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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틱 Jun 30. 2021

패션 임파서블

가까이하기엔...

이십 대 중반 총각 시절 일이다.


입대 전 사는 곳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커피숍을 할 때 알게 된 여자 애를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 애가 반가운 건 아니었고 보자마자 생각 난 건 그 애의 언니였다. 

왈가닥 동생과 달리 늘 조용하고 단아한 그 애 언니는 내 가게와 마주 보고 그 애와 함께 레스토랑을 운영했었다. 수줍음이 많음에도 끼니때면 꼬박꼬박 들러 혼자 있는 내게 볶음밥이나 오므라이스 등을 만들어 끼니를 챙겨주곤 했다. 나보다 세 살 연상이었지만 그녀는 어느새 누나에서 여자로 내 마음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엉뚱하게 왈가닥 그 애가 나 좋아한다고 떠들고 다니며 괴롭히는 바람에 내 마음을 보일 수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보는 사이지만 그저 동생으로만 대하는 그녀 앞에서 난 혼자 속앓이를 했다. 여동생이 좋아하는 남자라 그런 거 아닐까 싶어 동생 애가 더 미웠더랬다.      


입대 후 속절없는 시간들이 지나고 첫 휴가 때, 기필코 고백하겠노라 다짐하고 찾아 간 그곳엔 다른 가게가 들어서 있었다. 아무리 밉다한들 동생 애의 연락처라도 받아 놓지 않은 내가 한심해 근처 공원에서 땅을 치며 병나발을 불었다. 


그랬던 그 애를,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동생’을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다.  

하나도 안 궁금한 그 애의 안부를 물으니 수다스런 팔푼이답게 그녀의 안부가 덩달아 튀어나왔다. 그녀는 가끔 그 동네에 가게 되면 내 얘기를 한다는 둥, 아직 결혼을 안 했다는 등 묻지도 않은 ‘심박’한 소식을 전해줬다. 그래도 난, 마치 그 애 언니는 하나도 안 궁금하다는 얼굴로 정말로 안 궁금한 그 애의 서식지와 생계수단 등을 묻는 치밀함으로 미리부터 설레는 마음을 숨겼다. 그 애가 역시 안 궁금한 자기 근황을 얘기하는 동안 난 그 애가 왕년에 술고래였다는 걸 용케 기억해냈다. 언제 술 한 잔 하며 그 시절 얘기나 하면 재밌겠다고 설레발을 치자마자 곧바로 내 휴대폰에 그 애의 전번이 찍혔다.      

사전작업을 마친 이상 이젠 용기가 필요했다. 이왕이면 ‘네 언니’도 같이 보자는, 다소 뻔뻔하지만 거부하기 곤란한 마무리 멘트를 날렸다. 군대 갔다 온 패기였다. 실망한 얼굴이 될 줄 알았던 그 애가 의외로 밝게 웃으며 흔쾌히 응해서 오히려 내가 당황했다. 푼수란 걸 깜빡했다.         


약속이 잡히기까지는 거의 한 달이 걸렸다. 인내의 시간을 조바심을 내며 견뎠다. 

드디어 약속 전 날, 꽃단장을 하고 싶어 옷장을 헤쳤지만 죄다 똑같은 옷만 튀어나왔다. 

안 되겠다 싶어 친누나에게 SOS를 쳤다. 누나가 한숨을 쉬며 한 조언은 난해했다.       


‘남자의 패션은 여름엔 제한적이라 정장 아니면 입을 옷이 거기서 거기다. 연상녀는 너무 튀지 않고 자연스런 멋이 나는 걸 좋아한다. 위아래 코디는 어쩌고 저쩌고...’     


당최 뭔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난 어릴 적부터 옷 못 입는다는 얘길 듣고 컸다. 아주 어릴 때야 어머니가 골라준 옷만 입으니 별 문제없었지만 사춘기 때는 모처럼 멋이라도 부린 날이면 친구들이 웃었다. 보다 못한 누나가 골라 던져 준 옷을 입을 때도 한마디 들어야 했다. 


 ‘넌 참.. 뭘 입어도 태가 안 나.’     


이후 나는 자신을 치장한다는 건 사치라 애써 우기며 대충 사이즈만 맞춰 입고 다녔다. 교복 자율화가 처음 시행될 때는 나 홀로 결사반대를 외쳤다. 결국 패션이란 나와 아주 먼, 결코 다가갈 수도, 이해하지도 못할, 어떤 특정 집단만이 향유하는 고급문화로 인식하고 살게 됐다. 요즘 유행이 뭔지, 남들은 보통 어떤 옷을 입고 다니는지, 패션에 관한 한 용어부터 의류 브랜드까지 모든 관심을 차단한 완벽한 패션 문외한이 된 것이다. 

