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버리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에세이다. 책의 물성을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15*181 크기로, 100페이지에 불과한 작고 얇은 책이다. 일반적인 에세이에 비하면 3분의 1도 채 안 되는 분량이다. ('아무튼' 시리즈보다도 분량이 적다.) 그럼에도 양장에, 가오옌의 세밀한 삽화를 넣고, 빳빳한 내지를 사용하고, 제목을 금박으로 꾸미는 등의 고급화 전략 끝에, 13500원이라는 가격표를 달았다. 요즘 시중에 나오는 일반적인 에세이에 육박하는 가격이다. 작지만 완성도 있는 하나의 물성을 가진 책을 지향했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름값이 조응한 결과라지만, 분명 기백이 느껴지는 가격임엔 틀림없다. 조금 의외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책값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책을 읽기 전이었지만) 독자들을 꾸준히 매료시켜 온 하루키는, 그 쓰기의 역사만으로 시장의 암묵적인 가격표를 뛰어넘을 자격이 있는 건지도. (책값이 백만 원이라도, 사볼 독자가 있다면 그렇게 책정하는 게 이상할 건 없다)
어느 작가의 책도 이런 기백을 갖긴 힘들 것이다. 비슷한 분량의 책을 책장에서 찾아보니, 장 그르니에의 <어느 개의 죽음>이 있다. 내가 소장한 책은 구판으로, 양장은 아니지만 칠천 원대고, 새 디자인으로 옷을 갈아입은 개정판도 만원을 넘기진 못했다. 하루키는 가성비보다, 가심비를 출판사의 전략으로 내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일 것이다. 어쩌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난 이 작은 책을 손에 드는 것만으로, 생각할 거리를 얻을 수 있었다. 하루키 같은 작가가 되는 일은,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분량에 구애받지 않고 출판할 수 있는 작가가 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건 게임으로 치면 끝판왕의 레벨이고, 그만큼 독자들을 만족시켜 왔다는 뜻이니, 궁극적으로 작가라면 지향해야 할 이상향일 것이다. 하루키의 새 책은, 그 외피만으로, 작가로서 난 어느 지점에 서 있는가, 하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 매우 현실적인 감각이 되살아났다. 지금 이 순간, 겸허한 마음으로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서른두 가지 남짓의 이유가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다. 손바닥 위에 놓인 <고양이를 버리다>는 그 내용과는 무관하게, 내게 겸손을 가르치고, 내 알량한 자아도취나 허영을 꾸짖는다. 묘한 독서 경험이다.
2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면,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풀어낸 책이다. 아버지와 함께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를 해변에 버리러 간 이야기로 시작해서, 국어교사였고 하이쿠를 쓰던 젊은 시절의 아버지 이야기,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중일 전쟁 참전 이야기, 그때 받은 트라우마, 가계의 역사 등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글을 본격적으로 쓰든 안 쓰든 우리 중 누군가는 부모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내게도 예전부터 그런 욕구가 있어왔다. 에세이도 아니고, 무려 소설로, 엄마의 굴곡진 삶을 한 번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으니까. 그건, 부모를 기억하는 최고의 방법 중 하나이고, 따라서 효도(이 말이 최근 들어 좀 구닥다리처럼 느껴지긴 해도)라는 측면에서도 유의미하며, 부모를 떠나보낸 후에도 자신에게 남길 수 있는 최선의 위로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어떤 작가들은 부모의 삶을 기록하는 작업을 해왔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폴 오스터도 꽤나 공을 들여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기록하고, <고독의 발명>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붙인 책으로 출간했다. 역시 폴 오스터를 좋아한다고 알려진 하루키는 어쩌면, 폴 오스터의 작업에서 영감을 받아 아버지의 삶을 기록해보자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루키의 아버지에 대한 사적인 기록을 읽는 동안, 대부분의 독자들은, 내 아버지의 삶을 한 번 떠올려 볼 것이고, 더 나아간 경우엔, 내가 아버지의 삶에 대해 기록한다면 어떻게 기술할 수 있을까를 생각할 것이다. 이런 생각들만으로도, 이 작고 얇은 책을 읽는 의미는 충분할 것이다.
아버지와 교류하고 있지만 마음의 어느 영역에 빗장을 채우고 지내는 이가 의외로 많을 거라 짐작한다. (객관적인 근거는 없지만, 나부터가 그러니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 하루키는 병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거의 직전에 화해 비슷한 대화를 했다고 하지만, 그 화해의 완성은 아마 이 책 쓰기를 마친 순간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만일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쓴다면 어떤 일화로 시작하게 될지를 생각해보았다.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화해가 시작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루키는, 이 개인적인 글에서 가장 말하고 싶은 것은,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전쟁에서 살아오지 못했다면, 어머니의 약혼자가 전쟁에서 죽지 않았다면 하루키 자신은 존재하지 않았을 테고, 이 글 역시 없었을 거라고 한다. 즉 우리의 생엔 지나온 역사가 지층처럼 쌓여 있는 것이다. 부모님을 만나게 하고, 자식을 낳을 수 있었던 환경을 가능케 했던 역사적 맥락이 첨가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사적인 일을 모르는 사람 앞에 풀어놓아도 되는 이유다. 모두가 거대한 공적 역사의 일부분이니.
논리나 이론 상으론 그래도,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아버지에 대해 말하거나 쓸 수 있지만 이 책에 관심을 둔 건 역시, 하루키의 책이기 때문인 건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 모두가 역사의 일부라지만, 사람들이 모든 삶의 역사에 관심을 갖진 않는다. 하루키가 자신이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는 것도, 역설적으로, 유명인이며 위대한 작가로 추앙받고 있기 때문에 성립하는 얘기다. 나를 포함한 수많은 이들이 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독백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난 훗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독백이 아닌 방식으로 풀어놓기 위해서라도, 그걸 통해 화해의 방점을 찍기 위해서라도 계속 작가로 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루키가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이 책은 이런 방식으로, 쓰는 일에 동기부여를 더해 주었다. 대부분의 책이 작가의 의도와 무관한 의미를 던져주는 것으로 그 소임을 다하곤 한다. 이 책도 그런 면에선 내게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