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라.
도움이 되면 좋겠지만, 만약 그게 여의치 않다면 적어도 폐는 끼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쯤일까? 어머니가 내게 해주신 말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있다.
그 말을 반드시 지켜서 실망시켜 드리지 말아야지! 그런 사명감을 느끼며 살아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어머니의 성격을 닮은 것인지, 그 말이 무의식 중에 영향을 준 것인지 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싫어한다. 내가 착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보통 사람이다. 보통 사람들이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한다. 착한 사람은 거기서 더 나아가 남을 돕는 사람이다.
피해라는 기준도 사람마다 다르다. 내가 느끼는 피해가 다른 사람에겐 아무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면 그저 내가 예민한 사람일 뿐이다.
아버지는 약간 다른 의견을 가지신 분이다. 착한 것은 좋으나 세상은 그렇게 이상적이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인간군상을 만나며 느끼신 것이라고 한다. 나쁘게 살라고 가르친 것이 아니다. 마냥 순진하게 모두가 착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지 말라고 경계심을 심어준 것이다. (정작 본인은 종종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배려를 하신다.)
그렇게 꼿꼿하게 옳은 말만 하면 누군가에게 눈엣가시가 된다. 사람이 굽힐 때는 굽힐 줄도 알아야 한다.
이건 내가 중학생쯤 아버지가 하신 말로 기억한다. 가끔은 내가 너무 이상적으로 옳은 생각을 펼치면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난 그때 그 말이 싫었다. 세상이 어떻든 간에 난 나의 신념을 가지고 살 것이고, 세상이 썩었다고 해서 나도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고 있다. 아버지의 마음이 무엇인지.
여전히 내가 지키기로 한 신념은 유지하려고 노력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자괴감이 드는 순간들이 많아진다. 여기, 그러한 나의 사소한 일화들을 소개한다.
1) 산후조리원 식판 리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산후조리원에 있다. 사실 미루고 미루던 이 주제에 대해 쓰게 된 계기도 여기서 있었던 일 때문이다. 산후조리원에서는 식사가 제공된다. 나와 같은 보호자 식사도 신청 시 식비를 내고 먹을 수 있다. 방으로 직접 가져다주고 식사 후에 문 앞 테이블에 식판과 식기를 올려놓으면 된다. 테이블은 식판보다 조금 더 크다. 그래서 하나의 식판을 올려놓으면 가득 찬다. 하지만 보호자 식사까지 하면 두 개의 식판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에 식판을 90도 틀어서 두 개를 놓아야 옆 테이블을 비울 수 있다.
난 이게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옆 방에서 쓸 테이블까지 내가 차지하면 옆 방은 쓸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보다 빨리 식사를 마친 옆 방이 내놓은 식판을 보고 실망했다. 식판 두 개를 나란히 놓아 우리 테이블까지 넘어와 있었다. 그러면 남은 공간에는 식판 한 개만 간신히 놓을 수 있다. 결국 내가 옆 방 식판까지 다시 정렬하고 공간을 확보한 후 우리 식판을 놓았다. 내가 먼저 식사를 마쳤을 때 옆 테이블을 침범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었는데 돌아온 것은 배려 없는 모습이었다.
나의 당연함이 누군가에게는 아니었다. 내가 느끼는 불편한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별로 불편한 행동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내가 배려가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공간이 없으면 그냥 만들어서 놓으면 그만이지~' 그냥 이렇게 생각하면 되지 않는가. 먼저 배려를 기대하기보다 아무렇지 않은 일로 넘기고 마는 것이다.
2) 지하철 매너
직주근접 생활을 해서 지하철을 탈 일이 많지 않았다. 직장이 이전했을 때도 통근 버스가 있어서 편하게 다녔다. 그러다가 이직 후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다 보니 몹시 힘들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자다가 오른쪽 종아리 근육 경련으로 놀라서 깬 적도 있다. 육안으로 보이는 근육의 꿈틀거림과 고통에 깜짝 놀랐다. 가만히 서서 가는 지하철 탄 것 가지고 무슨 종아리 근육 경련인가 싶을 것이다.
나는 만원 지하철에서도 최대한 옆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정말 꽉 찬 지하철에서 완전히 접촉하지 않는 일은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그럴 땐 최소한 내 옆 사람이 미는 힘을 다음 사람에게 전달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버틴다.
