도 더더욱 몰랐으므로 내게 운영 전권을 넘겼다. 처음으로 평화로운 회사 생활을 한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내 생일 파티 겸 회식 때, 직원들이 건넨 선물 중에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는 게 있다. 그동안 사장 눈에 띌까 봐 보물처럼 제작실 비밀 장소에 숨겨놨던 비디오테이프인데, 거기엔 퀸스 타운 번지점프는 돼야 뛸 맛 난다고 허풍 떨다가 강촌 번지점프대에서 심청이 임당수에 몸 던지듯 뛰어내린 후, 두 눈을 가린 채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한 여직원과 바이킹에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고참 남직원, 그리고 사장과 나의 달밤의 개싸움, 내가 구급차에 실리는 모습까지 적나라하게 찍혀 있다. 참 희한한 놈들이다. 

테이프 라벨엔 ‘강촌 사태’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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