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홍상수, 2015)
우리의 삶의 표면에 숨겨진 것들의 발견만이 우리의 두려움을 이겨내는 길이라는 생각에 공감합니다.
천연덕스러움; 홍상수 영화 특유의 위트를 가장 잘 묘사하는 수사는 '천연덕스럽다'일 것이다. 등장인물들이 주고 받는 대화들은 일차적으로 그것의 외면적인 내용을 전달하고 있지만, 동시에 은근하면서도 적나라하게 등장인물들의 내면과 욕망을 드러낸다. 이러한 내외면의 노출은 때론 상반되기도 하고 합치되기도 하며 홍상수 특유의 천연덕스러움을 자아낸다. 기승전결도 없고 특정한 서사구조도 결여되어 있어 자칫 지루해 보일 수 있는, 홍상수의 영화가 처음 관객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바로 이러한 특유의 위트 때문이다.
그러나 홍상수의 영화는 단순히 위트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그에 의해 의도된 기승전결 구조의 해체는, 그의 영화 속에 보다 깊은 통찰이 숨어있음을 암시한다. 보통의 기승전결 구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우리들은 으레 특정한 '목적성'을 향해 수렴하는 서사구조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실제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았을 때, 우리는 사실 모든 것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삶의 매 순간은 영화에서와 같은 특별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지 않다. 결말로부터 거꾸로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는 실패한다. 목적성과 인과는 해체되고 단지 시간의 도도한 흐름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홍상수의 영화에서는 이 '무목적성' 혹은 삶의 본질적인 니힐리즘이 무대 전면으로 도약한다. 그가 그려내는 것은 방향성 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우리들의 삶 그 자체이다.
삶에 있어 처음부터 정해진 방향성이나 목적성이란 허구라는 것, 말하자면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다'라는, 하나의 단순한 사실. 니체이래 이 사실은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상투적인 것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목적론의 허구에서 유리된 매 순간들의 의미는, 그 매 순간을 마주하는 우리 스스로의 어깨 위로 올라간다. 니힐리즘으로부터 유래하는 두려움의 정체는 곧 이 의미에 대한 책임감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 순간 다시 살아나가지 않으면 안 되기에 물음에 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우리는 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가?
홍상수의 영화가 보여주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무것도 결정되어 있지 않기에 모든 가능성은 열려있다’는 실존주의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2부로 구성되어 있는 그의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 1부와 2부의 도입부는 커다란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진행될수록 두 이야기는 조금씩 변주되어 시공간 상에서 완전히 다른 궤적을 그린다. 가능성들이 서로 교차하는 시공간 상의 무수한 분기점에서, 우리는 살아가는 매 순간의 주인으로서의 스스로의 위치를 실감한다. 더불어 2부가 따로 진행되는 본 영화와 달리, 단 한 번뿐인 삶의 매 순간은 그 자체로 대체 불가능한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는다. ‘이때 이렇게 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따위의 가정법은 실제의 삶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살아가는 나날들의 주인임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소중한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하여 임할 것; 홍상수의 천연덕스러움은 니힐리즘에 대한 그의 반항이다.
춘수가 희정을 조금 더 기다렸다면 둘은 다시 만날 수 있었을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알 수 없다. 나는 영화 안에 미처 상영되지 않은 3부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홍상수의 영화는, 아마 다시 살아나갈 용기를 준다고 하면 조금 과장이겠지만, 적어도 살아감에 있어 공연히 비장해질 필요는 없다는, 진리는 단순한 곳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천연덕스럽기까지 한 솔직함으로 살아나가는 삶의 매 순간, ‘지금은 옳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말이다.