그런 내가 저 심오한 말을 해석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니까 어떻게 입으라고?”

“...너, 남방 있어?” 

“어.” 

“무슨 색?” 

“흰색"

"그건 와이셔츠고. 남방 말야."

"와이셔츠가 남방 아냐?”

“...그럼, 색깔이나 무늬 있는 와이셔츠 있냐고.” 

“어.” 

“뭐, 체크무늬?” 

“체크가 뭔데?”

“....그러니까 바둑판같은 거.”

"줄무늰데?"

"무슨 색깔?

"분홍색."

"....."     


누나와의 긴급 교신은 엉뚱한 대답만 오가다 짜증만 유발했다.  

알아듣는 척 엉뚱한 대답만 하는 내게 누나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야, 그냥 멋 내지 말고 수수하게 대충 포인트만 줘서 입어.”

“그니까 그게 뭐냐고?”

“그냥 하얀 면 티에 스트라이프 반바지 입어.”

“스트라이프가 뭔데?”

“이런 씨.. 줄무늬, 줄무늬라고!!”

“그런 반바지 없는데?”

“나가서 사!!!!!!”     


짜증 섞인 고함과 함께 전화가 끊겼지만 이번엔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 있었다.      

‘음.. 줄무늬가 포인트구만.’ 


난 그 길로 동네 옷가게를 이 잡듯 뒤졌다. 

하지만 그 스트라이픈가 뭔가 하는 줄무늬 반바지는 우리 동네에 없었다.      


‘아, 이게 무척 앞서가는 패션이구나.’     


동네가 후져서 파는 가게가 없다고 판단한 나는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강남에서 가장 번화한 ‘시장’인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고속버스를 타느라 지나칠 때 보았던 터미널 지하상가는 그날따라 무지막지하게 드넓었다. 한 여름, 에어컨도 시원찮은 지하상가 골목골목을 땀을 뻘뻘 흘리며 샅샅이 뒤졌다. 그래도 이제 그 희귀 아이템만 찾으면 나는 내 생애 처음으로 앞서가는 패션을 장착하는 것이므로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헤매다 마침내 내부 진열대도 아닌 가판대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그 스트라이프 반바지를 발견했을 땐 너무 기뻐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쯧쯧. 무식한 것들.’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이 안쓰러웠다. 아무도 진귀함을 몰라 지나치는 보물을 나만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두 개나 샀다. 가로줄 하나, 세로줄 하나. 

집에 오는 느려 터진 버스 안에선 어서 빨리 입어보고 싶어 안달까지 났다. 

차라리 화장실에서 갈아입고 탈 걸 하고 후회했다.      


두발 정리까지 한 다음 날 저녁,

빳빳하게 다림질한 스트라이프 반바지를 장착한 후 의기양양하게 약속 장소로 향했다. 몇 년 만에 그녀와의 만남에 들뜬 나머지 버스를 잘 못 타서 두 번이나 갈아탄 데다, 낯선 동네의 유흥가 골목에서 한참을 헤매고 나서야 레스토랑 문을 열었다. 아직도 단아한 자태의 그녀의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으며 앉았건만, 그녀는 반가운 얼굴보다는 왠지 존댓말이라도 할 것 같은 어색함을 얹고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군대 다녀온 내가 드디어 남자로 보이는가 보다.’     


자신감이 마구 솟구쳤다. 

원래 수줍음 많은 누나였지만 그날의 공기는 예전의 그것과 다른, 설레게 하는 무언가가 깔려 있었다.      

뛰는 가슴을 고르고 나니 그제야 쑥스러워하는 그녀 옆에서 뭐가 그리 신났는지 숨 돌리기도 전에 벌써 맥주잔을 채우는 왈가닥 동생 애가 보였다. 그 애는 혼자 건배를 외치고 지 혼자 마시며 나와 그녀를 번갈아보고 떠들었다. 나와 그녀가 내는 어색함으로 볼 때, 누가 보면 딱 중매쟁이로 여길만했다.      


시간이 흐르고 술이 흐르자 어색함도 가시고 얘기는 현재 근황들로 흘렀지만, 

그녀와 나는 왜 아직 결혼을 안 했는지, 계속 독신으로 살 건지, 애인이 있는지 같은 진짜 궁금한 얘기가 이어졌으면 좋았겠지만.. 