내가 엄청 덩치가 큰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작지도 않아서 옆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최대한 웅크리는데 그 자세가 일단 너무 힘들다. (그래서 지하철의 좁은 좌석에도 잘 앉지 않는다. 웅크리는 것이 서 있는 것보다 힘들다.) 그렇게 하다 보면 다리도 점점 차렷 자세에 가까워진다. 지하철이 가속하거나 감속할 때 그렇게 서 있으면 중심 잡기가 매우 힘들다. 그래서 자세가 너무 힘든 것이다. 그러다 보면 결국 지탱을 위해 한쪽 다리만 살짝 넓게 두는데 정면에서 보면 내 몸은 과장을 보태 '<' 이런 모양이 된다. 허리가 옆으로 휘고 한 다리에 무게 중심이 집중되는데, 내 체중만이 아니라 옆 사람이 전달하는 관성까지 더해지니 가끔은 정말 넘어지겠다 싶은 순간도 있다. 당연히 한쪽 다리에 심한 부하가 온다. 그러니 그 대미지가 누적되어 어느 날 종아리 경련이 발생한 것이다. 나도 옆 사람에게 조금 관성을 맡기면 좀 편할 수는 있다. 하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 혼자만의 고집이다. 내가 그걸 겪어보니 별로인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조금씩 더 스스로 버티려고 하면 남에게 전달되는 관성이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작은 힘의 나눔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위 사례는 어쩌면 특이한 나만의 불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하철에서는 먼저 내리기 전에 타는 사람, 스마트폰을 쓰느라 팔꿈치로 치는 사람, 가방으로 지하철 흔들림에 맞춰 계속 치는 사람 등 다양한 불편을 마주할 수 있었다. 젠더 갈등을 말하려는 것은 절대 절대 아닌데, 나는 괜한 오해라도 절대 사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타인과 접촉을 피하려고 한다. 하지만 반대로 아주머니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 몸을 터치하고 지나가거나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키 차이로 인해 더욱 빈번하게) 가방으로 지속적으로 엉덩이를 치거나 할 때가 있다. 그건 나도 기분이 나쁘다. 내가 문제를 삼거나, 성별이 바뀌었으면 사건이 될 수 있다.
그중에서 특히 달갑지 않은 것은 바로 백팩이다. 여유로운 지하철 말고 만원 지하철에서 뒤로 멘 백팩이다. 물론 백팩을 뒤로 메는 것은 개인의 자유다. 단순히 메고 있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그걸로 툭툭 치는 것이 불편하다. (몸이 불편하거나 너무 무거워 힘이 부족한 경우처럼 어쩔 수 없는 경우는 예외다.) 하지만 내가 속이 좁기 때문에 불편함을 느낀다. 왜냐하면 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백팩을 손에 든다. 힘이 남아 돌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노트북을 넣고 다니기 때문에 무겁다. 하지만 만원 버스나 지하철에서 백팩을 휘두르며 나를 치는 것이 별로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그래서 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스스로 속이 좁다고 생각하는 포인트는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힘들어도 매번 참고 가방을 들고 가는데 왜 나는 타인의 백팩에 맞아가는 불편함을 느껴야 되는가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간혹 그런 사람을 만나면 나도 바로 백팩을 메서 어떤 기분인지 느끼게 해주고 싶은 마음도 든다. 이것이 내가 착한 사람이 아니라 보통 사람인 이유다. 아닌가? 그냥 나쁜 사람인가?
3) 공중화장실 손 씻기
공중화장실에서 용변 후 손을 씻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손 씻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솔직히 좀 충격이었다. 생각보다 그 비율이 높았기 때문이다.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면서 직접 목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만큼 흔하다. 공중화장실을 이용한다는 것은 외부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손 씻기를 하지 않은 사람들은 결국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다른 어떤 것에 그 상태로 접촉한다는 의미다. 지하철 화장실을 이용하고 씻지 않은 손으로 지하철 손잡이를 잡을 것이다.
왜 안 씻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오물이 묻은 것도 아닌데 왜 씻어야 되는지 모르겠다는 논리를 펼치는 것을 들어본 것 같긴 하다. 여전히 보이지 않는 세균에 대한 위협은 있다. (그래서 변기도 물을 내릴 때 뚜껑을 닫으라고 한다.) 물론 이런 세균 때문에 당장 치명적인 건강 이슈가 생기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 보이지 않는 입자도 묻지 않았다고 치더라도 기분의 문제다.
오물이 묻은 것도 아닌데 괜찮지 않냐는 논리라면, 어느 식당에서 당신은 화장실에 가서 먹으라고 해도 불만이 없어야 한다. 오물을 먹으라는 것도 아니고 음식에 묻은 것도 아닌데 괜찮지 않은가? 하지만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내가 내 돈 내고 먹는데 왜 그런 차별 대우를 받아야 하냐고 역정을 낼 수 있다. 이 경우엔 그 식당을 이용하지 않는 방법이 있다. 그렇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을 방법이라도 있다. 하지만 씻지 않은 손으로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행동은 타인이 스스로 선택할 수가 없다.
(아닐 것이라고 믿지만) 어쩌면 내 가족이, 가까운 지인이 이렇게 행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내가 마냥 사람들을 혐오하거나 그런 것이 아니다. 그냥 간간히 느끼는 불편함 정도로 생각해 주면 좋겠다. 한 순간의 감정 폭발도 아니다. 이런 사사로운 일에 매번 일희일비할 이유도 여유도 없다. 단지 비슷한 경험이 반복되고 쌓여온 것을 몇 가지 가벼운 일화로 승화시켰을 뿐이다.
드라마화까지 된 웹툰 제목이 하나 떠오른다. '타인은 지옥이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타인이다. 나 또한 타인에게 어떤 불편함을 주고 있을지 모른다. 누가 옳고 그른가의 문제가 아니다. 서로 생각이 다를 때 불편함은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