그럴 때마다 톡톡 튀어나와 화제를 지 얘기로 둔갑시키는 그 애의 끔찍한 능력 때문에 그런 얘기는 답 없는 서먹한 질문으로만 남았다. 그녀가 툭하면 끼니를 거르던 나를 위해 만들어주던 볶음밥이나 떡볶이 얘기, 내가 흔들리던 의자 다리를 고쳐주던 얘기, 몇 달 동안 공포에 떨게 했던 너구리 닮은 쥐를 잡은 기념으로 가게 문 닫고 밤새 마셨던 얘기 등을 하고 싶었건만, 그리고 술김에 그간 내가 품었던 감정을 슬그머니 내놓고 싶었건만, 역시 그 애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은 꺼내지도 못했다. 속이 타서 맥주만 들이키니 화장실만 들락날락거렸다. 화장실에서 열을 식히고 돌아올 때마다 동생 지지배는 뭐가 그리 좋은지 나만 보면 혼자 킥킥대다 말고 게 눈 감추듯 표정을 숨겼다. 내가 아직도 그리 좋단 말인가? 참 속 없는 애라 생각했다.          


그 말괄량이 동생이 주당임을 이용해 잡은 약속이지만, 그 애가 빛의 속도로 비운 맥주병을 보니 나중엔 열불이 날 지경이었다. 분위기 쇄신이 필요했다. 그래서 호기로운 목소리로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자리를 옮기는 사이 동생을 떼어 놓을 묘안을 찾을 요량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동생 눈치를 봤다. 

늘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좋아했지만, 그날은 아니었다. 이럴 때 ‘동생아. 우린 좀 더 있다 갈 테니 넌 좀 먼저 가렴.’ 하면 좋겠구만, 자꾸 동생의 눈치를 보는 모습이 영 답답했다.  

그런데 어럽쇼? 뜻밖에도 술고래인 동생 애가 웬일로 손사래를 쳤다. 마시면서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2차를 마다할 애가 아닌데, 이상한 일이었다. 자기를 떼어놓으려는 나의 계략을 눈치라도 챈 것인지, 그냥 그곳에서 더 먹자는 동생 지지배의 꼴을 보니 역시 오늘은 뭔가 날이 아니다 싶었다. 

뭐, 어쩔 수 없이 아까운 맥주 몇 병이 더 비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자리를 일어서려 하자 그녀는 콜택시를 불렀다. 그리고 나더러 타고 가라 했다. 아직 버스 시간이 남았기에 난 그냥 가려했지만 그녀는 그녀 답지 않게 고집을 피우더니 나를 기어이 콜택시에 태웠다.      

‘아까 동생을 좀 이렇게 보내지.’      

아쉽고 섭섭한 마음을 아직도 나를 배려하는 그녀의 세심함으로 달래며 집으로 향했다.


그날 장착한 희귀 아이템 패션은 그날 동생 지지배 때문에 빛이 바랜 것 같아 며칠 동안 매일 입고 다녔다. 그러던 중 볼일이 있어 옆 동네 친누나 집에 들렀을 때, 문을 열던 누나는 이마를 짚고 쓰러질 듯 말했다.      


“야... 너... 왜 빤스 바람으로 다니고 지랄이야?”     


그 순간, 다리에 힘이 쪽 빠졌다. 한 여름 하늘도 노랬다가 하얬다가 했다. 

영혼이 폴폴 빠져나가는 느낌을 알게 됐다. 수줍음으로 착각한 그날 그녀의 표정이, 내가 화장실에 들락거릴 때마다 킥킥대던 동생 지지배의 얼굴이, 빤스를 다림질하던 시간이,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유흥가를 활보했던 순간들이 촤르르 이어져 나도 휘청거렸다.        


누나가 매형 반바지를 꺼내 줬지만 무슨 오기였는지 그걸 또 뿌리치고 돌아서 걸었다. 

충격에 순간적으로 미친 건지도 모르겠다. 집까지 온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면..  


팬티는 그냥 팬티지 트렁크 팬티는 또 뭔가. 빤스는 속옷 가게에서 은밀하게 팔아야지 대놓고 좌판에 깔면 어쩌자는 건가? 나중엔 그 가게를 폭파하고 싶어지기까지 했다.     


잠깐 흐르다 말 한낱 형식에 불과한 주제에 내게 비참한 최후를 안겨 준 그 노무 패션.

가까이하기는 개뿔. 애시당초 인연 없던 내가 모처럼 조금 친해지려 했다가 완벽히 거절당한 기분이라 이젠 미련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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